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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Mar 28. 2023

7. 승우에게

이름없는 중고책방 일곱 번째 손님께


안녕, 승우.


새해가 오기 전에 네게 책과 편지를 보내려고 했는데, 내 게으름이 단풍보다 함박눈보다 힘이 셌나 봐. 그래도 좋은 봄날에 네게 선물을 보낼 수 있어 다행이야. 그러니까 이게 왜 '선물'인지 궁금할 테지? 네게 보내기 위해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어. 나는 이 책을, 이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고 있다는 걸. 처음에 네가 이 책을 보내달라 했을 때도, 기억나? 이 책만은 보내고 싶지 않다고 했었잖아. 그러자 너는 네가 새 책을 사서라도 읽겠다고 했었고, 나는 이름없는 중고책방의 존재 이유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이 책을 보내겠다 했었어.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읽은 이래로 두 번째로 다시 읽었고(전체를 낭독으로 읽었어), 나는 더 깊게 후회했지. 팔지 말걸.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내어 다시 한 번 더 읽었어. 이대로는 보낼 수 없을 만큼 이 이야기를 사랑했거든. 이 정도면 생이별 아니냐고. 이 책 읽고 나한테 다시 돌려줘야 할 것 같은 느낌 아니냐고.


그런데, 이젠 잘 보내기로 했어. 왜냐하면 이 책을 이렇게 사랑하게 된 데는 네 역할도 있었으니까. 네가 만들어준 이별, 네가 정해준 끝이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가 생명을 얻었잖아. 책꽂이에서 녹지 않는 눈 아래 있다가, 이제야 봄을 찾았잖아. 미아마스나 동화에 우연이라는 건 없대. 전부 다 필연이래. 우리가 만나서 실없는 대화를 나눴던 것도, 네가 김애란 작가의 책을 주문한 것도,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을 재주문한 것도, 놀라운 필연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근사하지 않아? 실제로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우리가 책과 편지로 벌써 몇 계절을 함께, 또 따로 보내고 있으니까 말이야.


내 첫 편지를 받았을 때 너는 술에 취해 있었다고 했지. 그래서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웃음을 터뜨렸고, 눈을 부릅뜨며 내용을 곱씹어 다시 읽었다고 했었어. 내 편지만큼 네게 보냈던 책도, 너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주었을까? 이 책은 네게 분명히 그걸 줄 거야. 엘사도, 울프하트도, 워스도, 브릿마리도. 끝내 이름이 나오지 않는 사랑스럽고 놀라운 할머니까지 말이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 나, 작년 여름에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멋지고 아름다운 할머니들을 만났어. 태어나 처음 가 본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처음 먹는 음식을 먹으며, 할머니들과 많이 웃었어. 지나고 생각해 보니 정말 놀랍고 근사한 일이야. 대학생 때 할머니가 죽고 나서, 내게 다시 할머니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거든. 할머니들은 내가 가면 늘 두 팔 벌려 안아주셨어. 고추도 따 주시고, 고구마도 주시고, 분홍색 보자기에 채소들을 잔뜩 챙겨 주셨어. 새 신발이 낯설어 발뒤꿈치가 까지면 각 할머니들은 당신이 가진 가장 편한 신발을 내어주셨고, 밴드를 두 통이나 찾아서 갖고 오셨어. 가자미를 구워주셨고, 고추잠자리를 잡아주셨어. 만날 때마다 더 예뻐졌다 해 주셨고, 어김없이 안아주셨어. 이거야말로 정말 동화 같지 않아?


삶이 좀 누추할 때, 저기쯤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 달려갔는데 그게 사실 빛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그럴 때 말이야. 그럴 때는 동화가 힘이 돼. 나 책 좋아하는 거 알지. 아마 동화 덕분일 거야. 어릴 때부터 줄곧 내게 빛이었던 이야기들. 어른이 되고는 할미전이 내게 그런 멋진 동화였어. 아, 정말 보내기 아쉽다. 하지만 네게 가서 제 역할을 다하길 또 기대하고 있어. 이 책, 내가 몇 년 동안 해외에 살다 귀국했을 때, 남자친구가 선물해 준 책이야. 깜짝 선물이었고, 나는 표지와 제목만 보고도 이미 반해서 폴짝폴짝 뛰었었어. 두께에 겁먹고 한동안은 읽지 않다가 어느 날 읽기 시작했고, 멈추지 못했지. 나는 그때보다 지금 이 책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때 내가 받았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구름 동물들이 데리고 가 버린 걸까, 미플로리스에 가 있는 걸까.


긴 시간, 내 편지와 책을 기다려 줘서 고마워. 기다림이 헛되지 않은 멋진 이야기를 함께 보낼게. 대체로 평범한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이야기들, 여섯 가지 왕국을 즐겁게 여행하길 바라. 작년 여름에 시골 마을에서 찍은 사진으로 엽서북을 세 개 만들었었어. 각각 테마가 달라. 하나는 '할머니', 하나는 '동물 친구들', 하나는 '알록달록'이야. 엽서 열여덟 장이 한 세트고, 하나에 16,000원이야.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건 각각 한 부씩이야. 나머지는 시골 마을의 사무실에 있거든. 혹 원하는 테마가 있거든 연락해 주면 보내줄게. 물론 파는 거야. 수익금은 전액 기부고. 어쩌면 정말 필연인 걸까.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에 나오는 어느 나라 말이야.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었던 나라. 내 엽서북의 수익금도 엘사가 태어나던 해에 쓰나미로 피해를 입었던 나라를 국적으로 한 외국인 노동자에게 기부되거든. 내가 읽는 책, 내가 쓴 글에 더해 내가 찍은 사진까지 네게 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 내 여름의 동화가 담긴.


생각난 김에 엽서 한 장을 골라 네게 선물로 보낼게.


이름도 없고 기약도 없는 이상한 중고책방. 그 책방에서 두 번째 기다림을 주문하고, 두 번째 추억을 구매한 당신. 대체로 평범한 당신에게 이름도 기약도 없는 멋진 행복이 찾아가길 바랄게.


-당신이 있어 조금 더 즐거운 책방지기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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