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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Oct 27. 2022

4. 봄이 님에게

이름없는 중고책방 네 번째 손님께

안녕하세요, 봄이 님.


제가 사는 곳에는 아침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올리브를 올린 바게트와 토마토를 곁들인 샐러드를 아침으로 먹고, 곧이어 부추전을 부쳐 먹었습니다. 배가 찼으니 굳이 먹지 않아도 좋았겠지만, 욕심이 생겨 버렸어요. 저는 욕심에 자주 지는 사람인가 봐요. 비가 오는 날에 전을 먹으면 '시간을 잘 보냈다'는 느낌이 들어요. 먹을 핑계를 꽤나 잘 만드는 편이죠? 여름에 어느 시골 마을에 다녀왔는데, 돌아와서는 손에 물 묻히는 날이 많아졌어요. 요리하는 사람을 자주 봤더니, 제게도 그 모습이 익숙해졌나 봐요. 봄이 님은 오늘 어떤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보내고 계실까요? 제가 이런 궁금증을 갖고 있다는 건 모르셨겠죠. 책을 주문받고 발송하기 전까지는, 얼굴도 모르는 손님들을 자주 생각합니다. 무언가 흥미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편지에 써서 보내야겠어!' 결심하기도 하고요. 물론 까먹는 게 태반이지만요(웃음).


그러니 저는 오늘, 폭풍우 치는 기억 마을에서 겨우겨우 살아남은 몇 개의 이야기들과, 쓰면서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이야기들을 몇 개 엮어 보내드릴게요. 봄이 님께 보내는 이 책은, 대학을 졸업할 때 좋아하는 동생에게서 선물 받은 책이에요. 책의 맨 앞 장이 찢어져 있는 것은, 그 친구가 첫 장에 편지를 써 주었기 때문이에요. 그 편지는 제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답니다. 책을 선물한 동생은 가수 스윗소로우의 팬이었대요(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한때 스윗소로우의 멤버가 진행하는 라디오의 작가였나 봐요. 서점에서 호기심에 책장을 넘기던 동생은, 한 시간 동안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대요. 그리고 그 책은 물처럼 흘러 저에게 왔죠. '언니 같은 캐릭터는 내 살다 살다 다시는 못 볼 것 같고, 언니만큼 정 많은 정 씨 언니는 평생 없을 거야'라는, 귀여운 편지와 함께 말이에요.


이 이름 없는 중고 책방을 운영(?)하면서, 선물 받은 책을 보내는 것은 두 번째입니다. 당근마켓을 통해 거래했던 첫 책도 선물 받은 책이었어요. 순간 팔고 싶지 않았을 만큼 제가 아주 사랑하는 책이었지요. '선물 받은 책을 팔다니 너무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책이 또다시 물처럼 흘러, 더 아름다운 곳에 가 닿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답니다. 스리랑카에서 동료 교사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선물 받은 책들은 거래 목록에 없었을지도 모르지만요. 저를 아주 잘 챙겨주던 다정한 동료 교사가 있었습니다. 현지인이었고, 저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고, 웃는 모습이 따뜻한 남자분이셨죠. 어느 날 학생으로부터 손목시계를 선물로 받았는데, 제게는 사이즈가 맞지 않았고, 사실 제 취향도 아니었어요. 저는 정말로 마음만 받고 싶었는데, 받은 선물을 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그때 동료 선생님이 말했어요. 그럼 그 선물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라고요. 저는 놀라서 물었죠. "하지만 선물 받은 걸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선생님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어요. "스리랑카에서는 받은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걸 이상하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기쁜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나니 좋은 일이죠." 그 순간 모든 사고가 정지되는 듯했어요. 정말 깜짝 놀랐거든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구나, 놀라웠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살고 있구나, 행복했어요. 이 책으로 인해 행복한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다면, 제게 이 책을 선물한 사랑스러운 친구도 분명 더 행복해질 거예요.


인간관계에 조언이 되는 책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하셨었지요. 아쉽게도 '인간관계'라는 주제가 뚜렷한 책은 저에게 없지만, 이 책은 저에게 '인간'이고 '관계'입니다. 이 책은 저에게 '경주' 그 자체이고, 경주와 나 사이의 마음 그 자체이고,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그 친구의 온기거든요. 어쩌면 지금의 제 인간관계는 거의 폭망인지도 몰라요(웃음)(근데 이제 쓴맛을 곁들인). -이어서 씁니다. 오늘은 날이 맑아 강아지들과 함께 풀밭에 앉아 해도 잠시 쬐었어요. 비 오는 날이 이어지는 와중에 맑은 하루는 꼭 선물 같네요- 저는 한때 강아지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생김새도 이미지도 강아지 같다고요. 그 무렵의 저를 떠올려 보면, 저 또한 동의할 수밖에 없네요. 하지만 지금은 거울을 봐도 그다지 강아지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몇 달 전이 그나마 최근이라면 최근, 북극여우를 닮았다는 말을 들었어요. 개과의 포유류이긴 하지만 개는 아니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습성이 있는데, 그건 확실한 공통점인 것 같군요. 느닷없이 왜 동물 이야기를 했냐면, 저는 마음이 얼굴에 드러난다는 말을 믿거든요. 저는 전보다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마음을 주지 않고, 기대하지도 실망하지도 않아요. 몇 년 전의 저와 비교했을 때이긴 하지만, 스스로도 확실히 느낄 수 있죠. 하지만 외롭지는 않아요. 나를 잃어버리는 것만큼 외로운 건 없잖아요. 저는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며 저를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의 저에게는 지금 이 거리가 적당한 것 같아요.


봄이 님에게는 어떤 고민이 있기에 저에게 '인간관계'라는 키워드를 주신 걸까요? 봄이 님도 닮은 동물이 있을까요? 편지를 쓰다 보니 봄이 님에 대한 정보가 정말 적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고민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은 건 잘한 일 같아요. 저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저에게 사람은 꼭 물 같아요. 흘러가기도 하고, 잠시 고이기도 하고, 뜨거운 햇살에 증발해 버렸다가, 어느 날 다시 비로 내리기도 해요. 그러는 동안 저는 자랐고, 사람들은 저의 일부를 이루었죠. 중요한 건 그게 '일부'라는 거예요. 저의 전부는 아니고, 전부여서도 안 되는 거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어쩔 도리도 없이, 사랑에 빠지면 상대가 전부가 되기도 하더라고요. '거의 전부'라고 하는 것이 더 맞겠네요. 어쨌든, 그런 사람과 이별하고 나면 나는 거의 죽어 버려요. 마르고 시들어요. 그리고 또 사람이 흐르고, 고이고, 증발하고, 비가 되어 내려요. 저는 또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짓고 타박타박 걸어요. 샐러드를 만들고 고구마를 삶아요. 순두부찌개를 끓이고 나물을 씹어요. 그렇게 다시 살아요.


제가 봄이 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고 싶어요. 고민해서 책을 고르고, 다시 책을 읽고 편지를 쓰고, 마음을 담아 응원하는 일 같은 거겠지요. 어떤 고민이든 물처럼 흘러가면 좋겠어요. 좋은 사람들이 많이 흘러오면 좋겠고, 저도 그중 한 명이었으면 좋겠어요. 대면하는 만남은 아니지만, 제 마음에 품은 빵 한 조각을 이렇게 건네고 있잖아요. 이런 만남도 꽤나 재미있고 매력 있지 않나요? 물론 누구보다 그걸 잘 아는 분이니 책을 주문하셨겠지만요. 봄이 님 바로 전 순서에 책을 받은 분은, 두 번째 책을 주문하셨어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소설이고, 아주 두꺼운 책이랍니다. 책을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그분은 또 자신의 순서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지만, 그런 '기다림'이 있다는 사실이 하루를 더 잘 살게 해요. 차곡차곡 쌓인 책들을 읽고, 편지를 쓰고, 택배를 보내고, 언젠가는 다시 그분께 편지를 쓰는 날이 오겠죠. '이번과는 다른 버전의 편지를 써 주세요'라는 요청사항을 받았어요. 존댓말로 편지를 써 보냈는데, 상스러운 말이어도 좋으니 제발 존댓말은 쓰지 말아 달라는 요청이었어요. 어떤 콘셉트로 편지를 써서 드릴지 재미있는 상상 목록을 추리고 있답니다. 'ㅇㅇ이 이 새끼, 오랜만이다 야'는 좀 오버겠지요? 말씀드릴 기회가 있다면, 어떤 콘셉트로 편지를 보냈는지 알려드릴게요!


지난번부터 편지를 양면 인쇄해 보내드리고 있어요. 환경을 위한 작은 한 걸음! 같은 느낌이지 않나요? 이제는 한낮에도 찌는 더위는 없고, 그저 힘 빠진 더위만이 텅 빈 거리를 방황하는 느낌이에요. 귀뚜라미 소리도 익숙해졌고, 오후의 서늘함에도 적응 중입니다. 태풍이 지나가면 완연한 가을이 집 앞에 당도해 있을까요? 그보다는 일찍 이 편지가 전해지길 바랍니다. 가을의 시작을 함께하고 싶거든요. 무엇이든 함께한다는 건 따뜻한 일이니까요. 이름 없는 중고책방의 편지 프로젝트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경을 위한 작은 한 걸음으로 양면 인쇄한 편지를,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보내드립니다. 답장할 이메일을 알려달라고 하셨었지요? __________@naver.com 방금 이메일 계정을 만들고 왔습니다. 대문을 열어두고 기다릴 테니, 언제든 들러 주세요. 대면은 아니어도, 따뜻한 차 한 잔 함께 나눠요.


-9월, 이름 없는 중고책방을 운영하는 북극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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