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만만치 않은 사회생활
난 공부에 관심이 없고 딱히 좋아하는 일도 없으며 주관이 뚜렷하지도 않았던 별 볼 일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군생활 도중 우연찮게 책을 읽기 시작한 덕분에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새로운 사람이 되어갔다. 아무 생각 없이 살던 내가 어느새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 여파로 인해 제대 후 복학하면서부터는 공부를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성적은 약간 오른 수준이 아니라 첫 학기부터 과탑을 찍고 그걸 졸업할 때까지 유지했다. 그런 나의 모습을 좋게 봐주신 교수님의 추천 덕분에 실내디자인이라는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서울 역삼동에 위치한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대구에만 살았던 내가 서울에 있는 회사로 취직하다니, 그 길로 난 성공할 줄 알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뭘 해도 다 잘해왔던 나였기에 하던 대로만 하면 될 줄 알았다. 만약 내가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는 날이 온다면, 그땐 눈부신 성공을 이루고 난 이후일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부터 회사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되면 자연스럽게 성공할 줄 알았다. 그래서 당연히 난 성공할 거라고 확신했다. 열심히 하는 건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생활의 고충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난 그들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 더군다나 사회생활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 해왔던 거의 모든 것들의 성과가 좋았기 때문에 '열심히만 하면 된다'라는 신념에 금이 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는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입사 후 첫 현장부터 대전으로 파견을 나가 3개월 동안 사수와 숙소생활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만난 상사는 기본적인 업무 능력도 뛰어나고 내가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술을 너무 좋아했던 나머지 퇴근하면 매일 함께 술독에 빠져 살아야 했다. 2개월 만에 살이 20kg 가까이 불어나 인생 최대의 몸무게를 찍을 정도였다. 나도 술을 참 좋아했지만, 다음 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야 하는 신입사원 입장에서 매일 그렇게 죽도록 마시는 건 그 자체로 고역이었다.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업체 사장님들의 접대자리 덕분에 밤을 새우는 일도 잦았다. 당연하게도 정해진 퇴근시간은 없었고, 공사일정에 쫓기느라 휴무도 자연스럽게 반납했다. 그래도 참았다. 대전 현장만 끝나면 괜찮을 거라고 나를 위로했다. 그렇게 버티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뒤로 발령받은 곳은 공사기간 동안 수십 명이 관둔다는 백화점 공사현장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기만 했던 나는 오히려 커다란 현장에서 일해본다는 사실에 설레기도 했었다. 그러나 거친 곳에서 거친 일을 하다 보니 순하디 순했던 내가 어느새 쌈닭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점심시간 전까지 전화만 100통 가까이하는 건 일상이었다. 이상하게 내가 거칠어져 갈수록 오히려 상사들은 더 좋아했다. 참 어리석게도 그런 얄팍한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에 몸을 더 혹사시킨 것도 없잖아 있었다.
그렇게 도저히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혹독한 업무환경 속에서도 나름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점점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4개월 보름의 공사기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매일 18시간 이상의 근무를 했다. 가끔 밤 10시쯤 퇴근하면 정말 일찍 마쳤다며 함께 일하던 동생과 맥주 한 잔 할 만큼 좋아했다. 열악한 업무환경에 회사 내부적인 문제까지 겹치는 바람에 설계팀장은 세 번이나 바뀌고, 중간급 직원들은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오기 일쑤였으며, 공사과장은 공사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백화점 공사가 끝날 때까지 버틴 사람은 책임자인 현장소장과 나 그리고 입사동기였던 동생뿐이었다. 그만큼 일이 힘들었다. 평소 내가 존경하던 이사님에게 들은 말로는 그 백화점 공사현장이 본인이 수십 년 동안 일해봤던 곳 중에서 가장 최악의 현장이었다고 한다. 돈이라도 모을 수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 한 달 월급은 세금 떼고 147만 원이 들어왔는데, 신림동에 있는 자취방 월세가 한 달에 54만 원이었다. 하필 월급날과 월세 자동이체 날짜가 같아서 월급날 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100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성공하고 싶은 욕망과 회사의 중역이 되고 싶은 야망에 의지하며 버텨냈었다. 그러나 욕망을 땔감으로 타오르던 열정은 현실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꺼진 지 오래였고, 어느 정도 일하다 보니 그토록 되고 싶었던 임원들의 삶도 그리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직급이 높을수록 나보다 더 힘들게 일하는 것 같았다. 대체 서울의 그 비싼 집들은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월급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었다. 서울에서 일하기 전까지만 해도 서울 사람들은 다 돈을 많이 버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지방보다 적으면 적었지, 서울이라고 해서 결코 더 많이 버는 건 아니었다.
열심히 일을 해도 답이 없고, 승진을 해도 행복한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이렇게 힘들게 일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이 일어나니 걷잡을 수 없는 막연함이 밀려왔고, 그렇게도 당찼던 포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난 백화점 공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히며 사직서를 제출했다. 서울로 올라갈 당시에 주변 사람들은 내가 누구보다도 잘 될 거라며 진심 어린 응원을 해줬고, 나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대학교를 졸업하며 함께 올라갔던 동기들 중에서 가장 먼저 서울을 벗어나 고향으로 도망치듯 내려오게 되었다.
운이 따라주지 않았는지, 너무 대책이 없었던 건지는 몰라도 첫 회사부터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경험하고 나서 깨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나의 믿음과 확신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회사의 직원으로서는 열심히 해도 문제고, 열심히 하지 않아도 문제였다. 그리고 '열심히'의 문제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는 대가로 겨우 생계를 유지할 만한 수준의 월급을 받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한계를 온몸으로 직접 부딪히고 나니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학교에서는 나름 신으로도 불렸던 내가 막상 필드로 나가보니 한없이 나약하고 무능력한 인간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을 정복하기에 나는 너무 순진한 애송이였다.
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형편없고 무능력한 인간이라는 걸 깨닫게 해 준 쓰라린 기억들은 되려 인생의 방향을 다시 짚어보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내게 주어진 업무에 대한 신경을 가장 많이 썼지만, 그에 못지않게 관심을 두었던 건 나보다 먼저 입사한 선배들과 회사 꼭대기에 있는 임원들의 삶이었다. 난 내 미래를 미리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켜본 결과, 그들의 삶은 단 하나도 부러울만한 게 없었다. 심지어 "왜 저렇게 살아가지?"라는 의문마저 들었다. 알고 보니 성공은 열심히의 문제가 아니었다. 열심히는 기본 중에 기본이었고, 노력의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내가 본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몫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고, 수많은 시련을 버텨가며 살아내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직장인으로서의 한계점을 넘지 못할 뿐이었다.
직장생활에 답이 없다는 건 첫 직장만 다녀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던 대로 살아가면 언젠가는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삶의 방향을 다시 잡는 방황의 길로 들어서는 건 일종의 도박과도 같았지만, 설령 인생이 꼬이는 한이 있더라도 회사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뻔한 길을 걷긴 싫었다. 전혀 반갑지 않은 미래가 대놓고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그걸 넋 놓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비록 길을 좀 더 돌아갈지언정 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젊을 때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부터라도 '내 것'을 찾지 않으면, 나중에 고개를 똑바로 들고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열심히만 하면 될 거라는 유일하고도 막연했던 희망은 사라졌지만, 덕분에 직장생활은 답이 없다는 걸 일찍이 깨닫고 '나만의 무언가'를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