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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Nov 07. 2022

6. 권에게

이름없는 중고책방 여섯 번째 손님께

안녕, 권아.


너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는 날이 정말로 왔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권이한테는 언제 편지 써서 보내려나' 했었는데 말이야. 너를 처음 만난 날이 생생해. 너의 생일이었고, 어두워져가는 하늘에 구름이 예뻤고, 캠퍼스 안에서 어느 운전자의 양보를 받아 길을 건넜지.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너의 대학 생활 이야기를 들으며 산책을 했고, 사실 별로 걷고 싶지 않았던 나는 오랜만에 모교에 와 들뜬 너를 멍하게 쫓아다녔어. 서운하려나. 하지만 그날도 말했듯이 그날은 네 생일이었으니까. 내가 좀 덜 하고 싶어도 네가 하고 싶은 걸 함께 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건 그 나름대로 내게도 기쁜 일이었어. 서점 앞에서 선물을 받고 정말로 기뻐하던 너의 얼굴과, 어느 날 드디어 켠 초가 힘없이 꺼지던 게 생각난다. 일순간 화르르 타오르다가 맥없이 불이 꺼지는 모습이 정말 웃겼었는데. '리틀 포레스트'를 네게 주어서, 나는 그만큼의 웃음을 돌려받은 것 같았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너를 만나 조금 더 웃으며 살아.


책에 이런 말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이들에겐 무엇이든 남는 법이었다.' 우리에게도 무언가 생기고 있겠지? 우리의 만남 끝에도 무언가 남겠지. 그게 뭘까. 너무 무겁지 않고, 이왕이면 가볍고, 이왕이면 투명하고, 이왕이면 밝고 따뜻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게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해도 말이야.


김달님 작가의 『나의 두 사람』을 읽은 후, 이 책 『작별 인사는 아직이에요』를 읽었어. 첫 번째 책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읽었는데, 두 번째 책은 좀 더 차분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처음 읽을 때는 울었던 것 같은데, 다시 읽는 지금은 아직까진 울지 않았어. 뭉클해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은 들었지만. 권이는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읽을까. 네가 좋아하는 주제인 '가족' 이야기니까, 아마 어떤 감정을 갖고서든 흥미롭게 읽겠지? 너는 조부모보다는 부모가 주제인 책을 원했었지만, 달님 작가에게는 조부모가 부모나 마찬가지야.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달님은 자식이고. 관계에 꼭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 관계의 본질이 이름 안에만 있는 건 아니니까. 이름 없는 관계, 이름 없는 감정도 버젓이 존재해 우리를 흔들고, 또 지켜 주잖아.


책을 읽다가 마음이 무거워져 털썩 드러눕는 때가 많았어. 역시 마음과 몸은 연결되어 있나 봐. 이게 소설이라면 책을 읽는 게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것 같아.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과 감정이라는 사실이, 자주 내 감정을 뒤흔들어.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은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잖아.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슷한 감정은 누구든 느끼며 살 수 있는 거니까. 그게 내가 『나의 두 사람』을 눈물로 읽은 이유이기도 하지. 돌아가신 할머니와 나누었던 마음들이 작은 꽃처럼 피어났고, 고마움과 미안함과 그리움이 노란 나비처럼 주위를 맴돌았어. 부모님 생각도 많이 났고. 울면서 한편으로는 위로받았던 것 같아. 가슴 저 밑에 있던 사랑이 깨어나서 말하는 것 같았어. 너는 그렇게 커다랗고 아름다운 사랑을 받았고, 또 나누었다고.


어제 삼일문고에 갔더니 '가족에 대하여'라는 섹션이 있더라. 권이가 이 책을 읽은 후에, 다음에 다시 만나 서점에 가게 되면 같이 그쪽을 둘러보자. 가족에 대해 이야기 나눠 봐도 재밌을 것 같아. 우리에게는, 전혀 똑같지 않을 테지만 어쩌면 비슷할지 모르는 공통점도 있으니까. 어제는 아버지와 서점에 다녀왔고, 좋은 시간을 보냈어. 책을 읽는 아버지를 보는 건 항상 즐거운 일이야. 몇 년 전 어느 여름날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방바닥에 엎드린 채 사촌 동생이 가져온 짱구 만화책을 읽고 있었어. 때로는 웃음을 참고 때로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정말로 잔뜩 신나서 독서 중이었지. 그 순간 집에 있던 그 누구도 아버지만큼 천진난만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아버지만큼 소년이지 못했어.


이번에 아버지는 전에 권이 네가 책을 읽던 곳 즈음에 서서 『벌거벗은 한국사』를 읽었고, 신관에서 『애린 왕자』를 소리 내어 조금 읽었어. "서울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 물었더니 아버지는 그럴 거라며 작게 웃었어. 전라도 편인 『에린 왕자』는 견본이 없어 읽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많이 아쉬워하셨어. 다음에 아무래도 두 권 중 한 권을 선물로 드려야 할까 봐. 신관 이곳저곳을 즐겁게 둘러보던 아버지는 잠시 후 내게 이야기책은 어디에 있냐고 물었어. "전래동화 같은 거 말하는 거야?" 했더니 아버지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우리는 다시 함께 지하 1층으로 내려갔지. 그리고 아버지는 미간에 주름이 생길 만큼 집중해서 『처음 만나는 한국 민담』을 읽었어. 권이 네게도 말했던 것처럼 나는 아버지가 만화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거든. 그건 정말 사실이기도 했는데, 이번에 아버지는 만화책에는 생각만큼 관심이 많지 않았어. 나는 예전의 아버지만을 기억하고 살았는지도 모르겠어. 아버지도 나처럼 계속 자라고 늙고 변할 텐데 말이야.


편지를 먼저 써 두고, 책의 남은 페이지를 천천히 읽으려고 해. 어쨌든 이번에 네게 이 편지를 전달해 주고 싶어서. 고마운 마음은 빨리 전할수록 좋은 거니까. 반가워서, 웃겨서, 네가 하는 말이 얼토당토않아서, 어이가 없어서, 속이 터져서, 좋아서. 너를 만나 많이 웃어. 좋은 이유와 좋지 않은 이유로 너를 만나 어쨌든 웃어. 나와 거의 양극단에 서 있는 너. 그 끝에 있는 너를 만나 함께 웃는다는 건 희망적이야. 내 세계가 그만큼 넓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맞춤법을 자주 틀려줘서 고마워. 게임을 해 줘서 고마워. 갈등을 피하려고 가끔 거짓말을 해 줘서 고마워. 너로 인해 넓어지고 있어(흐흐). 늘 먼 길을 달려 내게 와 줘서 고마워. 약속 시간에 20분이나 늦은 나를 기다려줘서 고맙고, 그런 나를 나무라줘서 고마워. 미안하다는 내 말에 안절부절못하는 너를 보면서 또 웃었던 것 같다.


어쩌면 몇 번 더 놓쳤을지 모르는 계절, 하루도 똑같을 수 없는 날들을 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잔디밭에서 우담이를 보며 함께 웃었던 순간이 소중하고,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앞 잔디에 앉아 바람을 느꼈던 일도 소중하다. 모나고 작은 내 마음을 바라봐 줘서 고마워.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진지하게 들어 주고 또 때로는 듣지 않아 줘서 고마워. 네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네게 짜증 냈을 때, 이해 저편에서 나를 받아들여줘서 고마워. 당연히, 하나도 당연할 게 없는 너의 따뜻한 마음에 깊이 고마워하고 있어. 콘셉트를 유지하느라 자주 틱틱댈 수밖에 없는 나의 고충(?)을 이해해 줘.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의 행복과 건강을 온 마음으로 비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생각만으로 문득 삶이 안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용하다 생각했던 것에 빚져 무사했던 날들이 내게도 분명 있었을 거다.' 함께 샐러드를 먹어줘서 고맙고, 떡볶이를 먹는 내게 짜증을 내 줘서 고마워. 너에게 빚져 무사했던 날들이 있었겠지. 아, 맞다! 저 따스한 문장에 속아 공복의 내 옆에서 와작와작 팝콘을 씹어 먹던 너를 잊을 뻔했구나. (네가 아는 그 미소) '어떤 것에 멈추는가, 지나칠 수 없는가는 내가 어떤 시간을 보내며 살아왔는지 말해 준다. 내가 멈추는 것들은 한때 내가 오래 보았던 것, 마음에 걸렸던 것들.' 하나도 맞는 게 없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투성이인 너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건 내가 외로워서. 혹은 내게 친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네 안에 언젠가 내가 오래 보았던 것들이 있어서일 거야. 가령 오랫동안 이야기를 들어주는 너의 다정함. 정말로 걱정하고 염려해 주는 너의 사려 깊음. 네가 하는 말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너의 눈동자. 그런 것들. 그것들은 네가 얼마나 재미있고 재미없는 사람인지를 떠나, 그저 너에게 있는 귀한 것들이잖아. 언제고 잊지 않을게. 네가 내게 준 마음들과, 우리가 나눈 시간들을.


아무래도 우리에게도, 작별 인사는 아직인 것 같다.

또 만나자, 나의 망그라진 권이.


-2022년 9월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마라토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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