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란 Sep 04. 2023

13. 현 님에게

이름없는 중고책방 열세 번째 손님께

안녕하세요, 현 님. 편지 서두에 늘 하는 인사이지만, 오늘은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에 오래 머물러 봅니다. 상대의 안녕을 묻는 데에는 안녕을 바라는 마음도 함께 있는 듯합니다. 잘 지내셨나요? 오늘부터 또 며칠간은 비가 온다고 하네요. 여름에도 비 오는 날이 참 많았는데, 그때 못다 내린 비가 있나 봅니다.


현 님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날이 많으신가요, 자차를 이용하는 날이 많으신가요? 저는 몇 년 동안은 대중교통을 이용한 날이 없다가, 최근에는 제법 자주 버스를 타곤 합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 누가 있든 인사를 건넵니다. 대체로 놀라다가도 웃으며 인사를 받고 돌려주지만, 어떤 이는 찡그린 얼굴을 유지한 채 똑같이 버스를 기다리지요. 그럴 때면 그 사람의 이마나 콧잔등의 주름 사이로 제 인사가 끼어, 빠지지도 못한 채 저를 원망하는 것 같습니다. ‘야! 그러니까 사람 봐 가면서 인사를 해야지. 나 좀 꺼내 줘!’ 버스에 오를 때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기사님은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시고, 어떤 기사님은 시선도 주지 않으시죠.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돌려받고자 하는 인사가 아니니까요.


그런데도 신기한 게, 며칠 전에는 좀 짜증이 나더라고요. 내 인사를 안 받은 것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후에 한 학생 무리가 탔었거든요. 특이하게도 전부 각자 현금을 내고 탔는데, 한 학생이 거스름돈을 덜 받았나 봐요. 100원이 모자란다고 얘기했는데, 기사님이 “여기 있잖아, 여기.” 하면서 짜증을 내는 거예요. 거 참 못 볼 수도 있지….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는 ‘저 사람은 여유가 없는가 보다’ 하지만, 그날은 어쩐지 덩달아 짜증이 났어요. 학생들은 저보다 먼저 내렸는데, 내릴 때 또 다 같이 인사를 하더라고요. “고맙습니다” 하고요. ‘그래봤자 받겠냐고’ 했는데, 기사님이 “어, 그래, 잘 가.” 하면서 또 무뚝뚝하게 인사를 받는 거예요. 충격이었어요. 역시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구나. 깨달음을 얻었죠. 볼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는 아주 밝게 인사를 받아주는 기사님을 만났어요. 기분이 갑자기 좋아지면서, 한 시간 안에 기분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신기했어요. 버스 하나 갈아탄 게 다인데 말이에요. 인사에는 힘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세상은 복잡한 게 분명하고요. 제 인사가 좀 길었죠?


북토크에 가서 엉엉 울고 사인까지 받아 온 책. 그 책을 이제 보내 드립니다. 북토크에서 저자의 이야기를 말로 전해 들을 때는 요동치며 올라왔던 감정이, 책을 읽으면서는 차분하게 일렁이며 물결쳤어요. 많은 사람을 떠올렸고, 다양한 감정을 마주했고, 그리운 이를 추모했습니다. 책에 스콧 펙 이야기가 종종 나오더라고요. 스콧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오래전에 사 두고 고작 한두 장 읽고 말았는데, 조만간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책에는 저자 이름이 ‘스캇 펙’으로 되어 있어요). 그 책의 첫 문장이 ‘삶은 고해苦海다.’ 예요. 거기에 꽂혀서 산 거고, 그 문장 하나로도 충분한 위로를 얻었었습니다. 그걸 인정하고 나니 훨씬 편안하더라고요. 생각에서 오는 고통도 줄어들고요. 또 『연결된 고통』 책 띠지에 ‘이길보라 감독·장일호 기자 추천’이라고 쓰여 있잖아요? 이길보라 감독 북토크도 다녀왔고, 장일호 기자 책도 집에 한 권 있는데, 이게 뭐라고 이런 것도 반가웠어요. 고통처럼 세계도 연결되어 있고, 나도 그 연결의 어느 지점에 있는 것 같았거든요.


저는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내일 밤부터 일주일에 한 번, 베트남 출신의 결혼 이민 여성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예정입니다. 이혼 상태로 장애가 있는 아들을 홀로 키우면서 일용직으로 생활을 이어가는 분인데, 아들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국적 취득을 하지 못하면 강제추방 당한다고 합니다. 아들은 이혼한 남편의 주소지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그게 이혼 조건이었다니 가슴이 무너지지 않나요), 그녀와 아들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습니다. 가리봉동의 진료실에서도 진단할 수 없는 그녀의 고통은 얼마큼일까요. 제 코가 석 자인지라 미팅 당일까지도 무르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었는데(내가 원해서 시청에 전화해서 나 봉사활동 하고 싶은데 연결 좀 해 달라고 했으면서 말이에요), 회의실로 들어오는 그분의 미소를 보자마자 무를 수 없음을 직감했습니다. 어쩐 일인지 왈칵 눈물이 터질 것 같았거든요. 이기병 작가의 북토크에서 울음이 터졌던 이유와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저마다의 이유로 한국에 와서 이방인으로 살다가 나를 만난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는 모종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많이 아플 텐데도 티를 내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환하게 웃습니다. 밝음만큼 그림자는 어두울 텐데, 그런 것은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기 마련입니다. 게으름을 핑계로 쿠마르 씨를 만나지 않았던 어느 주말 오후. 그다음 주말에 죽어버린 쿠마르 씨. 내 삶에 오랫동안 드리워졌던 그림자. 어쩌면 그걸 알기에, 어떤 의지에 불타 봉사활동을 신청해 놓고도 도망가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에 큰 비중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마주하지 않으면 그 고통을 나눌 일도, 책임질 일도 없으니까요. 그녀의 초등학생 아들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게 아니라도 그녀가 국적을 취득할 때까지 그녀의 선생님이 될 마음 그릇이 내게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녀의 인생을 외면할 자신도 이제는 없고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엉성하게 끼어 내 작은 그릇을 보며 동동거리는 스스로가 안쓰럽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 자신의 안쓰러움을 놓지 못하는 작은 인간이 저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은 그의 피부를 벗어나지 못하니까요. 나에게는 아직도 내 고통만이 실재로 느껴집니다.


줄곧 우느라 마스크 안은 이미 축축하고 아직도 콧물이 흐르는 와중에, 그런 저를 앞에 두고 저자가 손으로 꾹꾹 눌러 썼던 글을 다시 읽어 봅니다. ‘정란 님께. 우리가 연결될수록 고통은 줄어듭니다. 감사와 응원!을 보내며. 2023. 3. 이기병 드림’ 그래서 저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끌어 모아 계속 가 보기로 합니다. 우리가 연결될수록 고통은 줄어들 거라고, 그 연결이 때로 저를 살리기도 할 거라고 믿어 봅니다. 내가 절망과 고통 속에 있을 때 누군가 바라는 것 없이 내 손을 잡아 주었듯, 나도 마땅히 누군가에게 감히 그런 사람이 되어 보기로 합니다. 힘이 세지 않더라도, 손이 크지 않더라도, 그 사람에게 환한 미소 정도는 줄 수 있는 사람인 걸 알았으니까요. 그녀가 제게 오며 그렇게 웃었으니까요.


오늘 저녁에는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의 가게로 가서 떡만둣국을 먹기로 했습니다. 인생의 가장 깊은 고통 속에 있을 때 묵묵히 옆을 지켜주었던, 말을 보태는 대신 마음을 다잡아 주었던, 언제나 저를 믿고 기다려주는 두 사람. 아버지와 마주 보고 앉아 어머니가 끓여주는 떡만둣국을 먹는 일은 가슴 맨 아래까지 따뜻해지는 일입니다. 삶에 이렇다 할 고비가 없다고 여기며 살았던 것은, 늘 울타리처럼 곁에 서 있었던 사람들 덕분일 것입니다. 다정한 친구들, 마음이 깊은 선생님들, 보살펴 준 이웃들, 재능 있는 동료들, 사랑을 알려준 연인과, 그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훌륭한 가족. 그리고 스스로 그 연결을 끊고 시작된 불행과 고통. 그러니 때때로 떡만둣국을 먹는 것은 다시 손을 잡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과 만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다시 연결하고, 마음을 나누고, 누군가의 누군가가 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못다 내린 여름비가 마음껏 내리고 난 후, 진짜 가을이 성큼 다가오겠죠?

가을은 짧을 거예요.

인생도 아주 찰나일 테고요.


그러니 우리,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연들을 부지런히 관찰하기로 해요.

색이 변하는 나뭇잎을 보듯, 흘러가는 구름을 보듯, 스치는 반짝임을 보듯이 말이에요.


답장이나 재주문은 

nonamebookstore@naver.com

이렇게 연결되어 반가웠어요.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책방지기 드림



이전 12화 12. 저녁 님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