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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연 Oct 05. 2023

잘하지 못할까봐 두려워요

수치심 극복하기

나의 수치심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저는 어떤 것이든 꽤나 잘하는 편이었습니다. 배우는 것도 빠르고, 손도 빠르고 야무졌던 편이라서 학교에서 하는 웬만한 일들에서 상을 많이 받곤 했어요. 물론 학교 안에서 하는 작은 대회였지만, 요리 대회나 미술, 만들기, 공예 대회 같은 상장이나 우수작 전시, 독서나 독후감 글쓰기는 당연히 항상 나가서 상을 받아오곤 했고요. 성적 우수상도 많이 받았던 편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 가기 전까지는요.


저는 꽤나 잘하는 것이 많지만 어느 것 하나 특출 나지는 못했고, 부럽게도 어느 것 하나에서 분명히 특출 난 어떤 사람들을 따라가기 위해서 계속 연습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엄청난 악필이었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글씨 쓰기를 연습하고 친구들에게 편지 쓰고 혼자서 틈틈이 연습의 연습을 거쳐 지금은 누가 봐도 글씨가 이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잘하는 것은 사실 연습 밖에 없었어요. 처음에 조금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함께. 저는 운 좋게 얻은 초반 속도를 중반에도 후반에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계속 혼자 연습하고, 연구하고, 방법을 찾아보고 그렇게 '어떤 것이든 꽤나 잘 해내는 나'를 만들어왔던 것이죠.


후반이 될수록 당연히 연습으로 그 모든 것들을 메꾸기는 버거웠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저에게 모질어졌던 것 같습니다. 네가 애초에 재능을 타고났다면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을 거야. 타고나지 못한 만큼 뭔가를 해서 채워야만 해, 그래야 따라갈 수 있어, 뒤처지지 않을 수 있어. 모두가 착실하게 잘 달려가는 궤도에서 나만 이탈해 버릴 것만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저에게는 항상 있었습니다.


수치심은 자부심의 짝꿍이라고 하더라고요. 수치심을 가리기 위해 그 반대되는 것에 대한, 혹은 그것과 꼭 맞는 다른 자부심을 쌓게 된다고요. '연습'이라는 작은 단어에 저는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이라는 옷을 입혔고, 귀찮고 포기하고 싶어도 또 해야 하는 것이라는 무게가 지워졌고, 하나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은 시간도 인내하고 버텨내면서 또 해야 하는 힘든 감정까지 엉겨 붙어서 아주 크고 무거운 눈덩이가 되었습니다. 그 눈덩이는 저의 자부심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만함, 그리고 그러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발과 미움이기도 했습니다.


무언가를 잘하지 못하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인생의 궤도와 사회라는 틀에서 떨어져 나가 버릴 것만 같은 막연한 두려움. 그건 제가 무언가를 잘하도록 계속 채찍질해 왔고, 그 덕분에 잘하는 것이 많아진 저는 '나는 이만큼 연습했어, 나는 꾸준히 노력했어,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고 버텨왔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자부심은 다시 저를 괴롭히죠. 그러니까 너는 잘해야만 해, 노력해야만 해. 그리고 그러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무의식적인 미움과 반발심이 울컥울컥 올라옵니다. '왜 너는 연습하지 않아? 왜 노력하지 않고 얻기를 바라? 왜 내가 그냥 이것들을 얻었다고 생각해?'




두려움을 가리려고 우리의 에고는 자라납니다.


얼마나 많은 경험과 감정들이 엉겨 붙어 있을지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여서, 한동안은 상담하는 것도, 명상요가를 가는 것도 너무 두려웠어요. 이 이상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안 돼,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없을 거야, 나는 그걸 소화할 수 없을 거야. 이 정도는 덮어두고 모르는 척하면 그나마 지금만큼 평온한 일상은 지킬 수 있어. 이것도 에고의 목소리였을까요?


요가 선생님께서 그 두려워하는 마음도 그대로 받아주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는 이전 글에서 많이 썼죠? 두렵구나 하면서 그 시기를 지나오면서 몇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뭔가를 잘하지 않으면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구나. 그건 내가 어릴 때부터 칭찬을 많이 받아서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성격이었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또 이런 생각도 했어요. 그렇다면 세상에 다른 사람들은 내가 꼭 무언가를 잘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아니 아예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그런 마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지? 나도 무언가를 잘하지 않아도, 그냥 자연스러운 내 모습으로도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나를 설득해서 아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을 수 있을까?




내 뇌 속에 있는 알고리즘


우리의 무의식은 자동 연산을 해서 결괏값만 나에게 알려줍니다. 그 무의식의 수식은 어릴 때부터 쌓여온 경험과 감정들이 엉겨 붙어서 설계되었을 텐데, 그 수식이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고 내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는데 어떡하라는 건지 너무 답답할 때도 많았어요. 외부에서 받은 입력값을 내 뇌에서 자동으로 연산을 해내고, 제 경우에 그 결괏값은 보통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상담을 받으면서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졌던 것은, 그 수식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선생님이 힘주어 얘기하셔서 믿음이 갔어요), 그리고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무언가를 잘하지 않고도 그런 것과 상관없이 세상에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어요.


모지리 같이 아무것도 못하더라도 친구가 있는 나였으면 좋겠다. 그때부터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깨달은 것이 있는데요, 모지리 같이 아무것도 못하는 나를 가장 못 받아들이는 것은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에 대한 기대도 너무 크고, 항상 뭔가를 잘해야만 한다고 채찍질하던, 두려워서 나를 지키려고 키워낸 에고는 결국 나를 가장 괴롭히는 존재가 되죠.




수치심도 자부심도 없는 존재가 되면 편안할까


수치심과 자부심이 짝꿍이듯이, 열등감과 우월감도 짝꿍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부분으로 내가 일말의 우월감을 느꼈다면, 그 똑같은 부분에서 누군가에게는 열등감을 느낄 테니까요. 특별히 관심이 가지 않는 분야라면 열등감이나 우월감이 생기지도 않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각자 다르지만 유독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느끼는 부분도 있고, '아, 너는 그렇고 나는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여지는 부분도 있잖아요.


부끄럽게도 저는 저보다 다리가 얇은 사람을 보면 열등감을 느낍니다. 저는 꾸준히 운동을 하고, 건강히 먹고, 적정 체중을 유지하면서 지금의 제 몸이 건강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가장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반감이 뭐가 있을까 하고 관찰하다 보니 그렇더라고요. 그건 사회적으로 말라야 한다는 인식이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심어진 탓일까, 아니면 내가 원래 원하던 것일까. 그걸 투명하게 보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다리가 얇든 두껍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마음이 훨씬 편안할 것 같기는 합니다. 누군가에게 몸으로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고, 반대로 은근한 우월감을 느끼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일 수 있다면요. 내가 나에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저는 수치심도 자부심도 깨끗하게 지우지는 못했지만, 관찰하고 있습니다. 아 이런 부분에서 내가 수치심을 느끼는구나. 아 저런 부분에서는 은근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구나. 다른 사람이 반사적으로 싫다면 왜 그런 감정이 들었지? 하고 저와 깊게 대화를 나눠봅니다. 보통은 저의 자부심이나 수치심과 연결된 감정인 경우가 많아요. 내가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지고 있는 사람, 혹은 나는 열심히 노력했는데 노력하지 않고도 괜찮아 보이는 사람 등등.


그리고 일부러 작은 수치심들을 겪어보려고 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너무 큰 수치심을 겪으면 내가 힘들 것 같으니, 작은 부분에서 일부러 헐렁하게 굴기도 하고, 못 챙기기도 하고, 실수도 해보면서 내가 그간 두려워서 피하고 싶었던 감정들을 조금씩 겪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무언가를 못하는 나를 보면 애잔하기도 하고 나름 귀엽지 않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저도 뭔가를 잘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조금씩 받아들여가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예전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나 말도 조금씩 이해가 되기도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게 썩 나쁘고 잘못한 것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도요.




이렇게 엉겨 붙은 상처와 감정과 경험들을 다 걷어내고 나면 뭐가 남을까요? 저는 그 투명한 저를 만나고 싶어요. 진정한 나의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이런저런 경험을 시켜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경험하고, 또 모든 것을 걷어내고 나서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어 할까. 저에게 꼭 맞는 움직임과 방향을 찾기 위해 작은 움직임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밖에 안 해봤고, 이 쪽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쪽으로 가는 건 너무 아쉽잖아요. 몸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들은 어쨌든 자기가 움직이고 싶은 방향으로 움직여 낼 수 있습니다. 내가 진짜 자유롭게 움직이려면 이 방향도 저 방향도 경험해 보고,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된 나는, 두려움 없이 어떤 선택을 할게 될지 궁금하지 않나요?







비슷한 내용이지만 좀 더 가볍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다음 글로 덧붙여 놓을게요:)

쉬어 가는 글 <사람의 어떤 부분을 이쁘게 봐줄 수 있는 사람>


그다음 글은 마음의 움직임을 어떻게 시작해 볼지, 또 안전하게 움직여보는 경험과 나에게 최적화할 수 있는 움직임을 찾아나가는 것에 대해 글을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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