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너랑 왔을 때 보다 행복해

내가 이긴 것 같은 기분

by 최서연

조금의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나는 동생과 계획한 보라카이 여행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동생과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라 즐거웠고, 그래도 한번 가본 곳이니까 어렵지 않게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사람이랑 갔던 곳이라서 씁쓸한 기분도 들었지만 한 달 새 해외여행을 두 번이나 갈 수 있다는 것에 심취해 즐거워하기로 했다. 동생과 함께 여행을 준비하는 것도 즐거웠다. 비행기 티켓을 끊고, 숙소를 예약하고, 놀거리를 예약하는 동안 그 사람의 눈치를 봤던 것처럼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다.






‘마음에 들어할까, 더 노력해야 뭐라고 하지 않으려나, 가서 뭐 할 거냐고 또 따지고 들면 어떡하지.’


그 사람이랑 여행을 가기로 한 순간부터 나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생각났다. 그 사람과 같이 여행을 가게 되어서 너무 좋았다. 처음으로 가는 해외여행을 그 사람과 간다는 게 너무 좋았다. 여행을 가서 둘이 꼭 붙어있으면 싸울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너무너무 좋은데 한편으론 너무 무서웠다. 어디로 갈지 정할 때부터 싸우기 시작했다. 내가 제대로 알아보지 않는다고 화가 난 것 같았다. 같이 가면 어딜 가든 좋을 것 같아서 다 좋다고 한 건데, 그 사람은 그게 아니었는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나한테 기대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영원히 그 기대치를 맞추지 못할 것 같았다. 내 딴에는 노력한 거였는데, 그 사람에겐 내가 한 노력이 항상 못마땅했던 것 같다. 여행 계획을 짜면서 같이 안 가겠다고, 따로 가자고 그 사람이 화내기를 몇 번, 그때마다 미안하다고 같이 가자고 내가 매달리기를 몇 번. 그러고 나서야 항공권과 숙박을 예약했다.


‘내가 예약한 숙소를 마음에 안 들어하면 어쩌지, 도착해서 일정을 미리 정해놓지 않았다고 뭐라고 하면 어쩌지, 또 같이 안 가버리겠다고 화를 내면 어쩌지.’


한국 땅을 떠나 낯선 곳에 그 사람과 단둘이 간다는 게 한편으로는 너무 막막한 기분이었다. 그저 같이 가고 싶다고, 같이 가자고 화 풀라고 조르고 애원하고 달래는 동안 꼭 그만큼의 불안감이 쌓여갔다. 하지만 모르는 척했다. 불안감과 두려움이 쌓여가는 동안, 내가 그걸 알아버리면 그 사람한테 티가 날 것 같았다. 내 불안한 마음을 모르는 척하고 그냥 같이 가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사람도 그걸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내 마음속에만 있는 거니까, 내가 진짜 모르는 척하면 눈치채지 못하겠지, 그저 철없이 같이 가고 싶어 한다고만 생각하겠지.’







동생이랑 집에서 같이 출발해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 신나게 면세점에서 쇼핑한 물건들을 찾으며 사진을 찍고, 카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들뜬 기분을 한껏 즐겼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어떤 사진이 잘 나왔네 마네 하는 동안 또 그 사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 사람은 사진 찍는 거 싫어해서 사진 좀 그만 찍으라고 공항에서 화를 냈었는데.’


그래서 여행하는 내내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자매끼리 하는 여행이 이래서 좋구나.’


그 사람이랑 갔을 때보다 훨씬 좋은 숙소를 예약했고, 호텔에서 보내준 전용 보트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호텔에 짐을 풀고 마음에 드는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바다로 나갔다. 보라카이의 바다 색은 여전했다. 발가락 사이로 살금살금 들어오는 하얗고 고운 모래, 수평선 멀리까지 탁 트인 광경, 옅은 바다색 위로 떠다니는 보트들.


신나게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자매 둘이 다녀서 그런지 호텔 사람들도, 관광지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우리를 이쁘고 귀엽게 봐주는 눈치였다. 먼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기 도 하고, 말을 거는 사람들도 많았다. 시장 거리를 구경하며 한국에 돌아가면 쓰지도 않을 액세서리들을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것은 몇 개 사기도 했다. 머리를 예쁘게 따주는 집에서 머리를 예쁘게 따고 동생과 돌아다니니까 정말 기분이 좋았다. 같이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눈치 보고 스트레스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 사람이 없다는 게, 그 순간만큼은 아쉽지가 않았다. 내가 이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랑 왔을 때 보다 훨씬 행복하고 재밌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동생이랑 오길 정말 잘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랑도 이렇게 편하게 같이 놀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머리 땋는 걸 기다려주고 예쁘다고 해줬으면 좋았을 거 같은데, 그땐 이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뭘 그렇게 눈치를 보면서 즐기지도 못하고 쫓기듯이 여행을 했을까.’






이렇게 말하니까 그 사람이랑은 불행하기만 했던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내가 그 사람이랑 온 것보다 동생이랑 온 것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싶어서 가장 비교되는 부분을, 가장 내가 행복해 보이게 편집해서 기억한 것뿐이다.


그 사람은 길을 아주 잘 찾았다. 방향치에 길치인 나와는 다르게. 처음 가는 길이라도 방향으로 감을 잡고 가다 보면 모르는 길을 지나더라도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그때 지나가다가 본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했다. 시장을 헤맨 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 말했기 때문에 그 사람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같이 눈여겨봐 둔 가게였다면 그 사람이 알아서 찾아갔겠지만, 나 혼자 봐 놓고 한참이 지나서야 말한 거라 그 사람 입장에서는 어디쯤 인지 감을 잡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길치인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대로 설명하는 길을 따라 헤매 봤자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까 지나왔던 길 지나고 나서 간 길인 것 같은데, 이쪽은 아닌 거 같은데...”


나는 도저히 길을 설명해낼 수가 없고, 어딘 지도 몰랐다. 그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말을 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헤매다가 그 사람이 또 짜증을 낼까 봐 얼른 안 먹어도 괜찮다고 했다. 근데 그 사 람이 조금만 더 찾아보자고 했다.


‘발이 아플 때까지 걸어서 진짜 안 먹어도 될 거 같은데...’


웬일인지 그 사람은 평소처럼 짜증을 내지 않고 끝까지 그 아이스크림 집을 찾았다. 그 시장을 통틀어 그 가게에서만 파는 아이스크림이었다. 한참을 헤매다 먹어서 그런지 너무너무 맛있었다. 짜증이 날만한 데도 짜증을 내지 않고 끝까지 찾아준 그 사람이, ‘아까 그거 먹고 싶은데.’라고 한마디 한 것뿐인데, 안 먹어도 된다고 했는데, 그런데도 그 한마디 듣고 그렇게 돌아다녀준 그 사람이 너무 고마워서 아이스크림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동생이랑 갔을 때는 내가 그 아이스크림 집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그때보다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걷다 보니 그 사람이 내가 먹고 싶다고 한 아이스크림을 찾아 헤맨 발걸음이 느껴져서 슬퍼질 뻔했지만. 1 년 만에 먹은 코코넛 아이스크림은 여전히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