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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Sep 04. 2023

12. 저녁 님에게

이름없는 중고책방 열두 번째 손님께

안녕하세요, 저녁 님. 어쩌다 보니 또 거의 6개월 만에 찾아뵙게 되었네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저는 제법 광명 가까이까지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한 달 조금 넘게 그곳에서 살았었는데, 행복한 시간은 아니었어요. 작은 사랑을 품고 있었고 행복을 추구하는 시간이긴 했지만, 그건 삶의 태도였으니 그런 걸로 퉁칠 수는 없죠. 1997년에 개봉한 영화 <접속>에는 이런 대사가 나와요. 극중 라디오 방송의 일부입니다. "삶은 때론 먼 길을 원한다. 매일매일을 평범하게 살다가 어떤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때부터 아주 본질적인 것들을 고민하기 시작하죠. 그것이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툭툭 문제를 던져주는 삶. 그러면서도 먼 길을 가는 사람의 자세로 살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걸어야 할 숙명이겠죠. 삶은 때로 먼 길을 원합니다." 저는 먼 길을 돌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물리적으로나 비물리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말이죠. 마음만 먹으면 금방도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살 때 한 번쯤은 연락을 드릴까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러지 않길 잘한 것 같고요.


지난 번 책은 저녁 님이 '루'라는 글자를 좋아한다는 데 착안해 선택했다면, 이번 책은 저녁 님이 일본 소설을 즐겨 읽었다는 점에 착안해 골랐습니다(첫 대화 때 하셨던 말인데 기억하시려나요. 저는 아마 저녁 님의 재주문을 예상했었는지, 놓치지 않고 있었답니다). 『무지개 곶의 찻집』은 제가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일본 소설. 그리고 한때 수록된 곡들까지 찾아 들으며 재미있게 읽은 소설입니다. 지금도 몇몇 구절은 마음 깊숙이 들어와, 표지 그림처럼 파도를 만들어 내고요.


어쩐지 6개월치 안부를 묻고 6개월치 안부를 전해야 할 것 같지만, 정말로 다행인 것은 그 모든 시간이 생생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인 것은, 그러면서도 저녁 님의 취향만은 잊지 않은 것은 축복이지 않나요? 최근의 저는 선뜻 답이 내려지지 않는 질문들에 둘러싸여 내내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하고 싶은 일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마음이 확실한 딱 그만큼 이 사업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좋아하는 것을 잘 해낼 능력과 의지는 있는 것인가', '내가 지금 좋아하고 말고를 따질 때인가. 코앞의 현실을 외면한 채 꿈이나 좇는 것은, 쾌락과 안락함만을 우위에 두고 살았던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고로 이 일은 어떻게 해야 하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등의 문제로 말이지요.


놀랍게도 고지 씨가 힌트를 줍니다.


  "망설여질 때 로큰롤처럼 살기로 하면 인생이 재미있어지지."

  "로큰롤?"

  네모나고 투박한 턱을 박박 긁으며 고지 씨가 말을 잇는다.

  "늘 자신을 설레게 하는 쪽으로 가는 거야."

  나는 뭔가 할 말을 찾으려 했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다소 위험이 따르더라도 말이야. 사람이란 뜻밖에 잘 쓰러지지 않거든. 열심히 하기만 하면 절실히 필요할 때 반드시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주지." -p.105


  "저기, 고지 씨. 꿈을……."

  "응?"

  "꿈을 좇으려면 용기가 많이 필요하겠지요?"

  고지 씨가 깊은 미소를 짓는다.

  믿음직한 형님 같은 눈으로, 싱긋.

  그리고 천천히 단어를 선택하듯 이렇게 말한다.

  "내 경험으로는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을 선택하는 데에도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데." -p.113


골머리를 앓는 원인을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의료 기술이 턱없이 부족한 그 시절, 한 명의가 환자를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다 우연히 병의 원인을 찾아낸 것입니다. 흰 두건을 쓴 고지 씨가 말했습니다. "어이, 란!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을 살 용기가 없었던 거로군!" 저는 머리를 친친 감고 있던 띠를 풀어내며 말합니다. "고지 씨! 그럼 저는 그냥 직진하면 되는 걸까요?" 에쓰코 할머니가 뒤에서 "우후후" 웃으며 뭐라고 말하지만 잘 들리지가 않습니다. 결국은 내 몫의 선택이라는 뜻이겠지요. 역시, 인생은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때로 제가 너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기특하고 대견해서 내가 오직 한 명뿐이라는 사실이 아쉽기까지 합니다. 나를 마구 쓰다듬어줄 똑같은 한 사람이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때로 제가 너무 바보 같고 한심합니다. 왜 더 멀리 보지 못하고 더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지, 왜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 끝내 나를 괴롭히는 결정을 하는 건지, 왜 나는 고작 한 명뿐인 건지 속상합니다. 저를 말려줄 한 사람이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랑 따위는 지긋지긋하고 구역질이 나다가도, 이래서 나와 다른, 그러나 똑같이 불완전한 누군가가 필요한 건가. 그런 생각에 이르고 맙니다.


꿈과 사랑. 그것들은 어떤 색에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요. 어떤 질감에 얼마큼의 무게를 갖고 있을까요. 어떤 냄새가 날까요. 제 삶은 얼마나 더 먼 길을 원하는 걸까요. 못나게 울고 있는 나를, 조금 더 철이 든 내가 바라보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많은 나를, 조금 더 용감한 내가 안아줍니다. 나를 믿지 못하는 나를, 누구보다 나를 믿는 내가 지지합니다. 수많은 '나'들이 잠을 아껴가며, 몇날며칠을 부은 눈으로 토론을 벌입니다. 내 인생의 행방을 놓고 평생의 데이터들과 온갖 추측, 루머와 설전이 오갑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이릅니다. 조금 더 설레는 쪽으로 가 보기로 말입니다. 다소 위험이 따르더라도 더 원하는 쪽으로 가기로 말입니다. 백 명의 나만큼, 이백 명의 나만큼 용기를 내 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약속합니다. 혹시 어딘가 무너지고 고장나더라도, 반드시 수습하기로요.


저녁 님의 6개월은 어떤 시간이었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저와 제법 근거리에 살았던 그 시기가 특히나요. 하늘은 푸르고 마음은 붉고 앞은 노랬던, 연일 비가 퍼붓고 무언가 넘치고 무너졌던 여름이 인사를 보냅니다. 시간이 익어 더 깊고 진해질 가을의 공기는, 퍽 가볍고 차가웠으면 좋겠습니다. 한 시절 뜨거웠던 모든 것들이 그런 식으로 위로를 받으면 좋겠습니다.


답장이나 재주문은 nonamebookstore@naver.com 혹은 늘 그랬듯 카카오톡으로 문의 주시면 됩니다. 저녁 님의 일상이 평온하고 안전하기를 바라며.


-데굴데굴, 열심히 구르고 있는 책방지기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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