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말을 한다.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마디의 말을 주고받는다.
아이에게, 연인에게, 동료에게, SNS에,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말은 늘어났다.
기술은 우리를 연결했고,
플랫폼은 표현의 장을 넓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말은 많은데, 왜 이토록 오해가 많을까?
왜 우리는
“그게 내 의도가 아니었어.”
“그렇게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말하지 말 걸 그랬다.”
이런 말을 반복하며 관계를 후회하는 걸까?
이해되지 않는 말은 상처가 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은 말은 분노가 된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우리는
말을 계속하지만,
서로를 점점 더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말은 있는데,
이해는 없다.
“이해 없는 말은, 소통이 아니라 통제다.”
A_Kante
처음 MBTI가 유행했을 때,
사람들은 흥미로워했다.
“나는 T였구나, 감정보다 논리가 우선이었네.”
“넌 F니까 그런 말에 상처받는 거지.”
자기를 이해하는 열쇠가 생긴 것 같았고,
타인을 읽는 지도가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 열쇠는 자물쇠가 되었고,
그 지도는 벽이 되었다.
“넌 T라서 그런 거야.”
“F는 원래 감정적이야.”
“나는 INTP니까, 이런 말투 이해 못 할 수도 있어.”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유형에 따른 포기’를 택했다.
성격이라는 이름의 설명이
이해를 대신하는 순간,
대화는 닫힌다.
MBTI는 본래
“그럴 수도 있다”는 도구였지만
사람들은 “그렇다니까”의 무기로 쓴다.
그리고 그 순간,
말은 더 이상 열려 있지 않다.
상대를 들을 준비 없는 대화는,
결국 이기적이다.
A_Kante
– 라벨링으로 소통이 멈추는 순간
말에는 흐름이 있다.
질문이 있고, 기다림이 있고,
오해가 생겼을 때는 해명이 따라야 하고,
상처가 생겼을 땐 진심이 회복을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라벨은 흐름을 끊는다.
상대의 말이 불편할 때,
그걸 듣기 싫을 때,
사람들은 그 말을 성격으로 돌린다.
“원래 그런 성격이잖아.”
“MBTI 보면 나올 텐데?”
“그런 말 하는 거 보니 ENFP네.”
그 순간, 말은 더 이상 말이 아니다.
그건 기호로만 해석된 코드이고,
사람은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알고리즘이 된다.
그 어떤 감정도,
그 어떤 사정도,
라벨 앞에선 무력하다.
왜냐하면, 그건 ‘틀에 들어가 있는 말’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편안해진다.
노력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해한 척만 해도 되니까.
사람은 어느 한곳에 고정된 물자체가 아니다.
A_Kante
타자 맥락의 실종
사람들은 이제 말할 줄 안다.
하지만 듣는 법은 점점 잊고 있다.
감정을 말하는 법은 익숙해졌지만,
상대의 감정을 유추하고 기다리는 능력은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지금 우리는
‘표현은 자유지만, 해석은 제한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
내 감정은 누구보다 소중하지만,
상대의 감정은 불편한 것으로 간주된다.
“나는 지금 너무 힘들어. 그러니까 그만해.”
“네가 뭘 느끼든, 내 감정이 더 중요해.”
“나는 그렇게 느꼈어. 그게 전부야.”
감정이 선언이 되고,
감정이 진실의 전부가 되는 순간,
대화는 닫힌다.
감정주의는,
‘내 감정’은 철저히 보호하면서
‘타인의 맥락’은 외면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대화는 감정의 대결장이 된다.
이해가 아니라 설득의 전쟁이 된다.
설득 하고 싶다면 그사람의
마음을 읽을수 있는 공감이 필요하다.
A_Kante
– 경쟁, 불안, 피로의 말살 효과
하지만 이 모든 현상은
개인의 성격이나 태도 때문만은 아니다.
현대 사회는
경쟁적이다.
지속적으로 비교하게 만들고,
늘 ‘이겨야 살아남는다’는 메시지를 각인시킨다.
불안하다.
직업도, 관계도, 감정도
불확실성 속에 흔들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친다.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너무 오래.
그 피로 속에서
사람은 타인의 감정을 감당할 힘을 잃는다.
공감은 에너지다.
이해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삶이 무너질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아, 귀찮아.”
“그 얘기 또 들어야 해?”
“지 혼자 정리하겠지.”
말은 들어도 ‘듣지 않고’,
대화는 해도 ‘통하지 않으며’,
관계는 있어도 ‘닿지 않는다.’
감정은 참아내는 게 아니라,
함께 이해하고 나누는 것이다.
A_Kante
– 이 시대의 언어는 왜 닿지 않는가
이 시대는 말로 넘쳐나지만
그 말은 점점 텅 비어간다.
‘의도’는 있지만 ‘맥락’은 없고,
‘표현’은 있지만 ‘해석’은 빠져 있으며,
‘말투’는 있지만 ‘존재의 온기’는 없다.
우리는
다정한 척 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논리적인 말투 속에서
감정을 방치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대화는 줄어든다.
말이 닿지 않으니,
차라리 말하지 않게 된다.
이해받지 못하니,
차라리 혼자 해석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섬으로 들어간다.
MBTI라는 성격의 섬,
감정이라는 고립된 방,
일상이라는 외로운 트랙 속에서
서로를 향한 말 대신
‘나만의 언어’를 끌어안고 살아간다.
말은 있다.
그러나 이해는 없다.
이 책은, 그 단절에서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우리가 잊어버린 ‘듣는 법’,
놓쳐버린 ‘이해의 윤리’,
무너진 ‘공감의 구조’를
다시 붙들어보려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결국
말로 연결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말은 단지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가 닿게 만드는 다리다.
그리고 그 다리는
지금, 무너지고 있다.
자신만의 언어를
자신은 알아듣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A_Kan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