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란 Oct 21. 2023

15. 혁오 님에게

이름없는 중고책방 열네 번째 손님께

안녕하세요, 혁오 님!


첫 줄을 쓰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요즘 저는 대화 포화 상태입니다. 한때는 1일대화총량을 채우지 못해 오픈채팅으로 통화를 하곤 했는데, 요즘은 거의 모든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냅니다. 들어줄 이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사유의 시간은 꼭 그만큼 줄고 맙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고요한 시간을 늘려야 할까요? 영원한 것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명제뿐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모든 말을 들어주는 이와 저 사이의 뜨거운 대화 열기도 언젠가는 식고 말겠지요. 서운하거나 실망스럽지는 않습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정도의 온기, 포개어져 안고 있는 정도의 온기, 모든 걸 설명하지 않아도 때로 알아차리는 눈빛 정도의 온기만 있어도 충분하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그 온도에 도달하기 위해 뜨거운 시절을 보내는 건지도 모릅니다.


‘자기만의 세계가 없는 사람에게, 자기계발서가 아닌 인문학 책 추천 부탁드립니다’

가지고 있는 책은 대부분 문학이고 인문서는 그다음의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중에서도 ‘자기만의 세계가 없는 사람에게’라는 조건이 붙으니 고르기가 제법 신중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고른 책은 ‘The School of Life(인생학교)’의 『인생 직업』입니다. 알랭 드 보통이 설립한 학교로, 직업 외에도 다양한 시리즈가 있어요.  『인생 직업』은 아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읽었던 책일 거예요. 저에게는 오래 만난 연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조금 시니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언덕 위, 햇볕이 조금 비껴 난 곳에서 시원하게 바람을 맞는 나무 한 그루 같은 사람이었거든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몰랐을 거예요. 그는 햇볕도 바람도 모두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요. 저는 지금도 자신해요. 적어도 지금까지는, 제가 그의 따뜻한 면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라는 걸요. 그런 그가 저에게 제안했었습니다. “란이도 공무원 하면 좋겠다. 부부 공무원이 되어서 함께 저녁 있는 삶을 살자. 주말에는 같이 등산도 가고 여행도 가고.”


저는 중학생 때부터 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관련 학과에 진학해 자격을 얻었지만, 결론적으로 지금 교사는 아닙니다. 곧은길을 걷다가 아주 예쁜 오솔길 하나를 발견했거든요. 여린 잎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솔바람이 부는, 나무 밑동에는 다람쥐의 은신처가 있는, 아주 예쁜 오솔길이었어요. 저는 스리랑카에서 2년 동안 한국어교사로 일했습니다. 그 일이 저를 작가로도 만들어 주었고요. 누군가 저를 ‘작가님’이라 부르면 저는 손사래를 치며 ‘저자일 뿐’이라고 했었지만, 이제는 아무렴 어떤가 싶어요. 글을 쓰는 동안에는 누구나 작가가 아닌가요? 이런, 또 잠시 샛길로 빠졌었네요. 하지만 행정직 공무원은 저와는 너무 동떨어진 삶 같았어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래도! 제가 누군가요? 그때의 저에게 그보다 소중한 건 없었습니다. 그와 함께라면, 하는 일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오로지 함께 보낼 저녁, 행복한 주말만을 생각했죠. 그런데 이상하게, 공부가 잘 되어도 기쁘지 않고, 되려 시험 성적이 잘 나올까 봐 불안한 거예요. ‘합격하면 어떡하지’ 그러다 공부도 손 놓아 버렸죠. 그때 샀던 책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 걸까?’ 끝까지 읽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혁오 님께 보내려고 책을 살피다 밑줄까지 그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의 나, 꽤 진지했구나’ 다시 읽으니 확실히 나 자신을 아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인생 직업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어도, 나 자신을 살피고 돌보는 데 도움을 줄 거예요. 혁오 님이 혁오 님의 세계를 찾고, 가장 혁오 님다운 곳에서 신나게 뛰어놀면 좋겠습니다.


단단한 마음과 부드러운 심성을 가진 나무 같은 그는 금방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어요. 똑똑하고 성실하고 바른 사람이었거든요. 그는 곧 7급 공무원이 됩니다. 그가 공무원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어요. 평생을 대기업에 다녔던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했었죠. 하지만 막상 공무원이 된 그에게 저녁은 그리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야근과 특근과 당직, 수많은 업무가 있었거든요. 공무원이 된 그는 세상 모든 것에 영향을 받는 사람 같았습니다. 비가 많이 와도, 눈이 많이 와도 출근을 해야 했어요. 태극기를 달기 위해 출근하고, 태극기를 내리기 위해 출근했죠. 그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지만 늘 코로나에 묶여 있었고, 맞고 싶지 않은 백신도 맞아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아시나요? 그는, 공무원이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답니다. 자신의 역할을 하며 보람을 느끼고, 또 성실히 내일로 나아가는 그는 아주 근사했어요. 일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지만, 그는 자신도 동료도 놓지 않는 씩씩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곁에 있는 작은 꽃 같았던 저는, 아시다시피 동네 책방의 책방지기가 되었습니다. 원목 가구가 아주 많은 책방에, 나무로 만든 책들을 진열하고 사람들을 만나죠. 글쓰기 수업을 하고 독서모임도 열 거예요. 그렇다면 저는 학창 시절부터 품어왔던 꿈이자, 실은 한 번도 놓은 적은 없었던 선생으로서의 꿈도 이룰 수 있겠네요(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멈춘 적이 없거든요). 어른이 되면 어릴 때 좋아하던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 거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드디어, 비로소, 책방지기가 되었으니 파티를 열어야 할 일이 아닌가요? 언젠가 제 책방에 들러 주세요. 우리, 조용한 파티를 열어요.


한때 나의 세계였던 그는 제가 천천히 제 꿈에 다가올 수 있도록 보여주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묵묵히 걸어가는 이의 근사한 앞모습과 든든한 뒷모습을요. 저는 언덕 위에 고고하게 서 있는 커다란 나무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새 나무를 심습니다.


제가 보내드리는 책이 혁오 님이 나무를 심는 데, 꽃을 피우는 데, 혁오 님만의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데 좋은 거름이 되길 바랍니다.


추신.

제 사랑하는 강아지 하리가 책 표지의 일부를 시원하게 찢어 놓고, 모서리 한쪽을 열심히 씹어 두었습니다. 외출 후 돌아왔을 때, 처참한 상태에 놓여 있던 책이 비단 이것 하나만은 아닙니다. 우드스틱을 좋아하는 아이답게, 나무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은 모양입니다. 지금은 같이 살고 있지 않아, 이런 흔적조차 저에게는 너무 소중합니다. 보내고 싶지 않을 정도로요.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이 책을 드립니다. 그러니 부디, 훼손된 책의 일부를 애틋하게 봐 주시기를…. 읽을 당시에 붙였던 포스트잇, 그어 놓았던 밑줄도 모두 함께 보냅니다. 이름없는 중고책방의 마지막 손님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신2.

저는 하리를 꼭 다시 만날 거예요. 마당 있는 집에서 하리쿠키와 함께, 봄날의 햇살을 맞으며 온종일 뒹굴 거랍니다.


-이름 있는 책방의 주인이 된 책방지기로부터



이전 14화 14. 손님 여러분에게 안내 말씀 드립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