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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조율되지 않은 전제

우리는 전제가 다르다는 걸 모른다.

by 아르칸테

조율되지 않은 전제 – 우리는 전제가 다르다는 걸 모른다

대화가 어긋날 때,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그걸 왜 그렇게 받아들여?”
“아니,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왜 그렇게 과하게 해석해?”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대는 정말 그렇게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고 믿는다.

어느 쪽도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서로의 ‘진심’을 듣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할 때마다,
‘무언가’를 전제로 깔고 말한다.
그건 어투일 수도 있고,
가치관일 수도 있고,
경험에서 나온 판단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전제가 서로 다르면
같은 단어도, 같은 말투도, 전혀 다르게 들린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 다르게 들은 것’이다.
문제는,
우리는 대부분 그 사실을 모른다.


서로 다른 가족 문화, 말투, 해석 방식

– 말은 같지만, 언어의 뿌리는 다르다

한 사람이 자라온 집에서는
큰소리로 말하는 게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또 다른 사람에겐
큰소리는 ‘화를 낸다’는 신호다.

한 사람은
침묵이 존중이라고 배웠고,
또 다른 사람은
침묵이 무관심이라고 배웠다.

어떤 가족은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었고,
다른 가족은
지적은 모욕이고 상처라고 느꼈다.

이처럼 사람마다 말의 뿌리는 다르다.
어떤 어조에 담긴 ‘기본 감정’도 다르고,
말이 사용되는 ‘상황의 규칙’도 다르다.

그런데 이 서로 다른 언어의 문법을 모른 채,
사람들은 ‘자기 말이 옳다’고 믿으며 대화한다.
그리고 곧 이렇게 말하게 된다.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아니, 이건 상식이잖아.”
하지만 그 상식은
상대에겐 ‘비상식’일 수 있다.

이해의 단절은
‘어휘’가 아닌 ‘언어의 기반’에서 일어난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 다르게 들은 것’의 의미

– 의미는 말이 아니라 전제에서 발생한다

“그 말을 왜 그렇게 해석해?”
“그냥 있는 그대로 들으면 안 돼?”

이런 말들은
‘내가 말한 그대로 이해해달라’는 요구다.
하지만 이 요구 자체가 불가능하다.

말이란
입에서 나오는 순간,
듣는 사람의 삶과 경험을 통과해

‘다른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말은 ‘정보’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의 작용’이다.
그리고 관계는
언제나 전제 위에 서 있다.

예를 들어보자.

회사에서 상사가 직원에게 말한다.
“이거 다시 검토해줘.”


A는 이 말을
‘신뢰’로 듣는다.
“내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구나.”


B는 이 말을

‘불신’으로 듣는다.

“또 나만 못 믿는 거야?”


이 둘의 차이는
문장이 아니라 전제다.

A는 '검토는 과정'이라는 문화를 배웠고,

B는 '검토는 의심'이라는 문화를 겪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말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상대는 왜 그렇게 들었을까?”라고.
‘틀렸다’가 아니라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대화는 다시 시작된다.


말의 층위, 권력, 맥락을 읽는 기술

– 말은 문자보다 넓고, 뉘앙스보다 깊다

우리는 말을 들을 때
표면적인 단어만 듣는다.
하지만 말은
‘층위’를 가진다.

그 층위에는
감정, 위계, 맥락, 목적이 섞여 있다.

예를 들어
“그만하자”라는 한 마디에도
수많은 층위가 있을 수 있다.

겉의 말: 관계를 정리하자는 뜻

감정의 층: 서운함, 포기, 절망, 분노

맥락의 층: 반복된 오해와 피로, 기대의 무너짐

권력의 층: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는가

목적의 층: 진짜로 끝내려는 것인지, 경고인지, 시험인지

이 층위들을 읽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이 층위를 읽는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말은 문자처럼 납작해지고,
그 안에 담긴 진짜 신호는 묻힌다.

이 책에서 말하는‘구조 감시’란
말의 표면이 아니라,
그 밑에 깔린 구조를 감지하는 능력이다.

그 구조는 어디서 왔는가?
이 말은 어떤 관계 속에서 나왔는가?
이 말이 갖는 감정적/사회적 무게는 어떤가?

그것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말 너머의 진심을
‘추측’이 아닌 ‘이해’로 받아들일 수 있다.


같은 말, 다른 맥락의 사례 분석

– 말은 사람이 아니라, 구조 속에서 다시 들려야 한다


사례 1.
“나 좀 내버려 둬.”
– 연인 관계에서


A는 이 말을
“당분간 연락하지 말아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피한다.

B는 이 말을
“진짜 날 떠나는 거야?”라고 느끼고
상처받고 눈물을 흘린다.

여기서 중요한 건,

A는 ‘상대의 공간을 주는 게 배려’라는 전제를 갖고 있었고,

B는 ‘연결은 오히려 더 확인해야 하는 것’이라는 정서를 갖고 있었다.

같은 말,
다른 해석,
그리고 그 사이의 이해 실패.

사례 2.
“이건 좀 다시 해오자.”
– 직장 내 피드백

상사는 단순히 품질을 개선하자는 취지였지만,
직원은 ‘내 노력을 무시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 직원은
평생을 ‘한 번에 인정받기 위해 애써온 사람’

이기 때문이다.

‘일’에 대한 피드백이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바뀌는 순간,
말은 칼이 되고,
상대는 방어벽 뒤로 숨는다.

우리는 말의 내용을 조심하는 것만큼이나
말이 도착하는 ‘전제의 땅’을 인식해야 한다.
그 땅이 어떤 질감인지 모른 채,
아무리 정중하고 논리적으로 말해도
그 말은 곧 오해의 씨앗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전제를 맞추는 훈련’이 필요하다

말은 혼자서 완성되지 않는다.
듣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말의 의미는 다시 쓰인다.

그렇다면 진짜 대화란
단어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전제를 맞추는 일이다.

당신의 언어가 가 닿을 땅은
단단한 흙일 수도,
깨지기 쉬운 유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고 던진 말은
누군가에겐 칼이 된다.

우리는 이제 배워야 한다.
말의 구조를 읽고,
상대의 전제를 물으며,
‘다름’을 인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이해는

‘너와 내가 같다’는 착각에서가 아니라,

‘너와 내가 다르다’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다름을

맞춰보려는 태도에서
진짜 대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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