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포기하고 시간을 구하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직한 마지막 직장에서 7천만 원이 넘는 연봉을 책정받았다. 세금을 다 떼고서도 한 달에 400만 원이 통장에 꽂히고 성과금까지 들어왔다. 더군다나 변동지출이 거의 제로에 가깝고 갚아야 할 빚도 없었기에 한 달에 300만 원에 가까운 금액을 저축할 수 있었다. 돈 모으는 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 같았다. 이대로만 살면 크게 걱정할 일 없이 무난하게 살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주제넘게 많은 돈을 받는 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건 내 시간의 대부분을 회사에 반납해야 하는 것이었다. 특히 출근하는 날은 개인시간이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면 녹초가 돼서 잠들기 바빴다. 심지어 쉬는 날마저 확실하게 쉰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 많은 돈은 결코 그냥 주는 것이 아니었다. 회사가 주는 돈의 액수는 실질적인 나의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월급이란 단지 인생의 지분을 얼마나 회사에 바치느냐에 따른 비례치에 불과했다. 사회에 진출한 이후로 통장에 가장 많은 월급이 꽂히는데도 전혀 뿌듯하지가 않았다. 인생의 대부분이 회사에 묶여있는 현실이 괴롭기만 했다.
난 세상과 사람들에게 이로운 가치를 제공하고 그에 따라오는 보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고 싶었다. 내게 직장은 그런 능력을 갖추기 전까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퇴직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회사에서 버티고 살아남으려고 애쓸 게 아니라, 어떡해서든 그런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직장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취지가 아무리 훌륭해도 시간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 시간은커녕 건강 하나 챙기기도 힘들었다. 출근하면 꼬박 14시간이 흐른 뒤에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고,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계속 빠질 만큼 노동강도마저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게 분명히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나름의 방법을 찾아보며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지만, 터무니없이 부족한 시간 앞에서 다음 날 출근하기 위해 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한 집에 사는 아내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덕분에 난 돈이 아무리 많아도, 시간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현실적으로 돈과 시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는 없었고, 내게 필요한 건 당장의 많은 월급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돈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곳으로 이직하기로 결정했다. 그땐 결혼을 앞두고 있던 예비신랑이었기에 월급이 반토막 나는 곳으로 직장을 옮기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시점에서 좀 더 많은 돈을 받겠다고 젊음을 희생하는 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특히 돈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간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었다. 인생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만큼 내 돈이라고 해서 완벽한 통제가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렇게 돈을 포기하고 시간을 벌게 된 나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나와 조용히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고, 운이 좋게도 그 과정에서 글쓰기라는 인생의 과업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드디어 내게도 좋아하는 일과 꿈이 생긴 것이다. 그 후로 한 명의 작가로서 살아가는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하루도 빼먹지 않고 글을 쓰고 있다. 자신만의 중요한 할 일이 생긴다는 건 곧 인생의 중심이 바로 잡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난 시간과 더불어 '일'의 중요성도 뼈저리게 깨달았다. 만약 돈을 포기하지 못해 전 회사에 계속 남았다면, 좋아하는 일도 꿈도 영원히 찾지 못한 채 후회로 가득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직장인의 한계가 명확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여전히 회사를 다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는,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머릿속으로는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체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기 때문에 찝찝한 마음을 안고 살던 대로 계속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그런 퇴직 후의 삶이 막막한 사람들에게 시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인생의 과업을 찾고자 하는 의지를 자극하기 위해서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돈 버는 자랑만큼 쓸모없는 것도 없다. 언제까지 시간과 에너지를 교환하는 대가로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시간은 한정적이며 인간의 몸은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런 삶을 지속하면 언젠가는 기반이 흔들리게 된다. 남들의 절반을 벌더라도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공유함으로써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한 명의 생산자가 되는 게, 훨씬 더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린 이미 자신을 브랜딩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직장생활에 답이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면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여 좋은 직장만 가면 성공할 거라는 세간의 사기극에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힘들겠지만, 착각 속에 살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비로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만이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고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간절히 원한다면, 용기를 내서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동안 애써 외면하기만 했던 불편한 진실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전에 없던 깨달음을 얻음과 동시에 여태껏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건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발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내가 글쓰기를 발견하게 될지는 전혀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아직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해 영혼 없이 회사만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부디 내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담긴 이야기를 통해 긍정적인 자극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