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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Mar 29. 2023

8. 저녁 님에게

이름없는 중고책방 여덟 번째 손님께

안녕하세요, 저녁 님.


오랜만에 나눈 대화 즐거웠습니다. 감정 소모로 인해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었지만, 즐겁게 대화를 이어 가려고 애써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지금은 새벽 3시 25분인데요, 저는 잠을 포기했습니다. 자정이 넘어 짜장 떡볶이를 잔뜩 먹었거든요. 건강이 좋지 않아 채식을 해야 하고, 나트륨 함유량이 높은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고, 가공식품은 멀리해야 하지만요, 정말 먹고야 말아야겠는 날이 있어요. 야식을 먹으면 그날은 해 뜨는 걸 보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리석은 인간의 표본 같은 인간은 기어이 우물우물 떡볶이를 먹고야 말았습니다. 배고픈 거, 잠깐 참고 쓰러지듯 잠들면 그만인데 말이에요. 어쨌든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 책 이야기를 해 볼까요?


예고편을 미리 드렸었죠? 이 책은 저녁 님이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동시에 있는 책이라고요. 저녁 님이 저한테 말씀하셨었어요.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하는 책만 아니면 좋겠다고. 그리고 말씀하셨죠. '루'라는 글자를 좋아한다고요. '랑'도 좋아한다고 하셨던 것 같고요. 그래서 선택한 책이랍니다. 실은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떠오른 책이었어요. 작가 입장에서는 씁쓸한 일이겠지만, 저에게 이 책은 하나마나 한 소리만 하는 책이 분명했거든요. 중간중간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한테는 그게 제일 흥미 있는 부분이었어요.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면 '가끔은 쉬어 가도 괜찮아요' '열정을 갖고 포기하지 마세요' 같은 말, 뻔하잖아요. 말뿐이고 공허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스스로도 의외라고 생각할 만큼, 그 뻔한 말들이 갖는 메시지도 있었어요. 가령 34쪽을 펴 보세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아마 저녁 님과 저도 포함이겠죠? 246쪽을 보고는 흠칫 놀랐어요. 작년 즈음에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랑 똑같은 말을, 헤르만 헤세가 했더라고요. 대문호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던 거죠. 248쪽은 어떻고요. 삶을 만들어갔던 날들이 떠오르며 잠시 뭉클했었답니다. (이만하면 나름대로 설득력 있었다고 치고)


이 책은 제가, 저녁 님에게 말하지 않았던 '그 나라'에 살고 있을 때, 한국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선물했던 책이에요. 컴퓨터의 결제창은 내내 흰 화면으로 저를 조롱했고, 결국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 책을 주문했었어요. 한국에서 자주 이용하던 인터넷 서점에 들어갔고,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을 골랐었어요. 책 소개는 페이스북이 어떻고 입소문이 어떻고 하면서 저를 유혹했고, 저는 가뿐하게 넘어갔답니다. 한국에 돌아와 이 책을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런, 이런 걸 선물이라고 보냈단 말이야?'였어요. 이 책으로 즐거움과 용기와 행복을 얻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남자친구의 취향도 아니었고요.


이쯤에서 궁금하실 수도 있겠네요. 남자친구에게 선물했던 책이 어떻게 다시 제 손에 들어왔는지 말이에요. 그건, 그냥 그렇게 되었답니다. 그 친구의 옷이 제 옷장에 들어있고, 제 노트북 가방이 몇 년째 그 친구네 집에 가 있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걸 저녁 님에게 보내는 게 맞느냐면, 네! 당연히 맞아요. 그 친구는 이 책의 행방은 물론이거니와 이 책의 존재도 생각지 않고 살 테니까요. 안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생의 3분의 1을 그 친구와 함께했으므로, 아마 제 생각이 맞을 거예요. 이 책의 여정이 어디에서 끝날지 궁금해집니다. (제발, 이 친구와 끝까지 함께해 주세요!)


방금 컴퓨터 하단의 달력을 봤더니 2023-02-23. 어쩐지 다정해 보이는 조합이에요. 골고루 두 번씩 옹기종기 붙어 있는 모양이 말이에요. 작년 2월 3일에 처음으로 광명에 갔었어요. 해가 저문 저녁, 물세수만 하고 급하게 집을 나서 버스를 탔었답니다. 바람은 찼는데 하도 뛰었더니 땀이 좀 났었어요. 그러고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묘하게 해방감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갑자기, 그 무엇보다도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가장 우위에 두고 선택한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어요. 역에 도착해 한 번의 환승을 한 후에야 광명역에 도착했어요. 코로나가 터지고 첫 기차여행이었던 것 같아요. 광명역에는 투썸플레이스가 있었고, 역 밖으로 나오니 아파트가 보였었어요. 다음 교통편을 기다리며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있었고, 하얀 강아지가 주인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날이 이렇게 생생하다니, 저에게 이제 1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가 봐요. 그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편은 없었으므로, 저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답니다. 겨울의 마지막 날과 봄의 시작을, 그곳에서 보낸 셈이죠. 정확히 말하면 시흥이지만, 거기가 거기죠 뭐. 저에게 이제 광명과 시흥의 거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가 봐요.


올해는 일기를 열심히 쓰고 있어요. 영 쓰고 싶지 않은 날에도 뭐라도 갈겨 놓아요. 싫은 사람 뺨따귀를 갈기듯이 말이에요. 그래서 올해 2월 3일, 4일 일기를 찾아봤어요. '지나고 보면 부드럽게, 웃으며 넘길 수도 있는 일들. 여유를 가지자, 나 자신' '빵을 잔뜩 먹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잔뜩 나누고, 부지런히 게을렀다. 샤워를 하며 생각해 보니 내 여권은 만료 상태였다.' 뭐 이런 게 쓰여있어요. 당연히, 가장 재미있는 부분들은 몽땅 빼고 알려드린 거랍니다. 어쨌든 입춘이 지난 지도 한참이니, 봄은 더 속력을 내 다가오겠죠? 올봄에는 꼭 대전의 한밭수목원에 갈 거예요. 같이 갈 사람 없으면 혼자라도 무조건 가야지. 저녁 님은 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없으면 좋은생각 정기구독이라도 해 봐요. 봄에는 그런 맛이 있어야죠!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요. 저는 요즘 바질 페스토에 꽂혀 있어요. 샐러디에 신메뉴가 나왔는데, 제법 맛있어요. '바질 치킨 브레드'인데, 저는 치킨을 먹으면 안 되므로 치킨 대신 버섯을 넣어 달라고 해서 먹었었어요. 세상 세상,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답니다.


새벽이라 그런지 편지도 의식의 흐름 따라 물결쳐 흘러가네요. 이왕 메뉴 추천을 한 김에 이번 편지의 테마는 '추천'으로 잡아 볼게요. 편지의 후반부에 와서 이제야 테마를 잡냐 하신다면, 네. 뭐 어때요. 이러나저러나 흘러가다 고이고 또 물결쳐 흘러갈 말들인데요. 넷플릭스 영화 「새콤달콤」 추천해요. 「트루 스피릿」과 「결혼 이야기」도 보고 싶어서 찜해 놓았어요. 2월에 개봉하는 영화 「서치2」와 3월에 개봉하는 영화 「멍뭉이」 추천해요. 방영한 지 10년도 넘은 드라마 『연애시대』 추천해요. 저는 배우 정유미를 좋아하는데요,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로맨스가 필요해2』예요. 여름에 보면 더 좋은 드라마랍니다. 『연애의 발견』도 좋았어요. 쓰고 보니 연애처돌이 같네요.


어젯밤에는 김혼비 작가의 『다정소감』을 선물 받았어요. 예전에 서점에서 잠깐 읽다가 눈물까지 흘렸던 책이에요. 추천할게요. 아!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 윤가은 감독의 『호호호』도요.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 추천. 김연수 작가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추천. 윤혜정, 『인생, 예술』 추천.


Heir&Fudasca의 「Nobody wants me」는 외출 준비할 때 듣고 싶은 노래예요. 적당히 둠칫거려서 두고 가는 물건을 두 개 정도 줄여줄 거거든요. 뮤지컬 「빨래」 보셨나요? 혜화에서 상시 공연 중일 텐데, 시간 되시면 가 보세요. 시간을 내서 가 보시는 것도 추천드려요. 굽네치킨의 시카고피자 종류를 추천해요. 비스트로 피자의 '더블 포테이토 피자'와 '페퍼로니 피자'를 추천해요. 스트레스가 많을 때는 편의점에서 '웰치스 포도'를 사서 원샷 해 보세요. 꼭 야외에서 마셔야 해요.


비 오는 날 장화 신고 산책하는 걸, 맑은 날 사람은 없고 바람은 많은 곳으로 가는 걸 추천해요. 강아지나 애인이 있다면 더 완벽하겠지만, 필수 옵션은 아니랍니다. 속상한 날에는 칼질을 많이 해야 하는 요리를 해요. 이것도 살벌한 취미로 보실지는 모르겠지만, 살벌한 거 사실이니 딱히 오해는 아니랍니다. 국경일에는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을 추천해요. 남산 근처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다는데, 저 거기 꼭 가 보고 싶거든요. 먼저 가 보시는 거 허락해 드릴게요.


제가 추천한 것들을 먹고 보고 해 보신다면, 저녁 님의 '어떤 하루'들이 조금은 색다르게 채워지겠네요. '이건 나도 마음에 들어', '이건 정말 별로인데' 하는 것도 재미있을 거예요. 모든 게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말이에요. 꼭 '어떤 인생' 같네요.


게으르고 제멋대로인 책방지기의 소포를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라던데 복이 왔나요? 지금은 아니어도 곧 갈 거니까 기다려 보세요! 자꾸 기다리라고만 해서 죄송합니다만,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광명역의 풍경을 떠올려 보며, 책방지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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