눈 뜨니 새벽 3시 30분이었다. 다시 잘 수도 있었지만 뭔가 잠들고 싶지 않았다. 세수를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선명했다. 격앙된 감정이 가라앉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푹 자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 사이 어제 일이 슬며시 떠올라 얼른 씻으러 갔다. 샤워기가 쏟아내는 물줄기에 찜찜한 마음이 함께 씻겨 내려가지 않을까 하고.
어제는 더할 나위 없는 하루였다. 여느 때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 카페로 가서 글을 쓰고, 조금 뛰었다가 집에 돌아와서 씻고 아이 아침을 먹이고 출근했다. 별 탈 없이 일 잘하고 퇴근해서 아이 저녁을 먹이고 씻긴 다음 나도 씻었다. 여기까진 그랬다.
아내가 씻는 동안 3.5ml 물약 두 개를 섞은 다음, '자기 전' 스티커가 붙어 있는 가루약까지 털어넣고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었다. 감기약을 만들 때면 아이는 "까까, 까까" 거리며 진격의 거인처럼 내게 돌진하곤 했다. 감기약 주둥이를 입에 갖다대면 엄마 젖 먹듯 씩씩하게 쪽쪽 빨아먹었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친 아내가 거실로 나왔다.
"현이 감기약 먹였어~"
"뭐라고!? 내가 방금 전에 먹였는데?"
날 선 아내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귓전을 때렸다. 더없이 평화로웠던 하루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감기약을 연달아 먹이면 어떤 부작용이 일어나는지 잘 몰랐고 알아야겠단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원망과 분노가 뒤섞인 아내의 일그러진 표정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뭘 잘못했는진 모르겠으나 본의 아니게 큰 죄를 지은 것 같았다. 억울함과 서글픔이 온몸을 휘감았다.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아내가 그저 야속했다.
돌처럼 굳어버린 내 앞에서 아내는 Chat GPT에게 사태를 보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아이를 슥 흘겨보고는 겨우내 말을 꺼냈다.
"괜찮겠지."
"여보! 안전불감증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놈의 안전불감증. 나도 높은 곳에 올라가면 다리가 벌벌 떨리는구만. 괜찮아 보이니까 괜찮은 것 같다는 거지. 내 말에 매섭게 반격하는 아내에게 GPT로 그런 검색 좀 하지 말라며 나무랐다. 그에 그럼 누구한테 물어보냐, 네가 좀 알아봐라, 는 아내의 대꾸에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혔다. 삽시간에 차올라 들끓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난 결국 집을 나가버렸다. 그 와중에 거실에 널브러진 장난감은 또 치우고 나왔다. 그런 내 모습이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뜻밖의 밤산책을 하다 보니 그날 새벽이 떠올랐다. 아이 체온을 쟀는데 저체온증이 의심되는 수치가 체온계에 찍혔다. 몇 번을 재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아내는 마땅히 물어볼 데가 없어서 GPT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방법을 물었다. 그런데 그놈이 대뜸 응급실부터 가라며 권장한 것이다. 확실히 평소보다 체온이 낮긴 했다. 하지만 내 눈엔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곤히 잘 자고 있는 아이를 깨워 오밤중에 응급실을 가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바쌈바를 떠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아내를 보고는 마지못해 응급실 가보자며, 맘에도 없는 말을 뱉고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나갈 준비는 다 됐는데 그 사이 아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는지 119에 먼저 전화를 걸어 물어보자며 말했다. 담당자는 자초지종을 듣고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주었다. 사실 응급실에 와도 당장엔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집에서 상태를 조금 더 봐도 괜찮을 것 같다, 크게 위험한 정도는 아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아내는 마음이 놓이는지 표정이 풀려갔다.
문제는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한번 더 있었다는 점이다. 오밤중에 아이 상태를 GPT에게 보고했더니, 응급실부터 가보라는 GPT에 말에 갈팡질팡하다가, 119에 전화를 걸어 일단 집에서 지켜보라는 말에 다시 잠들었던 해프닝이. 그러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만 생기면 GPT부터 찾는 아내가.
나는 Chat GPT와 매일 대화를 나눈다. 내 초고의 상태가 어떤지, 어느 부분이 미흡하고 어색한지, 적절한 대체어는 없는지 등을 묻곤 한다. 인공지능과 협업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나만의 편집자가 생긴 듯한 기분에 만족스럽게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훌륭한 성능에 비해 얼마나 형편없는지도 자주 경험한다. 없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꾸며내고 이해한 척하며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몇 번을 되물어도 모양만 바뀐 같은 대답이 돌아올 때가 많았다. 그러니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땐 GPT를 거론하면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아무리 그럴싸해도 사람 눈치나 실실 보며 책임은 절대 지지 않는 놈이니까. 아직까지는.
그런 GPT에게 아내는 아이 상태를 물어보는 것도 모자라 결정권을 넘겨주고 있으니, 그녀의 폰에서 GPT를 삭제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GPT가 편리한 도구인 건 맞지만 그 편리함이 불안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파트 산책로를 하염없이 걸어도, 놀이터 벤치에 앉아 가을 밤바람을 맞아도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30분쯤 흘렀을까. 집으로 들어갔더니 아내는 양치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무심코 지나쳤다. 그에 응수하듯 아내는 거실 등을 차갑게 꺼버렸다. 그에 질세라 나도 방문을 확 닫아버리고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무조건 괜찮다며 사태를 무마하려는 나도 잘한 건 없지만 그래도 아내가 미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약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후회할까'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정말 이 상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너무 가슴이 쓰릴 것 같았다. 어차피 화해는 할 텐데 지금 그녀의 방으로 가서 비벼볼까. 이미 지나간 일인데 잘잘못을 곱씹어봤자 의미 없으니 먼저 사과할까. 하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휘둘리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새벽 3시 30분이었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다시 잠이 들지도, 글이 써지지도 않을 것 같아 이윽고 집 밖을 나섰다.
글 쓰고 달리기까지 하고 나니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집에 들어갔을 때 아내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했다. 혹시 나를 무시하진 않을까 두려웠다. 먼저 사과하고 싶었지만 막상 그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런 복잡한 심정으로 도어락을 해제하고 들어서니 아내는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로 나를 맞았다. 그런 그녀가 무척 반가웠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단 듯, 난 아내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곧장 옷방으로 들어갔다. 병신 같은 게.
아내는 슬쩍 다가와 살갑게 화해를 청했다. 강아지 꼬리 같은 게 달려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지금쯤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사정없이 흔들어 버렸을 테니까. 잘한 것도 없는 내게, 잘못한 것도 없는 아내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데도 차마 화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계속 유치하게 굴 수만은 없었다.
오만함과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나를 밀어내고 창자에서부터 용기를 한껏 끌어올리는 데 겨우 성공한 나는, 찰싹 달라붙어 화 안 풀거냐고 다그치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슬며시 포갰다.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느라 먼저 사과하지도 못하는 내게 염증을 느끼며, 매번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아내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