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서 한 가지쯤은, 그냥 따지지 않고 그렇게 하기로 정해 놓는 것
다음날은 실상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 새벽에 기차역으로 출발을 해야 하니 교토를 즐길 수 있는 마지막 날. 일본식 가정식을 제대로 먹어보자 하고 들어간 식당에서 ‘히토리.’라고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일행과 함께 온 다른 사람들을 보며 밥을 먹고, 며칠 동안 문장을 말한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며칠간 말한 단어를 떠 올려봤다.
마지막 날이니 미루어 놓았던 숙제를 해야 했다. 누구에게 기념품을 줄지 정해야 했고, 어떤 것을 살지도 정해야 했다. 누구에게 기념품을 선물할지 다이어리에 이름을 적었다가 지웠다가 하면서 마지막 날의 말차 파르페를 먹었다. 첫날 말차 맛 크림빵을 먹으면서 여행하는 내내 하루도 빼지 않고, 말차로 만든 디저트를 먹기로 다짐했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세워놓은 한 가지 원칙. 매번 비싼 디저트를 사 먹어서 통장이 많이 털리긴 했지만, 그 때문에 며칠 새 살이 찐 느낌인가 했지만, 이유는 따지지 않고 그저 그렇게 정했다고 생각하니 오늘은 어떤 디저트를 먹을지 고민하는 게 여행 중의 소소한 재미가 되었다.
나를 위해서 한 가지쯤은 그냥 따지지 않고 그렇게 하기로 정해 놓는 건 꽤 좋은 것 같다. 생각해보니 작년에 좋아하는 밴드가 생겨 공연을 많이 가게 되었는데 그 역시 통장이 털리는 일이다 보니까 걱정이 될 때도 많았다. 그래도 공연을 가면 너무 재밌고, 즐겁고, 내가 이 맛에 일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올해에는 공연 가는 돈은 아끼지 말고 고민 없이 무조건 가자고 생각했다. 조금 부담이 될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정하고 나니 그 해에는 진짜 공연을 많이 다니게 되었고, 공연을 가기로 마음먹을 때마다 망설이거나 고민하느라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어차피 갈 공연, 맘 편하게 가버리고 말지 뭐.’
어떤 선택을 하든 기회비용이 있는데 매번 그 기회비용을 외면할 수 없다는 건 나도 안다. 그러다 보면 엄청난 후폭풍을 맞게 되니까. 하지만 한 가지쯤 은, 한때의 한 가지쯤은, 나를 위해서 무언가를 망설임 없이 하기로 하고, 그에 대한 기회비용을 고민할 부담을 덜어주는 것도 꽤나 괜찮은 선택인 것 같다. 시간이 지났을 때, 나한테 남는 것은 그 기회비용이 아니라 그렇게 보낸 선택들이니까.
물론 기회비용도 남긴 한다. 내가 수습할 때 까지는. 그래도 수습하고 나면 잊히고, 수습하는 동안도 내가 한 선택들이 나를 버티게 해 주니까. 버티게 해 줄 만한 선택들이라면 그렇게 해도 좋다. 가끔 잘 못 선택해서 수습하는 동안 그 선택을 후회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 마저도 경험을 해봐야 알겠지.
나의 경우에는 쇼핑하는 기분에 사들인 물건들이 결국은 다 쓰이지 못하고 화장대 속에서, 서랍 속에서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면서는 그 뒷수습을 하는 동안 후회했고, 내 손에 잡을 수 없는 경험들은 글로, 사진으로, 영상으로 붙잡아 두면서, 내가 버티고 있는 시간을 덜 힘들게 만들어 주었다.
어느 쪽이 더 가치 있고 나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물건이 그만한 버팀목이 되어 줄 수도 있는 거니까. 힘들게 일해서 번 돈으로 물건도 사보고, 경험도 사봤던 나는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즐긴 행복한 순간들이 기억에 많이 남았고, 물건보다는 경험을 사자는 생각이 점점 선명해졌다.
‘그래서 선물은 누구를 사줘야 하지?’
빙수를 다 먹고 창밖을 바라보며 결정을 해야 했다.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어서 다이어리에 썼다가 지워진 이름과 남아있는 이름을 보면서, 내가 가진 예산을 생각해보고, 구경하면서 눈에 담아 두었던 기념품들을 생각하며 누구에게 무엇을 줄지도 정했다. 아쉽게도 선물을 주지 못한 사람들에게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이 있는 만큼 다 사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전달되지 못한 마음은 언젠가 있었던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텐데, 그게 아까워서 있을 때만이라도 다 표현하고 싶은데, 현실은 다 사줄 수는 없으니까 스트레스를 받았다.
당시의 나는 스트레스로부터 나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고 생각했다. 다시 일상을 잃어버릴 만큼 우울해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받느니 어느 누가 보기에는 서운하거나, 혹은 무책임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못하는 건 못하는 대로 내버려 두자고 생각했다.
엄마의 선물은 향을 사기로 했다. 나는 향 냄새를 좋아한다. 절에 가면 나는 향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서 절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래서 교토가 마음에 들었던 것일 수도 있다. 교토 거리를 걷는 내내 은은하게 퍼지는 향 냄새와 여린 종소리들이 걷기만 해도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엄마도 향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향을 태워보고 맡아보는 동안 머리가 조금 아파오려고 했지만 좋은 향을 골랐다. 향을 꽂아 놓을 수 있는 작은 자기도 사고, 선물 포장을 부탁했다. 주인아주머니는 향을 고르는 내내 마음에 드는 향은 불을 붙여서 맡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향을 포장해 주시며 카운터 옆에 앉아있는 강아지의 사진을 같이 넣어 주셨다. 귀여운 선물이었다.
친구들의 선물은 첫날 숙소 가까운 공예품 집에서 보았던 책갈피로 하기로 했다. 여행지에서의 기념품은 아주 쓸데없고 토속적인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왕이면 쓸모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 공예 인형과 고민하다 책갈피로 골랐다. 예쁜 문양의 부채로 만들어진 책갈피를 골라서 계산을 하고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시내로 나갔다. 시내에서 간단하게 밥을 먹고 친구들에게 포장해서 줄만한 포장 봉투와 스티커들을 고르며 시간을 보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마지막 날이구나.’
자기 전에 짐을 미리 챙겨 두고, 씻고 와서, 마지막 밤의 폭신한 이불속으로 들어가서 요 며칠을 되짚어보았다. 내일 타고 갈 버스와 교통편도 찾아보고.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면 서둘러 일어나야 했다. 매일 아침 일찍 짐을 챙겨 나가던 사람들처럼 이번에는 내가 나가야 하는구나.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내가 찍은 사진들을 넘겨보며 그래도 재밌는 여행이었다는 생각으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게스트 하우스를 나갔을 때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캐리어도 끌고 배낭을 메고 우산을 쓰고 가야 하는 길이 조금 힘들었지만 지하철 역에 잘 도착해서 표를 사고 전철을 타서 잠깐 자리에 앉아 숨을 돌렸다. 내가 어제 확인하기로는 몇 정거장 안 되는 것 같았는데, 아무리 가도 내가 내려야 할 역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노선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내가 내려야 할 역은 이미 지나쳤고, 챙겨 온 열차 노선도와 시간표를 비교해보 니, 그 열차는 급행열차여서 내가 내려야 할 역에는 서지 않는 열차였다. 급하게 열차에서 내려 반대편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이 없어 보였다. 마음이 조급 해졌다.
‘하루카를 제시간에 타지 못하면 비행기도 놓치게 될 텐데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외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놓치면 얼마나 막막할지 생각하며 역무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말이 서툴러서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역무원은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없다고 얘기했다. 다른 역에서 갈아타라는 말 같은데 그러기엔 너무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았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저 건너편인데... 그냥 넘어가게 해 주지.’
다음 열차를 기다려서 다른 역에 가서 반대편으로 넘어가서 또 열차를 기다리고 목적지로 갈 생각을 하니 비행기를 놓칠 게 뻔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무거운 짐을 들고 막막해졌다. 버스를 잘못 타서 종점까지 갔을 때처럼 생각하자고 애쓰면서 나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곳에서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실수할 수도 있지. 다른 역에 가서 갈아타고 일단 도착하는 대로 공항에 가서 방법을 생각해보자.’
다행히 역무원이 나한테 다시 와서 반대편으로 넘어가게 해주 겠다고 하셔서 도움을 받아 반대편으로 넘어왔다. 천만다행이었다. 곧 열차가 왔고 완행열차인지 확인을 하고 나서 열차에 올랐다. 아침 내내 장대비가 내리는 와중에 무거운 캐리어를 정신없이 끌고 움직여서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자리에 앉지 않았다. 혹시나 또 내릴 역을 놓칠까 봐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괜찮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