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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Nov 06. 2022

5. 보연 님에게

이름없는 중고책방 다섯 번째 손님께

안녕하세요, 보연 님.


저는 작고 하얀 강아지의 협박을 받으며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아직 밥 먹을 시간이 30분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밥그릇을 엎어놓고 자꾸만 앞발을 주며 무언의 협박을 하네요. '밥.줘' '밥.달.라.고' 후덜덜 부덜덜. 꽤나 무섭습니다. 사실 아닙니다. 너무 귀엽습니다. 태풍 힌남노가 코앞까지 와 있다고 합니다. 내일 아침이면 정말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 이것이야말로 정말 무섭습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무섭고 위협적일 비가 말이에요. 자연은 공평한데 사회는 늘 공평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름. 자연은 정말로 공평할까요. 그것은 그저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똑같이 내리쬐는 햇볕도 누군가에게는 옵션일 뿐이니까요. 이름 없는 중고책방(이하 이중책)을 운영하며 세 번째 손님에게 김애란 작가의 『침이 고인다』를 보내드렸어요. 수록된 작품 중 첫 번째 단편이 「도도한 생활」인데, 사실 주인공은 서양 음계의 첫 음인 '도'가 두 번 겹쳐진, 그런 '도도한 생활'을 해요. 비가 오는 날 지하방이 빗물로 가득 차고, 그곳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죠. 모쪼록 태풍으로 인한 비 피해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보연 님께도요.


보내드리는 책에 「장례식 블루스Funeral Blues」라는 시가 나와요. 몇 번이나 다시 읽었어요. 사랑을 잃었을 때의 제 마음이 그곳에 있었거든요. 그리고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을 관심 목록에 추가해 두었습니다. 책을 통해 다른 작품을 만나는 것도 정말 신나고 즐거운 일이에요. 이렇게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렇고요. 책에는 이런 문장도 있어요. '어쩌면 글쓰기와 글 읽기라는 매개체를 통해 만난 당신과 나는 직접 마주하지 않아도 오히려 더 깊이 사귀어온 듯한 다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정말 그렇지 않나요? (방금 강아지가 또 밥그릇을 긁고 저를 쳐다봤고, 저는 밥을 주고 왔습니다. 물론 아직 밥 먹을 시간은 아니지만, 인생 너무 빡빡하게 사는 것도 재미없으니까요.) 이중책 손님들께 편지를 보낼 때는 어쩔 수 없이 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돼요. 제가 만난 날씨, 제가 만난 사람들, 저의 동물들, 오랫동안 제 안에 머무는 생각들과 잠시 스쳐가는 생각들을요. 손님들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어제는 이중책 이메일 계정을 만들었습니다. 이메일 주소는 __________@naver.com이에요. 네 번째 손님께서 이메일 주소를 요청하셨었거든요. 답장을 쓰고 싶다고요. 혹시 보연 님도 무엇이든 저에게 전할 말씀이 있으시다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시다면, 언제든 편하게 글을 남겨 주세요.


보연 님의 연락처를 확인하고자 카카오톡 친구 등록을 했다가, 우연히 보연 님의 생일을 알았습니다(이름 확인 후 바로 삭제했습니다). 8월 27일. 그날은 오래 만났던 연인과의 기념일이기도 했고, 일곱 번째 손님의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실은 생일에 맞춰 책을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네요. 대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생일에 맞춰 책을 보냈다면 보탤 수 없었을 이야기를요. 저는 보연 님의 생일에, 그날이 생일인 또 다른 사람. 일곱 번째 손님을 만났습니다. 일곱 번째 손님의 모교 캠퍼스를 함께 산책하고, 제가 좋아하는 서점에 가서 책을 구경하고, 참고서 코너에서 문제를 풀기도 했습니다(둘 다 틀렸습니다. 한국어 교재였는데 말이에요. 굴욕적이야. '일각이 여삼추'를 틀리다니요). 그리고 집 근처에 있는 공원을 잠깐 산책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친구는 어색하면 어색할수록 말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저 그날 귀에서 피나는 줄 알았어요. “어휴, 수다쟁이” 소리가 절로 나왔답니다. 저는 낯가림도 없는 편이고 긴장도 잘 하지 않는 터라, 그 친구가 어색해하는 것을 구경만 했어요. 아! 제가 직접 만든 초와 쪽지를 선물했는데, 그 친구가 너무 행복해해서 저도 얼떨떨하면서도 행복했어요. 누군가의 생일을 챙기는 것이 아주 오랜만이었는데,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재미있지 않나요? 저에게는 아주 오랫동안 연인과의 기념일이었던 날. 우리가 매해 만남을 기념하고 축하할 때, 보연 님은 생일을 축하받았을 테고, 그 친구도 그랬겠지요. 아주 먼 곳에 사는 세 사람이 같은 날, 저마다의 즐거움을 쌓았을 것을 상상하니 흥미로웠습니다. 그나저나, 보연 님은 생일을 어떻게 보내셨을까요? 상상해 보자면, 시끌벅적한 파티는 열지 않았을 것 같아요. 가까운 사람들과 소소하게 축하를 나누며, 고요하고 잔잔하게 행복한 날을 보내셨을 것 같아요. 따뜻한 미역국도 먹고 말이지요.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려요. 태어나서 저와도 이렇게 만나주시다니 영광입니다( ˘⌣˘ ). 그동안은 편지에 특수문자 이모티콘을 쓰지 않았는데, 이 새로운 시도가 어떤가요? 제 물음표에 대한 답변은 과연 돌아올까요?


/

선선한 바람이 부는 맑은 오후입니다. 제가 사는 곳은 큰 피해 없이 태풍을 보냈고, 땅도 말랐고 새도 날아다녀요. 하지만 포항과 울진 등은 피해가 큰가 봐요. 또 누군가 실종되고 사망했어요. 너무 더워서, 비가 많이 와서, 너무 추워서 누군가 다치고 죽어요. 죽음의 이유는 정말 다양해서, 과연 나는 왜, 어떻게 죽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요. 모든 게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삶은 아주 단순해지는 것 같아요.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뚜렷해져요. 아무쪼록 피해가 잘 복구되면 좋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오후를 보내야겠습니다.


이틀에 걸쳐 편지를 쓰다 보니 내용이 다소 중구난방이군요. 책 이야기를 해 볼까요. 정여울 작가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분이에요. 20대에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정여울 작가의 책과 칼럼을 읽으며 행복한 시절과 암울한 시기를 보냈답니다. 이 책 『똑똑』은 당시의 연인에게 선물 받은 책이에요. 깜짝 선물이었죠.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구입해 읽은 후 저에게 선물했어요. 저는 이후로도 순서대로 『콜록콜록』, 『까르륵까르륵』, 『와르르』를 읽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읽지 않았어요. 『똑똑』을 다시 읽으면서, 나머지 11개의 책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무언가 꾸준히 하는 건 그게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어도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어떤 일을 할 때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말이에요. 저는 요즘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어요. 어린애 빠진 이처럼 빼 먹는 날도 있지만, 그래도 주에 3회 이상은 하고 있어요. 건강 관리를 하지 않으면 조직검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어마 무시한 말을 들었거든요. 아무튼 운동을 하면서 체력도 조금은 좋아진 것 같아요. 밤에도 좀 더 편안하게 잠들 수 있고요. 이것만은 꾸준히 해내고 싶어졌어요. 내 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용량을 늘리기 위해서 말이에요.


오늘은 밥 먹을 시간이 다섯 시간이나 남았는데 강아지가 벌써 밥그릇을 긁고 있네요. 생이 조금 지루해진 걸까요. 저는 그런 때 밥을 많이 먹거든요. 물론 그렇지 않아도 많이 먹지만요(웃음). 오늘은 두 마리 강아지들과 함께 신나게 뛰어노는 산책을 해야겠습니다. 태풍이 지나갔음을 축하하고, 다가오는 가을을 맞이하는 준비운동으로요. 책과 편지가 보연 님께 기분 좋은 선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기에 걸리기 좋은 계절. 방심하지 말고 늘 따뜻한 옷가지를 챙겨 다니세요. 무엇보다 건강이 중요하니까요.


-늦잠을 자느라 태풍의 뒤꽁무니도 보지 못한 책방지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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