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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Apr 19. 2023

10. 제로 님에게

이름없는 중고책방 열 번째 손님께



안녕하세요, 제로 님.


봄비가 지나가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오후입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분이 계신데요, 그분이 오래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란이는 모든 계절이 잘 어울리지만, 특히 봄이 가장 어울리는 것 같아" 그래서인지 저는 봄을 정말 사랑한답니다. 겨울이 설레는 건 다음 챕터가 봄임을 알기 때문이고, 여름이 소중한 이유는 봄의 스케치 위에 채색한 그림이라서고, 가을이 애틋한 이유는 봄의 선선함이 비치기 때문이에요. 죽는 계절을 선택할 수 있다면 저는 봄이 좋을 것 같아요.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적당히 시원한 계절에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지고 싶어요. 햇살로 슬픈 이의 등을 안아주고, 깨끗한 바람으로 눈물을 닦아줄 수 있게 말이에요. 사람들은 때때로 저를 떠올리겠죠. 그러다가도 새순을 보면 미소 지을 거예요. 벚꽃을 보고 설렐 거예요. 떨어지는 꽃잎을 보면 입을 벌려 감탄할 거예요. 그럼 저는 안도할 것 같아요. 저의 죽음을 잠시 잊고 봄을 맞이하는 그들을 보며 다행이라 여길 거예요. 작고 예쁜 변화가 많은 계절이잖아요. 공원에 앉아 멀리서 불어오는 꽃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고민은 잠시 자리를 비워요. 발이 네 개나 되는 강아지들과 함께 오솔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푸르러져요. 정말 아름답고 놀랍고 뭉클한 계절이지 않나요?


오늘도 두 마리의 강아지들과 함께 집 뒷길로 짧은 산책을 다녀왔어요. 햇살이 제법 뜨거워서, '오늘은 봄이 제법 힘을 내고 있나 보다' 싶었지요. 하리가 꽤 세차게 부는 바람을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맞고 있는데, 자리를 옮기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났어요.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강아지답다, 싶었지요. 쿠키는 풀숲을 헤치고 들어가더니 도깨비풀을 잔뜩 붙이고 나왔어요. 하리와 쿠키는 아주 기특한 강아지들이랍니다. 장난기도 많지만 어쨌든 제가 하는 말을 척척 알아듣고, 제가 무언가를 하면 그 시간 동안 얌전히 기다려줘요. 그런 모습도 아주 사랑스럽지만, 느닷없이 도깨비풀을 잔뜩 달고 나오거나, 신나서 자기 몸을 주체도 못 하고 뛰어다닐 때가 가장 예뻐요. 그런 '강아지다운' 모습을 보고 있으면 흐뭇함이 최고치에 달하면서 절로 미소가 지어진답니다.


제로 님께는 이런 봄의 풍경과 아주 잘 어울리는 초록색 책, 『소의 비밀스러운 삶』을 보내드릴게요. '명랑한 소들의 기발하고 엉뚱한 일상'이라는 부제처럼, 솔개 둥지 농장에 사는 소들과 다른 동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책이랍니다. 이 책을 접할 즈음에 비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보선 작가의 『나의 비거니즘 만화』도 이 즈음에 읽은 책이고요. 강아지나 고양이 외의 동물이나 동물권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동물’과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소, 닭, 양, 돼지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니까 세계가 달라졌어요. 실은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인간 이외의 삶이 보이고부터는 모든 게 달리 보이더라고요. 축사에 사는 소들과 들에 사는 소들의 삶이 보이고, 무리로서의 삶이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의 소들이 궁금했어요.


드물지만 길 위에서 소나 돼지를 실은 트럭을 만날 때가 있잖아요. 트럭 위에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게 서 있는 그들은 아마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길이었겠죠. 낯선 도시의 소음과 매연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삶의 끝을 향해 가는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동안 ‘이런 장면’은 너무 슬프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슬픔’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않고 살았었어요. 두 마리의 반려견과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말이에요. 그들은 저한테 ‘하리’나 ‘쿠키’가 아닌 ‘소들’, ‘돼지들’이었으니까요. 편지 끝에는, 몇 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읽고 쓴 일기의 일부를 첨부할게요. 생각을 나누는 건 아주 즐거운 일이니까요. 나태주 시인의 시 「꽃들아 안녕」을 좋아해요. 제로 님도 읽어 보시면 편지에 다 담지 못한 제 마음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며칠 쉬다가 이어 쓰는 편지인지라, 어제오늘은 황사 때문에 공기가 무겁네요. 하늘이 뿌예서 마음까지 뿌예진 느낌이에요. 이런 때일수록 맛있는 음식을 먹고 큰 보폭으로 산책하면서 우울을 쫓아내야겠죠. 저녁에는 좋아하는 공간에서 열리는 북토크에도 참석할 거랍니다. 이 편지와 책이 도착할 즈음에는 다시 파란 하늘과 깨끗한 공기를 만나게 되길 바라며,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한눈 팔기 좋아하고 게으른 책방지기의 봄을 함께 기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추신. 보내주신 책 선물은 초록이 무성한 5월이나 6월에 읽고 싶어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표지와 어울리는 계절에 책을 읽는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요. 보내주신 책을 읽으면 훨씬 더 좋은 책방지기가 될 수 있겠죠?


-마무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말이 길어진 책방지기 드림





새끼 송아지들이 먹을 우유를 대신 먹으며, 재미있는 놀이 한 번 하지 못한 채 죽는 소들의 살을 먹으며, 나는 어떻게 그들의 고통과 슬픔에 이토록 무심할 수 있었던 걸까. 어떻게 그것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살 수 있었을까. ‘이것저것 따지면 뭘 먹고 사느냐’는 말이 어떤 생명에는 폭력일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는 이것저것 따지며 살아야 한다. 먹지 않는 선택지도 있지만 먹어야 한다면, 그들의 고통까지 함께 삼키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은 소화되지 않고 남아 동물에게도 지구에도 빚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복지 우유를 선택하는 것으로 어느 소들의 슬픔을 조금 줄일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슬픔도 줄여주지 않을까. 방목 유기농 동물복지 육류를 선택하는 것으로 어떤 소들의 행복을 조금 늘릴 수 있다면, 나의 행복도 그만큼 늘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비건이 될 수는 없겠지만 비건 지향적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완벽한 인간이 될 수는 없겠지만 무해한 인간이 되기로 스스로와 약속한다. 이 거대한 공, 둥근 별에 함께 사는 다른 동물들에게도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내 피부를 벗어난 고통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검고 깊은 눈동자를 외면하고 싶지 않다. 우연히 그들을 실은 트럭을 만난다면 기도할 것이다. 삶의 방식(축산 방식)과 상관없이 고유하고 소중했던 생명들의 조금 더 나은 다음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갖는 것에서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더 나은 선택지가 있다면 언제고 그것을 선택할 것이고, 그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쪽으로 내 삶의 방향 키를 맞출 것이다.


내 기도의 끝은 고통받는 동물이 사라지는 것. 그 안에 인간도 포함되는 것이다. 행복한 소, 즐거운 돼지, 발랄한 닭, 건강한 개들과 함께 사는 지구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옆 동네에서도 뒷동네에서도, 저 먼 마을에서도 행복한 동물들이 저마다의 일상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의 일상이 철창이나 좁은 스톨이나 축사에 갇힌 비밀스러운 삶이 아니면 좋겠다. 양지바른 곳에서 떳떳하게 빛날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이기를 바란다. 좀 더 많은 사람이 그들이 울음에 귀 기울여 준다면, 언젠가 동물복지 마크를 찾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된다면 말이다.






로저먼드 영, 『소의 비밀스러운 삶』






직접 만든 사진엽서를 동봉했다.






책에 나오는 동물들 스티커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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