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rF
우리는 왜 점점 말을 안 듣게 되었는가
우리는 매일 말을 한다.
출근길 버스에서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회의 중에는 의견을 나누고,
밤이 되면 SNS에 하루의 감정을 남긴다.
말은 넘쳐난다.
세상은 말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 많은 말들 속에서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어”라고 느끼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말한다.
“엄마, 나는 이걸 하고 싶어.”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그건 안 돼. 넌 그럴 성격이 아니야.”
연인이 서로에게 말한다.
“요즘 너무 힘들어. 너랑 있으면 더 외로운 기분이야.”
하지만 상대는
“또 예민하게 구네. 난 그런 감정 표현 힘들어”라며 돌아선다.
직장에서는 상사가 말한다.
“네가 이 부분을 좀 더 책임감 있게 해야지.”
하지만 직원은
“저 사람은 항상 나만 찍어.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라고 느낀다.
부모, 연인, 상사, 친구.
모두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어디에도 닿지 않고,
서로를 비켜간다.
왜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을까?
말하는 사람은 있는데,
‘듣는 사람’은 사라졌다.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태도의 문제다.
그리고 시대 전체가 잃어버린 어떤 감각에 대한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는 감정을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감정을 인정하지 않던 시대는
많은 사람을 병들게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전부가 되어버린 말”이 문제다.
사람들은 감정을 먼저 말하고,
그 감정에 대한 이해나 맥락 없이
그것이 전부인 양 선언해버린다.
“나 지금 불편해. 그 말 하지 마.”
“넌 왜 그렇게 논리적이야? 감정도 좀 생각해.”
“나는 힘들었어. 그러니까 내가 한 행동은 어쩔 수 없어.”
감정은 판단의 근거가 되고,
감정은 면책의 도구가 되고,
감정은 이해의 중단점이 된다.
이런 말들이 쌓이면
대화는 더 이상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인정받기 위한 경쟁'이 된다.
그리고 경쟁은, 곧 전쟁이다.
“쟤는 T잖아. 원래 저래.”
“F는 감정이 먼저지. 이성적 대화가 안 돼.”
“요즘 MZ는 다 저래.”
“꼰대네. 틀딱이네.”
MBTI, 세대, 성격유형, 말투, 어조.
이 모든 것은 '이해의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이해를 회피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우리는 분류하고, 정리하고,
판단하고, 그 다음은 무시한다.
왜냐하면 이해하는 데는 에너지가 들고,
판단하는 데는 에너지가 덜 들기 때문이다.
말은 듣지 않아도 된다.
성격으로 요약해버리면 되니까.
그 사람의 상황은 모른다.
하지만
MBTI는 안다.
그 사람의 고통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감정표현 방식’은 분석했다.
라벨은 이해의 종착지가 아니라,
이해의 포기선언이 되어버렸다.
정신분석학자들은 말한다.
현대인은 ‘타인의 고통을 감당할 여유가 없는 사람’이라고.
왜냐하면 자기 고통조차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일 넘쳐나는 일,
끊임없는 경쟁,
SNS 속 비교와 열패감,
경제적 불안,
자존감의 고갈.
그런 삶 속에서
누군가의 감정을 ‘들어주는 것’은
단지 따뜻함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지탱되고 있느냐의 문제다.
지쳐 있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지쳐 있는 사람은 공감하지 못한다.
지쳐 있는 사람은
말을 들어도, 자기 해석으로만 받아들인다.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아.”
“아니야, 나는 너한테 진심으로 말했잖아.”
이 말들은 서로 엇갈리며
서로에게 상처로 돌아온다.
결국, 사람들은 점점 말을 줄이고
'안 해도 상관없다'고 믿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관계는 서서히 죽는다.
듣는다는 건
그 사람이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 사람의 감정,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판단이
당신과 다를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다르다’는 것을 ‘틀리다’로 받아들이기 쉽다.
“왜 저렇게 말하지?” → “잘못된 거야.”
“왜 저렇게 행동하지?” → “이해 안 돼.”
그 말의 기원은 무엇인지,
그 행동 뒤의 맥락은 무엇인지
묻지도 않은 채
우리는 ‘잘못된 언어’와 ‘불편한 존재’를
잘라내기 바쁘다.
그렇게 우리는 듣는 걸 멈췄고,
이해는 더 이상 필수가 아닌 것이 되었다.
이 책은 단지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가르치려는 책이 아니다.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묻는 책이다.
말투, 감정, 성격, 문화, 말의 층위, 심리적 방어기제.
이 모든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게 가로놓인 벽들이다.
우리는 그 벽 앞에서
말을 멈추었고,
서로를 ‘대상’으로만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화란
상대를 도구로 쓰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말은 그 사람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작은 선택이다.
이해는 단순한 공감이 아니다.
이해는 ‘그럴 수 있음’의 공간을 열어주는 일이다.
공감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이며,
태도는 훈련될 수 있다.
『T의 대화, F의 공감』은 그 훈련의 시작점이다.
우리가 다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말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시도다.
이제 우리는
다시 말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은,
이해를 향한 말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