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다고 다 말이 되는건 아니다.
끝맺음도 하나의 윤리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다시 연결되기를 바란다.
이 책의 모든 문장은 그 연결을 회복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하나 더 묻는다.
“모든 관계가 정말 회복되어야만 하나요?”
“끝내야 할 관계를 붙잡고 있는 게 오히려 나를 망치고 있다면요?”
이 질문은 상처받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문턱에서 나온다.
애썼고, 이해했고, 용서했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반복되는 고통일 때.
이 장은 그들을 위한 장이다.
끊는다는 선택이 도망이 아님을,
오히려 윤리적 결단일 수 있음을 말하는 장.
어떤 관계는 지속보다 중단이 더 윤리적일 때가 있다.
그 신호는 아래와 같다:
대화가 반복적으로 ‘기만’이 될 때
진심이 아무리 전달되어도 ‘조롱’으로 되돌아올 때
당신이 노력할수록, 상대가 더 ‘권력’을 쥐려 할 때
당신의 감정이 계속 무시되거나, 도구화될 때
관계가 성장을 막고, 자기 파괴로 향할 때
이런 신호는
“네가 참아야 해”,
“그래도 가족이잖아”라는 말로 무시되곤 한다.
그러나 윤리는 모든 고통을 감내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윤리는 말한다.
“당신도 보호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오랫동안 이렇게 배워왔다.
“괜찮아야 좋은 사람이다.”
“용서해야 성숙하다.”
“끈을 놓는 건 이기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자신을 갈가먹으면서 유지하는 관계는 윤리가 아니다.
그건 자기학대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상대를 더욱 왜곡된 권력으로 만들기까지 한다.
당신의 침묵과 선의가
상대에게 ‘해도 괜찮다’는 착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관계를 끊는다는 건
복수도, 미움도 아니다.
회복 불가능한 언어의 손상 앞에서
더 이상의 왜곡을 막기 위해,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거리 두기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끊는다는 건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말이 더는 통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행위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는
사랑도, 정의도, 신뢰도
오해로 마모되고 만다.
그러나 단절도 훈련이 필요하다.
막무가내로 끊는 건 또 다른 공격이다.
다음의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자: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소통하려 했는가?
내가 상대에게 준 상처는 없었는가?
이 단절이 복수심이 아닌, 회복을 위한 선택임을 확인했는가?
감정의 폭발이 아닌, 조용한 확신에서 이 선택을 하고 있는가?
관계를 끊는다는 건
‘나는 너를 미워한다’는 선언이 아니라,
‘나는 이 고통의 반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자기 보호의 시작이어야 한다.
관계를 끊고 나면
종종 죄책감, 후회, 공허가 밀려온다.
그러나 그 감정조차
당신이 인간이라는 증거다.
모든 단절이 아름다울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단절은
더 이상 파괴되지 않기 위한 윤리적 경계선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연결을 꿈꾸지만,
때로는 단절이 새로운 연결의 가능성을 만든다.
더 나은 나, 더 건강한 관계, 더 깊은 대화로 가는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지연은 처음엔 그가 똑똑하고 말재주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유머가 있고, 상황을 가볍게 넘기는 능력이 멋져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애가 깊어질수록,
그의 농담은 점점 자신을 향한 조롱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말할 때면,
그는 꼭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또 그 얘기 꺼낼 줄 알았어."
"그런 걸로 상처받을 거면, 세상 어떻게 살아?"
지연은 혼란스러웠다.
내가 너무 민감한 걸까?
혹시 내가 정말 유난스러운 사람인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와 대화한 날은 늘 자존감이 내려앉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머릿속에서
‘이건 또 웃음거리 되겠지’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점점 입을 다물게 되었다.
한 번은 용기 내어 말했다.
“그 말, 나 좀 상처받았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으면 해.”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그걸 가지고 기분 상해?
넌 너무 감정적이야. 내가 장난인 거 몰라?”
그 순간 지연은 알아버렸다.
이 사람에게 중요한 건 내가 아니라, 본인의 무난한 유쾌함이라는 걸.
상대가 웃는 그 순간,
나는 스스로를 검열하고, 작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지연은 문득 깨달았다.
이건 대화가 아니라, 내가 나를 숨기는 시간이었다는 걸.
그래서 조용히 말했다.
“이제 그만하자. 나는, 나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민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 앞에 서면 몸이 먼저 굳었다.
말을 고르기도 전에 비난이 먼저 날아왔고,
진로, 외모, 인간관계, 성격까지
그의 모든 선택은 “틀렸다”는 말로 돌아왔다.
“네가 뭘 알아서 그런 걸 해?”
“그건 남자답지 못해.”
“아버지 말 들으면 최소한 실패는 안 해.”
이런 말들이 반복될수록
민수는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을 포기해갔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늘 말했다.
“그래도 아버지잖아.”
“부모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지.”
그래서 참았다.
몇 년이고, 몇 번이고, 꾸역꾸역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민수는 밤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고 있었다.
아버지의 전화번호만 떠도 손에 땀이 났고,
만남을 앞두면 머리가 아프고 배가 아팠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건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생존의 위협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민수는 결단했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속되어온
폭력적 구조를 끊기로.
연락을 끊고 나서야
그는 처음으로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한 하루를 경험했다.
그건 배신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지키는 작고 조용한 용기였다.
서연은 그 친구를 ‘진짜 내 편’이라고 믿었다.
사적인 이야기도, 연애 얘기도 조심스레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며칠 뒤, 들려온 소문은 너무나도 왜곡된 형태였다.
말하지 않은 이야기들까지 붙여져
서연의 이름이 웃음거리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충격에 휩싸여 이유를 묻자,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잖아. 사람들이 이상하게 받아들인 걸 왜 나한테 그래?”
그 말은 사과가 아니라 회피였다.
하지만 서연은 그때는 이해하려 했다.
“나도 예민했나? 내가 너무 기대했나?”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말들이 퍼졌고
또 한 번의 “그럴 의도는 없었어”가 돌아왔다.
세 번째가 되었을 때,
서연은 알았다.
이건 실수의 반복이 아니라, 태도의 일관성이라는 걸.
그 친구는 늘 말을 흘리고, 책임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관계는 유지되길 원했다.
서연이 ‘좋은 사람’이라면, 다 이해해줄 거라는 기대와 함께.
점점 서연은 스스로를 탓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민감한가?”,
“이 정도는 참아야 하나?”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 관계는 더 이상 신뢰가 아니라
의무감과 자존감의 거래가 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서연은 그 관계를 내려놓았다.
단절은 아팠지만, 거짓말보다 외로움이 더 낫다는 걸
그제야 깊이 실감했다.
지훈은 언제부턴가 회식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남아 정리를 했다.
술 취한 상사의 택시도 잡아주고, 후배의 연애 고민도 들어주고,
누구 하나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그는 늘 웃으며 받아냈다.
“지훈 씨는 다 이해하잖아요.”
“지훈 씨니까 이런 것도 가능하죠.”
처음엔 그 말들이 칭찬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기대가 아니라 강요,
배려가 아니라 침묵을 이용한 착취였다.
업무는 줄지 않고,
정작 본인의 스트레스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지훈은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고,
회사에 가는 아침마다 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워졌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사직서를 냈다.
누군가는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고 했고,
또 누군가는 “좋은 사람 하나 잃었다”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지훈은 알았다.
회사를 그만두는 건 도망이 아니라,
자기 감정을 존중하는 첫 선택이라는 걸.
‘좋은 사람’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던
편한 사람으로의 고정 역할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처음 그것이 일어났을 때,
현우는 그저 충격 속에서 얼어붙었다.
컵 하나가 공중을 날아가 벽에 부딪혔고,
그 파편은 두 사람 사이에 날카롭게 흩어졌다.
“미안, 내가 요즘 너무 예민해서… 원래 안 그래.”
상대는 눈물이 글썽인 채 말했다.
현우는 믿고 싶었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고, 그럴 때도 있다고.
두 번째는 핸드폰을 내던졌을 때였다.
대화가 막혔고, 상대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 위의 물건을 쓸어버렸다.
현우는 조용히 정리하며 말했다.
“이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화내는 거야.
우린 지금 서로를 다치게 하고 있어.”
상대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나는 그냥 네가 너무 무심하게 느껴져서…
말로는 너한테 안 통해.”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말로는 안 통해.’
그래서 손이 나오는 걸까?
그래서 물건을 던지고, 문을 쾅 닫고, 어깨를 밀치는 걸까?
그리고 세 번째,
그 손은 더 이상 벽도, 물건도 아니었다.
현우의 어깨를 가격했다.
화가 난 얼굴, 터져 나오는 고성, 밀쳐지는 육체.
그 순간 현우는 자신에게 묻지 않았다.
‘이해해야 할까? 용서해야 할까?’
그는 묻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상대는 곧장 울며 뒤따라 나왔다.
“정말 미안해.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다신 안 그럴게. 제발 한 번만 더 믿어줘.”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과는 진심이었고, 상대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우는 그 순간 처음으로 분명히 느꼈다.
폭력은 말의 실패가 아니라, 존재의 침해라는 걸.
사람과 사람은 갈등할 수 있다.
말다툼도, 오해도, 눈물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언어의 선을 넘고 손으로 옮겨질 때,
그건 더 이상 ‘소통’이 아니라 ‘파괴’였다.
현우는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
복수도, 미움도 아님을 알았다.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는 윤리적 선택이자,
상대에게 진짜 변화의 기회를 주는 마지막 대화였다.
그 후에도 상대는 몇 번 연락을 해왔다.
길게, 짧게, 때론 취한 목소리로.
현우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나를 다시 껴안기로 했다.
그 손에서 벗어나, 내 언어로 살기로 했다.”
예린은 처음엔 그가 "조금 말을 빼먹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착각했다거나, 누구를 만났다는 말을 빠뜨렸다거나—
작고 애매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자꾸 반복되었다.
“핸드폰 꺼져 있었어”
“친구 만나러 간 거야”
“아 그거? 말하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처음엔 별일 아니라고 넘겼지만
예린은 점점 그의 말 전체를 의심하게 되었다.
사실과 말이 다를 수 있다는 공포는
사랑의 기초를 무너뜨렸다.
“나는 너를 의심하고 싶지 않아.
그런데 너는 내가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예린은 수차례 솔직한 대화를 시도했고,
상대는 그때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다”며 상처받은 척했다.
결국 예린이 지쳐갔다.
진심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말이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그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별은 예린에게 가장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그 이후 그녀는 매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을 잃은 게 아니라,
의심하며 살던 나를 되찾은 거였구나”라고.
대화는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폭력이 있다면,
침묵도, 거리도, 단절도 하나의 언어다.
그 언어를 선택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인간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이 책에서 함께 건넨 마지막 문장이다.
우리는 ‘말’이라는 낱말 속에서,
심리와 구조, 감정과 방어, 거리와 타이밍, 그리고 회복의 가능성까지
수많은 층위를 함께 들여다보았다.
MBTI와 말투, 세대와 감정,
익숙한 언어 뒤에 숨겨진 단절의 이유들.
사람을 이해한다고 착각하며
사실은 자기 자신만을 반복해서 말하던 수많은 순간들.
그 모든 오해와 실패를 지나
우리가 끝내 말하고자 한 것은 단 하나였다.
말을 통해 사람을 다시 받아들이는 법.
말실수도, 감정 폭발도,
거리를 두어야만 했던 단절도
결코 끝이 아니었다.
그 모든 혼란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이 관계를, 이 사람을, 나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대화는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말 속에서,
당신 역시 누군가를
조금은 더 천천히, 깊게, 따뜻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