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다고 다 말이 되는건 아니다.
친구가 어렵게 고민을 털어놓은 뒤 돌아온 대답이 이것뿐이었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말은 분명 오갔지만, 그 안에 감정이 빠져나간 순간 남는 것은 공허함이다. 때로는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언어는 껍데기와 같다. 껍데기만 존재하고 알맹이가 빠져 있으면, 상대는 가벼움을 느낀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네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의례적으로 흘려보내는 말인지. 심리학에서는 이를 정서적 진위감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표정, 말투, 호흡, 간격 같은 작은 신호들을 통해 말에 감정이 담겨 있는지 직관적으로 감지한다. 아무리 “괜찮아, 힘내”라고 말해도 눈빛이 비어 있다면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상처가 된다.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때 팀장이 “다들 고생했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표정은 굳어 있고,
곧바로 다른 회의 일정을 이야기한다. 말은 위로지만, 행동은 비난이나 무관심으로 읽힌다.
직원들은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구나”라고 느낀다.
진심 없는 말은 오히려 신뢰를 깎아내린다.
아이가 학교에서 힘들었던 일을 털어놓는다.
부모는 “알았어,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하며 텔레비전을 계속 본다.
아이는 말이 무시되었다고 느낀다. 대화의 겉모습은 있었지만,
마음의 교류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는 점점 가족에게 속마음을 숨기게 된다.
연인이 “요즘 너무 힘들어”라고 말했을 때 돌아온 대답이
“그냥 힘내, 다 잘될 거야”였다면 어떨까. 진심보다는 피로함이 묻어나는 한마디는 위로가 아니라
거리감을 만든다.
오히려 침묵 속에서 손을 잡아주는 편이 더 큰 힘이 된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하면서도 시선을 스마트폰에 두고 있다면 그 말은 진심이 아니다.
“나도 네 입장 이해해”라고 말하면서 목소리에 조급함이 묻어 있다면 그 말은 공허하다.
“그래, 네 얘기 맞아”라고 하면서 한숨을 섞는다면 상대는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더 외로워진다.
이런 말들은 겉으로는 배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다는 무언의 메시지다.
듣는 이는 위로받기보다 오히려 고립된다.
첫째,
의례적 습관 때문이다.
매번 “수고했어”라고 말하지만 정작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경우가 많다.
둘째, 불편함을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감정을 감당하기 어렵기에 가볍게 말을 던져 대화를 마무리하려 한다.
셋째, 속도의 문화 때문이다.
모든 것을 빨리 처리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말을 형식적인 껍데기로 만든다.
이런 말들은 결국 상대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보호하는 장치다.
상대를 위로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내 불편함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다.
진심을 담는다는 것은 화려한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랬구나” 한마디에도 충분히 마음은 전해진다. 중요한 것은 함께 머물러 주는 태도다.
눈을 마주치며 말하기,
잠시 침묵을 허용하기, 상대의 감정을 반복해 되짚어 주는 것.
말은 짧아도 태도는 길게 남는다.
상대는 어떤 말을 들었는지보다 그 말을 들으며 어떤 마음을 느꼈는지를 더 오래 기억한다.
위로해 준 친구라는 기억은 단어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 때문이다.
대화는 결국 마음과 마음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자리다. 아무리 화려한 문장을 쌓아도,
상대가 공허함만 느낀다면 그 말은 오래 남지 않는다.
반대로 서툴고 짧은 표현이라도 진심이 담겨 있다면, 그것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머문다.
우리가 흔히 하는 “괜찮아” “힘내” 같은 말도 마찬가지다.
어떤 순간에는 가벼운 빈말처럼 들리지만,
또 어떤 순간에는 큰 힘이 되기도 한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말의 기술이 아니라 말에 실린 태도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진심을 담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가이다.
그래서 대화는 상대를 설득하는 기술이 아니라,
순간의 진심을 확인하는 훈련에 가깝다.
상대가 듣는 말의 무게는 문장의 길이에서 오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상대의 마음에 머물러 주었는가,
그 흔적이 곧 말의 의미가 된다.
대화를 돌아보면,
우리가 나눈 수많은 말들 중에 실제로 기억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특정 순간의 표정, 침묵, 손짓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언어는 기억의 갈피에 남지 못해도, 감정은 몸에 각인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누군가와의 관계를
“그때 그 말”이 아니라 “그때 내가 느낀 기분”으로 회상한다.
진심 없는 말이 반복되면 관계는 점점 가벼워진다.
겉으로는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속으로는 대화가 끊어진다.
반대로 서툴지만 마음을 담은 말은 관계를 두텁게 한다.
언어는 시간이 지나 사라져도, 마음은 관계의 토양이 되어 쌓인다.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말을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비워내는 습관이다. 빈말은 사람을 상처 입히는 데 그치지 않고,
관계 자체를 허물어뜨린다. 결국 말의 공허함은 사람 사이의 거리로 남는다.
그러므로 대화를 시작할 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 내가 꺼내려는 말이 상대에게 닿을 수 있는가.
아니면 내 불편함을 가리기 위한 방패인가.
그 물음이 한순간의 대화를 넘어, 관계 전체를 바꿔 놓는다.
말에 담긴 마음은 오래 남는다.
-A.Kan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