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 중고책방 세 번째 손님께
안녕하세요, 승우 님.
오늘은 처서입니다. 24개의 절기 중 벌써 14번째 절기네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니, 어쩐지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해마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가을만 기다렸던 것 같은데, 어쩐지 이번 여름은 이대로 보내기가 아쉽습니다. 이 여름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가을이 아주 짧음을 다년간의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일까요. 시간이 흐르는 건 때로 아쉬움을 동반하지만, 그것이 자연의 흐름이라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됩니다.
편지를 쓰기 전, 승우 님의 입금일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7월 21일에 입금을 하셨더라고요. 순차적으로 책을 읽고 편지를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늦어졌습니다만, 한 달이라니 제가 너무했나 싶었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던 날도 떠오르고요. 승우 님의 책을 가방에 넣어둔 채 새로 나온 책들을 탐험하고 있었으니, 그때 그 전화는 마치 다정한 독촉장 같았습니다. 8월이 힘들 것 같다고, 8월에 꼭 책과 편지를 받고 싶다고 하셨었는데, 다행히 8월이 가기 전에 책을 드릴 수 있어 감사하네요. 물론, 예상이 크게 엇나가 2022년 8월이 승우 님에게 그렇게 힘든 달이 아니었다면 더 좋겠지만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저는 그럭저럭 괜찮은, 하지만 아주 괜찮지는 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생이 苦임을 감안하면, '그럭저럭'은 매우 긍정의 영역에 속하는 말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한 달 동안 김애란 작가의 『침이 고인다』는 때때로 위로가 되고, 재미가 되고, 응원이 되고, 또 다른 약속이 되었습니다. 이름도 없는 이 중고 책방을 운영하면서, 저에게는 낭독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속도는 훨씬 느려지지만, 그러는 동안 단어와 문장이 더 천천히 스미어 오래도록 남습니다. 이 중고 책방의 기획 의도(?)와도 매우 잘 어울리는군요. 『침이 고인다』의 단편 몇 개를 여러 사람과 함께 읽었습니다. 그들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책을 읽다 함께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이 책이 궁금하다 했고, 저는 몇 번이나 책 제목을 알려줘야 했답니다. 승우 님도 여유가 되신다면, 각오가 서신다면 소리 내어 책을 읽어 보세요. 저처럼 낭독중독자가 되는 것도, 가을에 어울리는 재미있는 사건일 거예요.
주의사항: 책 표지를 벗겨내지 마시오.
저는 책을 읽을 때 표지를 벗겨내고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집에 돌아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휴식하듯, 책도 가장 가볍고 편안한 상태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죠(네, 사실 거치적거려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위해 표지를 벗겨냈을 때, 저는 당혹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미리 책의 훼손 가능성에 대해 안내드렸다고 해도, 이 지경의 책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사랑스러운, 함께 산 지 4년이 넘은 강아지가 있습니다. 몰티즈 믹스이고, 추정 나이는 5세 정도입니다. 이름은 '하리'입니다. 호기심이 아주 많고, 매번 기상천외한 장난을 치는 무척 창의적인 강아지죠. 때로 하리를 혼자 두고 집을 비울 때가 있는데, 사건이 생긴 건 몇 년 전입니다. 책을 바닥에 진열해두던 때였고, 하리가 책을 씹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때였죠. 물론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강아지들은 아이라이너를 씹어 먹을 수 있고, 주사기를 삼킬 수 있고, 신라면을 뜯어 먹을 수 있으며, 사료 봉지에 구멍을 내 3일 치 식사량을 한 끼에 충족할 수 있다는 걸요.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의 양장본 표지는 처참히 분리되어 이미 이 세상에 표지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알랭 드 보통의 『인생 직업』은 겉표지 일부가 처참히 찢어져 차콜색 속표지가 수줍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니 『침이 고인다』는 겉표지를 벗겨내기 전까지, 어쩌면 아주 양호한 상태의 책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세 살 정도 될까 말까 했을 하리는, 저를 기다리며(어쩌면 사고를 다 칠 때까지는 제가 돌아오지 않기를 기다리며) 열심히 책의 기둥을 씹었을 것입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앞면과 뒷면의 균형을 추구하면서요. 제 기억이 맞다면 승우 님은 강아지를 좋아하셨습니다. 사정상 키우지 못하지만, 강아지를 좋아한다고 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니 이 책이 강아지는 아니더라도, 승우 님 인생 어느 한 부분에 '강아지의 흔적'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똘이와 또미와의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선물 같은 흔적이요. 라고 말해 봅니다. 조금 구차했나요. 하지만 어쩌면 하리가 아니었다면 덧붙이지 못했을 이 이야기마저, 저에게는 몹시 소중합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오히려 기쁘기도 하고요. 하리는 지금도 제 옆에서 엉덩이를 들이밀며 자고 있습니다. 이제는 책을 뜯지 않는 어엿한 다섯 살이 되었으나, 저는 집을 비울 때 하리를 켄넬에 넣어둔답니다. 역시 강아지는 믿을 수가 없어요(웃음).
김애란 작가를 알게 된 건 대학교에서였습니다. 『침이 고인다』는 당시 어느 시간강사 선생님의 추천 도서였고, 저는 그분의 추천도서 목록을 하나씩 섭렵하던 때였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감탄했으며, 이후로 김애란 작가의 신작이 나오면 부지런히 사서 읽었습니다. 한동안 에세이나 인문서를 주로 읽었기에 오랜만에 소설을 읽는 것이 낯설었습니다. 소설과 제가 얼마나 멀어졌는지 깨달으며 놀랐고요. 단편 하나가 끝나자 낭독을 들은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이렇게 끝인가요? 좀 애매하네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제가 왜 소설을 좋아했었고, 왜 이제는 조금 멀어졌는지요.
"재미있지 않나요?"
"네. 재미있는데,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꼭 어떤 의미를 파악하거나 교훈을 얻지 못해도, 소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요. 살다 보면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귀 기울여 듣는 때가 많이 없잖아요. 내가 할 말을 떠올리기도 하고, 중간에 다른 데로 새기도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소설에는 내 이야기와 욕심이 끼어들 수 없으니 경청하게 돼요. 몰랐던 인물을 만나고 몰랐던 세상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어요."
"와, 정말 그러네요."
아는 단어인데, 소설 속에서는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가령 '나는 체르니를 배우고 싶기보단 체르니란 말이 갖고 싶었다' 이런 것 말이에요. 소설이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소설의 묘미니까요. 혹시 책을 다 읽고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면, 기회가 된다면 제게도 말씀해 주세요. 감상을 나누는 건 몹시 즐거운 독후 활동이니까요. 이전 손님에게 쓴 편지에 '질투'가 난다 하셨었지요. 반말로 편지를 쓸 수는 없지만, 마찬가지로 시 한 편을 함께 보내드립니다. 기형도 시인의 「빈집」인데, 책에 수록된 단편 「네모난 자리들」에 나오는 시예요. 소설에 두식 선배가 좋아했던 시의 마지막 구절이 등장하거든요.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땅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립니다. 빗방울은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는군요. 우리는 어디에 떨어져 어떤 소리를 내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기분 좋은 생각이 드는 아침입니다. 승우 님께 8월이 너무 고되지 않았길, 가을의 시작에 책과 편지가 따뜻한 응원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에 갇힌 사랑들이 가을 바람을 느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