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서로 왜곡해서 듣는가
사람은 누구나 방어한다.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쓸모없는 존재로 느껴지지 않기 위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방어는 타인을 향한 이해를 가로막고,
자신조차 오해하게 만든다.
우리는 소통을 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기 안의 방어막을 통과한 '왜곡된 해석'만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말은 들렸지만 내용은 바뀌고,
진심은 전해졌지만 감정은 뒤틀린다.
어떤 말은 “비난”으로 해석되고,
어떤 피드백은 “무시”로 받아들여진다.
그 말이 정말 그런 의도였는지와는 무관하게,
이미 내 안의 방어기제가 판단을 내려버린다.
결국,
우리는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말이 내 자존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먼저 듣는다.
그래서 소통은 실패하고,
관계는 미묘하게 금이 간다.
나를 지키려는 마음이 진실을 가린다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욕구가 지나치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방어하기 위해
진실도, 관계도 왜곡하게 된다.
조언을 들었는데
그게 “비난”처럼 들린다.
질문을 받았는데
그게 “불신”처럼 느껴진다.
상대는 단지 자신의 입장을 말했을 뿐인데,
나는 이미 내 마음속에서
그 말을 ‘공격’으로 번역해버렸다.
왜냐하면,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존재 자체가 무너질 것 같은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언어를 만든다.
“그건 네가 몰라서 그래.”
“나도 다 이유가 있었어.”
“난 그냥 솔직했던 거야.”
그 언어의 저변에는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고집이 숨어 있다.
자기 정당화는
일시적으로 마음을 보호해주지만,
관계에서는 고립을 만든다.
왜냐하면 그 정당화는
타인의 말이 들어갈 틈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진짜 듣고 싶은 건 “맞아, 너가 옳아”라는 말
“너무 힘들어.”
“진짜 속상했어.”
“그 사람 너무 나빴지?”
이런 말들 속에는
‘공감’이라는 단어가 걸려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동조’를 원할 때가 많다.
다르게 말하면,
“내 편 들어줘”라는 신호다.
공감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조는 그 감정에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공감은 때로
“그렇게 느낄 수 있지. 하지만
그 사람 입장도 한번 생각해볼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종종
“네 감정을 부정했다”는 반응을 낳는다.
왜일까?
우리는 위로받고 싶지만,
그 위로가 ‘동의’의 형태로 오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는
진짜 소통을 가로막는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고,
나를 지지하지 않으면
‘공감하지 않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결국, 상대는 말을 줄이고,
우리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며
점점 더 혼자 외로워진다.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 뒤에 숨은 전략
“나는 피해자야.”
“나는 그냥 참은 거야.”
“그 사람이 먼저 그랬어.”
이런 말들은 종종
스스로를 방어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상대보다 도덕적 우위에 서기 위해,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물론, 실제 피해자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피해자라는 프레임을 스스로 구축하려는 심리’다.
피해자 프레임의 무서운 점은
그 순간부터
자기 행동에 대한 검토를 멈추게 만든다는 데 있다.
“그땐 어쩔 수 없었어.”
“내가 그렇게 된 것도 다 그 사람 때문이야.”
“나는 그냥 반응했을 뿐이야.”
책임은 외부로 향하고,
성찰은 멈춘다.
그리고 그 말은
상대방을 악역으로 만들고
자신은 ‘무력한 선량함’으로 포장한다.
피해자 전략은
윤리적 우위를 가장한 자기 합리화다.
그리고 이 전략이 반복되면
타인의 말은 점점 ‘가해’로만 들린다.
듣지 않게 된다.
이해하지 않게 된다.
오직, 방어만 하게 된다.
– 빠른 분류의 함정
“아, 저 사람은 원래 저래.”
“또 그 얘기네.”
“그런 말투면 말 다 했지.”
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판단한다.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그 말의 전후 사정을 파악하기도 전에
우리 머릿속에서는 이미 ‘해석’이 끝나 있다.
이런 판단은
우리를 편하게 만든다.
모든 말을 ‘이해’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판단은 단 몇 초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편안함은
관계에 있어 치명적인 독이다.
내가 듣는 말은
그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내가 가진 ‘기억과 판단’의 필터를 통과한
왜곡된 잔상일 수 있다.
상대가 아무리 다르게 말해도
“너는 원래 그런 애잖아”라는 프레임이 있다면
그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건 단지
이미 정해진 결론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일 뿐이다.
판단이 빠를수록
이해는 얕아지고,
해석은 단편적이 되고,
관계는 메마른다.
원래 인간은 익숙하고 편안한것을 더 좋아한다.
그렇다고해서 사람을 익숙하고 편하게
상대하면 안된다.
사람은 계속해서 변하는 존재이기때문이다.
천천히 생각하고 천천히 말한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좋다.
– ‘진짜 말’은 듣지 않는 우리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진짜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만을 해석하고 있다.
그 말이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지,
나를 위협하는지,
내 감정을 흔드는지.
말 자체보다
그 말이 나의 자존감에 주는 파장이
우선순위가 된다.
그래서
상대는 “미안해”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말투가 더 기분 나빠”라고 반응하고,
상대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라고 해명하는데
나는 “그럼 내 기분은 어떻게 할 건데?”라고 대답한다.
말은 있지만,
의미는 서로 다르게 전해진다.
진심은 있지만,
그 진심은 방어막에 막혀 닿지 않는다.
우리는 왜곡해서 듣는다.
그리고 그 왜곡은
나를 지키기 위해 만든 장치지만,
결국 나를 고립시키는 벽이 된다.
이 책은 그 벽을 마주 보게 한다.
그 벽을 무너뜨리는 기술이 아니라
그 벽의 존재를 자각하고,
그 위에 다리를 놓는 훈련을 시작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듣는다는 것은
상대를 받아들이는 윤리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택은,
훈련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