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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Aug 12. 2023

기술만 배우면 될 줄 알았다

목수를 시작하다


회사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현장에서 일하던 시절 가장 멋진 기술자라고 생각했던 목수가 떠올랐다. 공사현장엔 수많은 기술자들이 있었지만 유독 목수를 하던 분들에게 눈길이 많이 갔었다. 그들이 인상 깊었던 건 목수 특유의 남다른 자부심과 책임감 그리고 주체적으로 일을 끌고 나가는 느낌을 자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나 배운다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정도로 작업 난이도가 상당했던 만큼 더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목수에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의외로 현장 기술을 배우는 건 진입장벽이 높다. 아는 지인이 있다면 소개받아서 쉽게 일을 시작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현장으로 직접 찾아가서 대뜸 일을 가르쳐 달라고 하거나 나름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난 일하면서 알게 된 실력 좋은 목수팀장님이 있었다. 그분에게 직접 찾아가 일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쉽게 일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경기가 안 좋다며 꾸준한 일거리를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장엔 일을 가르쳐줄 수는 없다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다 보니, 목수들이 모여 있는 온라인 카페에서 '내장목수 일 제대로 배워보실 분'이라는 글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곳에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얼굴 한 번 보자길래 일을 빨리 배우고 싶은 마음에 다음 날 바로 현장으로 찾아갔다. 그렇게 간단한 면접을 본 다음, 150만 원어치의 연장을 사서 바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현장일을 배운다고 무조건 연장을 새로 사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들어간 목수팀의 주종목이 아파트나 원룸공사였기에 각자 흩어져서 맡은 양을 쳐내야 했던 만큼 개인연장이 필요했다. 연장값은 꽤나 비쌌지만 일당으로 금방 충당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과감하게 사버렸다.


목수 일당은 업계에서 상당히 높은 편이다. 내가 일을 시작할 때쯤엔 목수 팀장급 일당이 35만 원 정도였다. 지금은 물가가 많이 올라서 아마 40~50만 원 사이일 거라고 예상한다. 목수뿐만 아니라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일당이 높았다. 일이 아무리 거칠고 힘들어도 일당 하나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을 만했다. 처음 일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연령대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중후반이 가장 많았는데 다들 현장에 오게 된 계기는 비슷하다. 오래 다닌 직장을 그만뒀거나, 사회적으로 크게 실패해서 오갈 데가 없거나, 처음부터 일당 하나만 보고 왔거나. 사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가 모두 해당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내놓을 만한 기술도 없고 갈 곳도 없는데 평균 이상의 돈은 벌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현장에 많이 찾아왔다.


내가 처음 목수일을 배울 때는 28살이었다. 현장에 처음 일하러 오는 사람들에 비하면 엄청 어린 나이에서부터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경우였다. 그래서 그런지 날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던 건지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름의 인생 조언과 성공담, 실패담 그리고 지금부터 기술을 잘 배워놓으면 미래가 무조건 밝을 거라는 근거 없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곤 했다. 사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뭔가 여전히 과거에 맺혀 있는 사람 같았다. 앞날에 대한 계획보다는 예전의 화려한 업적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말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영광을 토로하는 그들에게서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현장에서 만난 인생 선배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몰래 하곤 했다. 나도 살다 보면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모르니까.




그러나 난 이미 나대로의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흘러넘치는 일복은 인생의 뿌리 박힌 팔자인 건지, 보통 건설현장은 퇴근 시간을 칼 같이 지키는 편인데 하필 내가 들어간 팀은 퇴근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든 말든 큰 형님이 '집에 가자'라고 해야만 퇴근할 수 있었다. 심한 날은 밤 10시까지도 일한 적이 있었다. 잔업수당은 당연히 받지 못했다. 그 돈 다 받고 일했으면 그나마 늦게까지 일할 맛이라도 났겠지만, 남는 거라곤 '고생했다'라는 말 한마디뿐이었다.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떠돌이 생활이었다. 이를테면 순천에서 1주일, 포항에서 1주일, 대전에서 1주일 이런 식이었다. 형님들과 모텔에서 지내다 보면 꼭 군대를 다시 들어간 것만 같았다. 가뜩이나 다른 팀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서 몇 시간씩 늦게 퇴근하는데 밤에 술까지 마셔야 했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목수생활에 현타가 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일거리와 관련된 극복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들이었다. 일이 많은 달은 한 달에 쉬지도 않고 30일 연속으로 일하기도 하지만, 일이 없는 달은 한 달에 보름을 채우기도 힘들었다. 그만큼 수입도 들쑥날쑥했다. 일당이 아무리 높아도 1년 평균으로 나눠보면 결코 많은 돈을 버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거리가 없을 때 편히 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거리가 없을수록 작은 일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일정을 최대한 비워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거의 5분 대기조나 다름없었다. 전화가 오면 무조건 나가야 했다. 새벽 5시에 일이 생겼다는 전화를 받고 갑자기 출근하기도 하고, 비가 와서 쉬기로 해놓고 난데없이 비가 그쳤다며 나오라는 전화를 받고 출근한 적도 많았다. 결국 일거리가 많아도 문제고, 없어도 문제였던 것이다.


일을 쫓아가며 살아야 하는 삶은 참 고달팠다. 일감 따라가느라 지역이동이 워낙 들쑥날쑥했기에 당장 내일도 대체 어디에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간단한 약속 하나도 잡지 못했다. 누가 미리 날 잡아서 보자고 하면 차마 확답을 줄 수가 없었다. 애매한 상황 만들기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확답을 하지 못한다니 그만큼 답답한 것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결혼도 못할 것 같았다. 내 원대한 꿈의 가장 큰 영향을 차지하는 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건데, 이렇게 바깥으로 나돌며 일해서는 결혼을 하더라도 종국에는 쫓겨날 것만 같았다. 내가 여자라도 불안정한 일에 질질 끌려다니는데 수입까지 불안정한 남편과는 살기 싫을 것 같았다.


알고 보니 기술이 다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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