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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Apr 03. 2023

9. 봄이 님에게

이름없는 중고책방 아홉 번째 손님께


뚱한 고양이를 닮은 봄이 님, 안녕하세요.


선선한 10월 중순에 재주문을 주셨는데 4월을 코앞에 두고 이제야 책을 보내드려요. 작년 10월 중순이 어땠나 싶어 지난 일기장을 들추어 보았습니다. 선선한 날씨에 자주 산책을 나갔고, 서점에 자주 들러 새로운 책들을 많이 만났고, 북토크와 강연에도 가끔 참석했었어요. 새로운 책,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좁은 세계를 조금씩 넓혔던 시기였습니다. 이제 또 걷기 좋은 계절이 되었습니다. 늘 좋은 날씨에 이렇게 (책으로) 만나게 되네요. 봄이 님이 저의 날씨요정인가 봐요.


봄이 님이 보낸 답장을 읽고 바로 떠오른 책을 보내드리기로 했었지요? 바로 무려 '김야옹' 씨가 쓰신 『사연 많은 귀여운 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입니다. 김야옹 씨는 서울에서 작은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수의사예요. 저도 두 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살면서 동물병원을 수도 없이 들락거렸는데, 수의사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바로 이번 일요일에도 병원에 다녀왔지만 말이에요. 실은 저희 강아지들의 주치의 MBTI가 너무 궁금했는데, 어쩐지 그런 것까지 여쭙기에는 실례인가 싶어서 묻지 못했어요. 같이 간 친구는 ISTP, 저는 INFP를 예상했는데, 다음엔 용기 내어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뚱한 INFJ 고양이의 의견이 필요합니다.


지난번 보내주신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이야기를 열어볼까 해요. 독서를 그냥도 아니고 '무지무지' 싫어하던 봄이 님께서 중고책방을 통해 독서를 시작하시고, 그 시간이 뿌듯하고 행복하셨다니. 덩달아 저도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했는지 아실까요? '정말정말 하지 않던 독서'를 다시 시작해 주셔서, 그것이 제 덕분이라 여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요, 정말 누구 덕분일까요? 보내드리는 책에 '누가 누구를 도운 거죠?'라는 챕터가 있어요. 놀랍게도 책에 등장하는 고양이 이름이 '봄이'인데, 이것 또한 운명 같지 않나요?


수의대생이 된 봄이 보호자가 병원에 찾아왔다.

"선생님께서 도와주셔서 봄이와 함께 수의대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감사하긴요. 제가 돕긴 누굴 도와요. 다 본인이 열심히 공부해서 합격한 거죠. 그런데 말이에요. 제가 처음에 봄이를 도와주려고 데려오라고 하긴 했는데, 우연히도 동동이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던 덕분에 봄이가 수술을 받게 되고, 또 봄이 수술을 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동동이가 도움을 받고 눈을 잃지 않게 됐어요. 경은 씨가 수의대 입학하는 데 봄이의 경험이 결정적인 도움을 줬던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처음에 길에 있던 봄이를 경은 씨가 도와주려고 데려온 거예요."


타이핑을 하면서도 팔에 소름이 돋았어요. 봄이 님도 전문을 읽으면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봄이 님은 저를 통해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고 독서의 세계에 발을 들이셨지만, 저 또한 봄이 님을 통해 가슴 따뜻한 행복을 느꼈습니다. 첫 주문을 하면서 '답장을 하고 싶으니 이메일을 알려달라'는 귀여운 손님이 없었다면, 이름없는 중고책방의 손님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는 한동안 존재하지 않았을지 몰라요. 우리가 사는 물리적 공간인 지구가 둥근 것처럼, 에너지의 공간도 둥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음은 돌고 돌아 결국 다시 돌아가는 거 아닐까요. 우리의 편지가 돌고 돌아 서로의 마음에 닿는 것처럼요. 지금 제 앞에는 얼룩 강아지 쿠키가, 뒤에는 하얀 강아지 하리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고 있답니다. 하리는 제 엉덩이에 자기 등을 살풋이 붙이고 있는데,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이 정도의 온기인지도 모르겠어요.


'연인은 친구처럼 잊힐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걸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글쎄요"입니다. 저는 관계보다 중요한 건 그 대상의 의미 같아요. 오랜 시간 만나며 저의 일부를 일구고 만들어낸 연인도 있고, 아주 짧게 만났지만 우물처럼 마음에 깊이 고인 친구도 있어요. 하리와 쿠키는 아마 제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못할 존재들이고요.


이번에는 선물로 사진엽서를 하나 동봉할게요. 지리산에 포옥 안긴 마을 함양에 사는 동물 친구들 사진으로 엽서북을 만들었거든요. 다른 사진들도 궁금하시다면 이메일이나 카카오톡으로 편하게 말씀 주세요. 귀엽고 따뜻하고 다정한 생명들의 모습을 나누면서, 아마 또 한 번 행복해질 거니까요. 오늘은 3월의 마지막 날이니 책과 편지는 4월이 되어서야 받아 보시겠네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글이 있는데, 같이 읽어 보실래요? 봄이에요. 사월이고요. 단 하루도 슬프게 지내지 않을 거예요. 나무를 실컷 보겠습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린잎이 ‘어린잎’으로 보내는 때는 짧아요. 금세 지나가죠. 가끔 사람도 한 그루, 두 그루 세고 싶어요. 내 쪽으로 옮겨 심고 싶은 사람을 발견한다면…… 흙처럼 붉은 마음을 준비하겠어요.


우리의 사월. 단 하루도 슬프지 않길 바라요.


-모든 것에 '봄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책방지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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