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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들멘 Mar 25. 2023

지렁이

삶의 온도는 따뜻한가요?

   우연이란 인연의 씨앗이다. 살다 보면 우연히 바로 눈앞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거를 보거나 누군가를 만나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으며, 또 관심이 가는 것이라면 그건 예전부터 무언가 연결고리가 있을 법한 인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달 전부터 맨발 걷기에 꽂혀서 이리저리 방법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인이 운영하는 카톡방에서 올라온 알림을 보았다.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 서울숲에서 맨발 걷기 모임을 한다고 했다. 2주 전 토요일에 맨발 걷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보려고 갔었다. 그런데 정확한 위치를 몰라 조금 헤매다 보니 3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참가한 사람들은 이미 걷기 전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주최 측과 따로 약속한 것도 아니라 합류할까 말까 머뭇거리다가 한쪽에 서서 그들이 하는 모습만 살펴보았다. 잠시 후 대부분이 여성인 그들 일행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맨발로 이동을 시작했다. 나는 신발을 그대로 신고 걸으면서 보조를 맞췄다. 서울숲은 초행길이었기에 보행로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전혀 몰랐다. 


그래서 일단 그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걷는지를 알아보고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들을 따라 걷다 보니 서울숲의 보행로는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는 콘크리트 길로 자전거나 어린아이를 태운 유모차가 주로 다니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흙으로 된 길이다. 

흙길을 자세히 보니 그것은 원래 흙으로만 된 길이 아니라 콘크리트 길 위에 흙을 덧씌워 놓은 것이다. 흙길은 흙길이니 맨발로 걷기에는 안성맞춤인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굳이 토요일에 맨발로 걷는 사람들과 무리 지어 걷지 말고 내가 편한 날 혼자서 맨발로 걷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지난주에 서울숲에 가서 처음으로 맨발로 걸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부담스러웠으나 발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흙의 촉감은 짜릿했다. 매주 한 번은 거기에 가서 맨발로 걷기로 했다. 며칠 전 아침에 일어났을 때 두 번째로 서울숲에 가서 맨발로 걸으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하지만 집을 나서 걸어가면서 별다른 이유 없이 목적지를 일자산으로 변경했다. 

보통 때는 일자산 공원에 가면 그곳의 트랙을 단순히 돌면서 걷는다. 하지만 그날은 여느 때와 달리 일자산 공원으로 직접 가지 않고 하남시 초이동 쪽으로 올라갔다. 10여 분 후에 산등성이가 시작되는 쉼터에 도착했다. 몇 명의 남자들은 각각 혼자 운동하고 있었으며, 아주머니들은 2, 3명씩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바로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 길을 따라 걸어갔다. 잠시 후 나무로 된 계단 아래의 마른 흙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워하는 지렁이가 보였다. 지렁이란 원래 땅속 습한 곳에 사는데 이놈은 어쩌다가 사람들이 다니는 길 위로까지 왔는지? 살려고 바둥거리면 그럴수록 인절미가 콩고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흙먼지가 더욱 그놈의 몸을 뒤덮었다.     

예전에도 일자산 공원을 걷다 보면 사람들이 다니는 길 위에 올라왔다가 사람들의 발에 밟혀 죽은 지렁이들을 가끔 보았다. 그리고 설령 살아있는 거를 보았어도 무심코 그냥 지나쳤었다. 그런데 이놈을 보고는 자석에 끌리듯이 다시 발걸음을 되돌렸다. 그리고 이놈을 길옆의 숲속 축축한 곳으로 옮겨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주위를 살펴보니 떡갈나무의 마른 잎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중에 튼실한 잎 두 장을 주워서 이리저리 움직여 지렁이를 담았다. 하지만 이놈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나뭇잎은 지탱하지를 못했다. 나뭇가지를 찾아서 다시 나뭇잎에 올리고 받친 후에 몇 발짝 발걸음을 옮겨 숲속으로 걸어갔다. 

지나가던 아주머니 두 분이 내가 이놈을 나뭇잎에 올려서 숲속으로 이동하여 던져주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서로 묻고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곤충을 살려주려고 하는 거야?”

“지렁이네.”

들고 있는 지렁이를 보면서 징그럽다고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길 위에 나와 있는 이놈을 살리려는 나의 행동이 신기한지 ‘잘한다’라고 손뼉을 쳤다.      


   얼마 전 일자산 중앙잔디공원 광장에서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구전동화 형식으로 공연하는 것을 보았다. 어린아이들도 흥부가 처마 밑의 제비집에서 떨어진 새끼 제비의 다친 다리를 고쳐준다는 줄거리를 다 알고 있다. 그와 비슷하게 사람이 다니는 길 위에서 일촉즉발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던 지렁이를 숲속으로 되돌려 보내고 나니 파란 가을하늘이 더 파랗게 보였다.

왜 나는 미물에 불과한 그 지렁이를 살리겠다고 생각했을까? 이놈에 대한 연민의 정인가 아니면 알량한 자연보호나 동물사랑 정신이 발동한 것인가? 아니다. 분명 이놈과 나는 인연의 연결고리가 있었을 것이다. 전생에서 이놈은 많은 음덕을 쌓았고, 나는 많은 덕을 봤을 것이다. 전생에서는 오히려 그 지렁이가 나를 이놈 또는 미물이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사연의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는 노랫말이 떠오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왜 그 짧은 찰나에 발걸음을 되돌려 보기에도 징그러운 이놈을 살리려고 애를 썼을까? 그리고 평소에 가지 않던 그 길을 바로 그 시간에 지나가게 된 거도 이놈을 살려야 하는 필연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오늘 이놈을 만난 산등성이는 흙으로 된 길이다. 여기저기 나무뿌리와 돌멩이가 있기는 하지만 맨발로 걷기에 적당할 것으로 보였다. 이놈 덕분에 겨울이 와서 추워지기 전까지는 종종 맨발로 걸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았다. 반면 이놈은 땅속으로 들어가 ‘휴! 십 년 감수했네. 다시는 사람 다니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라고 작심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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