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즐거워 보이려고 발버둥 치기

지긋지긋해

by 최서연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자랑할 거리가 필요하기도 했고, 다시 일하기 시작하면 또 여유가 없을 테니까. 같이 가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 같이 갈까 고민하다가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다. 섭섭해하는 엄마가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내 기분만 생각하기로 했다. 읽을 책을 싸들고 캐리어를 챙겨 밤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갔다. 내가 묶게 된 호텔은 바다가 보이는 아늑하고 깔끔한 곳이었다. 좋아 보이는 것만 있으면 그 사람이 생각났다. 같이 왔으면 좋았을까. 지긋지긋할 정도로 생각이 났다. (지금 내가 쓰면서도 지긋지긋 한데 읽는 사람들은 얼마나 지긋지긋할까 싶다.)


그때는 모든 순간에 그 사람이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잠이 설 깨서 정신도 없는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을 쑤시고 들어와서 차라리 영원히 잠에서 깨지 않았으면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커피를 마실 때면 내가 아침에 커피 먹는 걸 좋아하는 것을 아는 그 사람이 아침부터 사 왔던 커피가 생각났고, 돌아다니면서 길을 잘 못 찾고 헤맬 때는 지도도 안 보고 길을 엄청 잘 찾아갔던 그 사람이 생각났다.


‘지긋지긋해.’


‘왜’ 인지에 대한 대답을 아직도 찾지 못한 채, 언제쯤이면 내가 ‘왜’를 따지지 않고 그냥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했다. 혼자 와서 좋은 점도 많았다.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또 뭐가 맘에 안 들어서 틱틱대는 건지 고민하며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된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계획 없이 움직이며,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내가 가고 싶은 데를 가도 된다. 길을 헤매도 한숨 쉬는 사람이 없었고, 도착한 곳이 생각보다 별로여도 짜증 내는 사람이 없었고, 갑자기 목적지를 바꿔도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진도 많이 찍고, 이곳저곳 하릴없이 돌아다니며 구경할 수도 있었다. 왜 그러는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내 마음대로 하면 되니까. 하지만 너무 이쁜 풍경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면,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면, 어김없이 그 사람이 생각났다.


‘그 사람도 이걸 보면 좋을 텐데, 그럼 기분이 조금이라도 좋아지지 않을까.’


어차피 같이 사진도 안 찍어줬을 텐데, 여기 같이 앉아서 사진 찍으면 이쁘겠다. 얘기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손잡고 걸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근데 그게 누구든 네가 아니면 싫을 것 같다. 낯선 곳에서 혼자 있으니 생각도 많아지고 글도 많이 쓰게 됐다. 걱정거리와 어두운 기분은 놓고 올 수 없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환경에 맘 편히 놀고 구경만 하면 되는 며칠이라서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너무 기분이 처지려고 할 때는 기분 좋은 일을 채우려고 노력했다. 맛있는 것을 사 먹고, 좋은 곳을 찾아가고, 책도 읽고, 글을 쓰기도 하고, 바다 앞 카페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그저 바라보기도 했다. 마지막 날 밤에는 무리를 해서 내가 묶고 있던 호텔 스파에서 마사지를 받았다. 뭔가 과분하다고 생각되는 걸, 나에게 해주고 싶었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잠이 들면서 혼자 여행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겨울에 간 여행이라 이제 찾아올 봄부터의 1 년은 어떻게 보내게 될지 기대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나 혼자서도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면 그 사람이 더 빨리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혼자 호텔에서 카나페와 와인을 먹으며 쉬었던 가장 즐거운 순간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뭐 별거 없구나. 혼자 여행 오는 것도, 여행 많이 다니는 것도, 어딜 가는 것도, 뭐 별거 없구나. 나는 너랑 있는 게 가장 소중하고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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