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다고 다 말이되는건 아니다
현대인들은 말이 넘친다.
SNS에는 글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회의실에는 보고와 지시가 가득하다.
그러나 정작 대화는 없다.
왜일까?
대화를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같은 그림이 숨어 있다.
내가 말을 꺼내는 순간, 상대가 나를 거절하거나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이 불안은 단순히 "싫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말을 하기 전부터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십 가지의 시뮬레이션이 돌아간다.
"이 말을 하면 상대가 무안해하지 않을까?"
"혹시 분위기를 망치진 않을까?"
"내가 거절당하면,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건 아닐까?"
그 결과, 사람은 말을 꺼내지 않는 쪽을 택한다.
차라리 침묵 속에서 안전하게 숨어 있는 것이 나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선택은 결국 자신을 더 고립시킨다.
말하지 않으면 오해가 쌓이고, 오해가 쌓이면 관계는 더 멀어진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관계 단절을 스스로 불러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절은 곧 존재의 부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상대가 내 제안을 거절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나라는 사람 전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거절은 단지 선택의 차이일 뿐, 나의 가치와 존엄을 훼손하지 않는다.
대화 속에서 거절은 피해야 할 재앙이 아니라, 관계를 더 분명히 만드는 신호다.
“이 부분은 서로 다르구나”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다.
거절의 순간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은 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오늘의 연습 문장은 이렇게 해보자.
“상대가 내 말을 거절해도 괜찮다. 거절은 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달리하는 것일 뿐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그 말에는 나의 생각, 감정, 태도, 심지어는 인격까지 담겨 전달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을 하기 전에 이미 머릿속에서 수많은 걱정을 한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너무 무식해 보이지 않을까?”
“혹시 말실수로 오해를 사는 건 아닐까?”
“내 생각을 얕보거나 비웃지는 않을까?”
결국 말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삼켜진다.
비판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평가받는 순간 나라는 사람이 깎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대화를 막아버린다.
이 두려움은 사실 우리 안의 오래된 습관에서 비롯된다.
학교에서 정답을 맞히지 못했을 때 느꼈던 수치심,
회사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며 발언을 조심했던 경험이 몸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 기억이 현재의 대화 자리에서도 계속 작동한다.
하지만 대화란 시험지가 아니다.
말을 잘했다고 점수를 주는 것도 아니고, 못했다고 낙제시키는 것도 아니다.
비판은 나를 부정하는 낙인이 아니라, 새로운 시선을 배우는 기회일 수도 있다.
그리고 평가 역시 언제나 상대의 기준일 뿐, 내 존재 전체를 규정하지는 못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내 생각과 감정을 세상에 시험 삼아 내어놓는 행위다.
그것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누군가 비판하더라도, 그 비판은 나를 줄이는 칼이 아니라 나를 확장시킬 수 있는 거울이 될 수 있다.
오늘의 연습 문장은 이렇게 해보자.
“나는 평가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존재다. 비판은 나를 줄이지 않고 나를 넓힌다.”
어떤 사람들은 대화 자리에서 입을 열기 전, 마음속에 하나의 시험지를 떠올린다.
“틀리면 안 된다. 멋지게 말해야 한다. 완벽해야 한다.”
이 압박은 대화를 단순한 소통이 아니라 일종의 검증 무대로 만들어버린다.
말은 곧 평가, 평가가 곧 낙인이라는 공포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을 시작하기 전부터 수십 번 머릿속에서 문장을 다듬고 또 다듬는다.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침묵만이 남는다.
이 강박은 사실 어릴 적부터 쌓인 ‘정답 문화’의 그림자일 수 있다.
정답을 맞혀야 칭찬을 받았고, 틀리면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 경험이 몸속 깊이 남아 “틀린 말은 곧 나의 실패”라는 신념을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대화는 시험이 아니다.
누구도 대화 속에서 100점을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적인 대화란 완벽하지 않음 속에서 더 진솔해진다.
서툰 말투가 웃음을 만들고, 부족한 설명이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때 대화는 한쪽의 독백이 아니라 둘의 교류로 살아난다.
완벽한 답변을 하려는 순간, 대화는 죽는다.
불완전한 답변을 용기 내어 내놓을 때, 비로소 대화는 자란다.
오늘의 연습 문장은 이렇게 해보자.
“대화는 정답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키워가는 자리다. 틀려도 괜찮다.”
많은 사람들이 대화를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갈등이다.
의견이 다르면 관계가 흔들릴까 봐, 분위기가 나빠질까 봐 아예 대화를 피한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인다.
“괜히 말 꺼냈다가 싸움 나느니, 그냥 참고 넘어가자.”
하지만 이 침묵은 평화가 아니라 회피일 뿐이다.
겉으로 덮어둔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더 크게 터져 나온다.
갈등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다 맞춰주면 관계는 안전할 거야.”
그러나 관계는 맞추는 것으로만 지켜지지 않는다.
한쪽이 계속 참고 침묵하면, 결국 쌓인 불만이 관계를 서서히 무너뜨린다.
진짜 위험은 갈등이 아니라, 갈등을 회피하는 태도다.
갈등은 서로 다름을 확인하는 과정이고, 그 차이를 조율하는 연습이다.
작은 갈등을 솔직하게 다루는 것이 오히려 관계를 단단하게 만든다.
“이 부분은 네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구나”라는 대화가 있어야만 서로를 진짜로 이해할 수 있다.
갈등 없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갈등을 드러내고, 그것을 다루는 용기가 있을 때 비로소 관계는 자라난다.
오늘의 연습 문장은 이렇게 해보자.
“갈등은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더 깊게 만드는 기회다. 회피하지 말고 다루어야 한다.”
현대인에게 대화란 꼭 얼굴을 맞대고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스마트폰과 컴퓨터 앞에서라면, 우리는 수십 줄의 글을 쏟아낼 수 있다.
댓글에서는 당당하고, 채팅에서는 유머러스하다.
그러나 막상 사람을 직접 마주하면 말이 막힌다.
익명성 속에서는 자유롭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볼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떠난 말은 곧바로 기록으로만 남고, 어색한 공백은 화면이 대신 메워준다.
그래서 온라인 대화에서는 솔직하고 용기 있는 모습이 더 쉽게 드러난다.
하지만 얼굴을 맞대면 다르다.
표정, 눈빛, 침묵, 작은 몸짓 하나까지 모두가 대화의 일부가 된다.
그 순간 “내가 어떻게 보일까?” 하는 불안이 몰려온다.
결국 입술은 굳고, 말은 줄어들며, 눈은 바닥만 바라본다.
이 현상은 단순히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 아니다.
익명성에 익숙해진 사회적 환경 속에서, 우리는 ‘안전한 대화’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진짜 관계는 익명 뒤가 아니라 얼굴과 얼굴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익명 속 대화가 자기 표현을 훈련하는 자리라면, 직접 대화는 그 표현을 삶으로 옮기는 자리다.
익명성은 연습장일 뿐, 무대가 아니다.
무대에 서려면 결국 사람을 직접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의 어색함은 실패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다.
오늘의 연습 문장은 이렇게 해보자.
“온라인은 나를 숨겨주지만, 진짜 나를 보여주는 건 얼굴을 마주한 대화다. 어색함은 나의 용기다.”
대화 속에서 가장 슬픈 침묵은,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가치 없다고 여길 때 찾아온다.
“내 얘기는 별거 아니야.”
“이런 건 말할 가치도 없어.”
그렇게 스스로 입을 막아버리는 순간, 대화는 시작조차 되지 못한다.
이런 태도는 겸손과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부정에 가깝다.
겸손은 내 이야기를 줄이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힘이다.
그러나 자기 부정은 내 이야기가 남에게 짐이 될까 두려워 존재 자체를 축소해버린다.
생각해보면, 대화는 위대한 철학이나 거창한 사건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다.
하루에 있었던 작은 일, 사소한 기분, 엉뚱한 상상조차도 대화의 씨앗이 된다.
상대와의 공감은 화려한 지식에서가 아니라, 평범한 이야기 속 진솔함에서 피어난다.
자신의 경험을 하찮다고 여기는 사람은 결국 관계에서 벽을 세운다.
내 이야기를 스스로 무시하면, 상대 역시 그 벽을 넘어올 수 없다.
그러나 작은 경험도 나누면, 그것은 상대에게 새로운 시선이나 위로가 될 수 있다.
“별거 아닌 내 얘기”는 사실 누군가에게는 큰 울림이 될 수 있다.
그 울림을 믿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가장 먼저 침묵시키는 재판관이 된다.
오늘의 연습 문장은 이렇게 해보자.
“내 경험은 사소하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공감의 다리가 되고, 나에게는 나를 증명하는 언어다.”
많은 사람들이 대화 앞에서 망설이는 이유는 단순히 말을 못해서가 아니다.
사실은 느낌을 말로 옮기는 과정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속에서는 분명히 무언가가 요동친다.
섭섭함, 서운함, 기쁨, 고마움...
그러나 막상 입을 열려 하면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뭐라고 해야 하지?”
“괜히 이상하게 들리진 않을까?”
그 순간 차라리 침묵을 택한다.
문제는 이 침묵이 감정을 없애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로 꺼내지 못한 감정은 안으로만 쌓인다.
쌓인 감정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터져 나온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폭발하거나, 혹은 서서히 관계를 갉아먹는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다.
첫째,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
둘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곧 약점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 안 해도 알겠지”라는 기대 속에 스스로를 숨긴다.
하지만 감정은 표현하지 않으면 결코 전달되지 않는다.
표현은 감정의 무게를 덜어내는 동시에, 관계를 살리는 숨통이 된다.
완벽한 문장이 필요하지 않다.
“나 속상해.”
“고마워.”
“그 말에 좀 아팠어.”
이런 짧은 표현만으로도 충분하다.
감정의 언어화는 서툴더라도 용기 있는 시도 자체가 힘이다.
표현을 시작할 때, 침묵은 더 이상 감정을 가두는 감옥이 되지 않는다.
오늘의 연습 문장은 이렇게 해보자.
“내 감정은 숨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서툴더라도 말할 때 비로소 관계가 숨을 쉰다.”
대화는 단순히 정보를 주고받는 일이 아니다.
감정과 가치가 드러나는 순간, 나의 취약함도 함께 노출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대화보다 독백을 택한다.
“내가 먼저 열면 상처받을 거야.”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안전해.”
이 두려움은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입을 막는다.
말을 꺼내는 순간, 그 말은 나를 묶는다.
“그렇게 말했으니 네가 책임져라.”
현대 사회는 말의 책임을 과도하게 요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을 숨기고, 중립적이고 애매한 표현만 반복한다.
말을 줄이는 것이 곧 살아남는 법처럼 여겨진다.
많은 대화는 함께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를 가리는 시합으로 변질된다.
논쟁에서 지는 순간, 무능하거나 약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는 두려움.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침묵을 선택한다.
말을 통해 다가가기보다, 말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현대인은 학문, 기술, 정보는 배우지만,
감정과 이성을 어떻게 구분해 말해야 하는지는 배워본 적이 없다.
그래서 누군가 “너 때문에 힘들다”라고 말하면
상대는 곧바로 방어 태세로 돌입한다.
피드백은 상처가 되고, 대화는 싸움으로 끝난다.
결국 사람들은 깨닫는다.
“차라리 대화하지 않는 게 낫다.”
대화를 두려워하는 현대인들의 문제는,
대화가 곧 상처·책임·승부라는 부담으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란 원래 상대를 이기거나 조종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서로의 감정을 분리해 인식하고,
그 위에 이성의 언어로 조율하는 훈련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대화’ 그 자체가 아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감정과 이성이 뒤섞여 흘러나오는 말이다.
그 말이 상대에게는 칼처럼 꽂히기 때문이다.
말은 본래 서로의 안전과 보존을 위해 존재했다.
더 효율적이고, 더 실용적으로 우리를 보호하고 돕기 위해 언어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구석기 시대도, 조선 시대도 아니다.
극단적인 생존의 위협이 줄어든 오늘, 말은 더 이상 서로를 지키는 도구로 쓰이지 않는다.
대신 언어는 점점 자신의 기준과 욕망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다시 목숨이 걸린 위험 앞에 매일 노출되어있다면,
그 순간 말은 반드시 살기 위한 목적으로 쓰일 것이다.
이 진실은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다.
그때 필요한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니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뭉치는 인간관계, 그것이 곧 생존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고, 상처를 드러내는 훈련을 하라.
말의 책임을 피하려 하지 말고, 책임을 나눠 지는 방법을 배우라.
승부가 아닌 공존의 대화를 시작하라.
피드백의 네 단계를 기억하라: 사실 → 영향 → 기준 → 요청.
“말이 수단에 머물면 관계를 해치고, 목적을 향할 때 비로소 우리를 살린다.”
-A.Kan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