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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Oct 21. 2023

1. 빵야 님에게

이름없는 중고책방 첫 번째 손님께

안녕하세요, 빵야 님.


책을 읽고 편지를 쓰는 동안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천천히, 모든 문장과 단어를 느끼며 책을 정독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올해 상반기는 유독 다사다난한 시기였습니다. 몇 년 동안의 내원 횟수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횟수 병원을 방문했고, 만날 일 없을 것 같았던 사람을 만났고, 새로운 도전을 몇 번 했고, 아주 간단히 성공해버리거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 막연히 믿었던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고, 그래서 웃음이 터지기도, 울음이 멎지 않기도 했습니다. 고작 봄이 가고 여름이 왔을 뿐인데 여덟 번의 계절을 보낸 기분입니다. 그리고 여름의 어느 날, 빵야 님 덕분에 또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책을 무척 좋아합니다. 어쩌면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 가장 좋아한 만화영화도 '옛날 옛적에'였어요. 은비까비, 배추도사 무도사가 나와서 전래동화를 들려주는 만화영화인데, 빵야 님도 아시려나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성이 좋았어요. 매번 텔레비전 앞에서 '오늘은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게 될까?' 설렜던 기억이 납니다.


사설이 길어졌군요(하지만 편지가 사설의 집합체라는 걸 생각하면, 사설은 단 한 마디도 없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집에 책이 참 많고, 그중에는 아주 좋아하는 책도 있지만 사 놓고 읽지 않은 책들도 있답니다. 그래서 이사를 앞두고 소중한 책들을 판매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체력은 줄고 책의 무게는 늘어가니, 이렇게 하는 편이 저에게도 책에게도 더 좋을 것 같았거든요. 제가 책이라면, 자신을 방치하는 옛 주인보다 자신을 새로이 궁금해해줄 새 주인을 만나고 싶을 것 같았거든요. 빵야 님께서 제가 정말 아끼는 이 책을 사겠다 선뜻 연락해 주셨을 때는, 그래서 반가우면서도 섭섭한 마음이 들었답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깨달았습니다. 이 책이 빵야 님께 가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저와의 이별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책을 사랑하며, 모든 문장과 단어를 곱씹으며 읽을 수 있다는 것을요. 빵야 님께서 연락 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제 인생길에 든든한 벗이 되어줬던 이 책을, 또 언제 펼쳤을지 모르니까요.


이 책은 2015년 봄이 오기 전, 제가 무척 사랑하는 어느 분께서 선물해 주신 책입니다. 그때 저는 적도 부근의 뜨거운 나라에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고, 한국어로 쓰인 책을 읽으려면 문짝도 없는 고물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넘게 달려 수도로 갔어야 했어요. 파견된 다른 단원들에 비하면 아주 가까운 거리였지만, 가슴 설레게 할 이야기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기에 그리 고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품에 가득 책을 안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곤 했답니다. 그러니 소중한 분께서 보내주신 깨끗한 새 책은 그 무엇보다 커다란 선물이었습니다. 털털거리는 고물 버스 안에서, 학교에 출근해 짬짬이, 집에 돌아와 수박을 퍼먹으면서, 잠들기 전 천장의 팬 아래서, 도마뱀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저는 이 책을 읽었습니다. 귀국해서도 한 번 더 읽었고, 그리고 어제 세 번째로 이 책을 읽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건지, 어떻게 살아야 진정 행복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삶을 살아가는 건 오롯이 나 자신이고, 그렇기에 누군가의 선택보다 내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에도 쓰여있듯, 내가 한 선택을 옳은 선택으로 만들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이 책이 빵야 님께는 어떤 의미가 될까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책 한 권의 무게만큼, 우리 만남의 무게만큼의 의미로는 남았으면 합니다. 아! 책을 더 재미있게 읽는 방법을 알아내서 알려드립니다. 이 책은 누군가에게 읽어 주기에 더할 나위 없는 책이었습니다. 저자가 말하듯 풀어낸 글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하듯 읽어주었을 때 전달이 잘 되더라고요. 제가 화자인 동시에 청자가 되니 내용도 더 오래 기억에 남았고요. 소중한 누군가가 있다면 함께 읽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날이 부쩍 더워지고 있습니다. 그늘에 앉아 있어도 여름의 열기가 치고 들어와 뺨을 달구어 놓아요. 공차에 '초당옥수수+펄' 메뉴가 있는데, 단 음료를 좋아하신다면 드셔 보시는 것을 추천드려요. 김치찜을 한껏 배불리 먹고 후식으로 먹은 건데, 배가 부른데도 남길 수 없는 행복의 맛이었답니다.


어디에선가 ‘행복은 아주 눈 밝은 사람만이 찾을 수 있다’는 글을 읽은 적 있어요. 행복은 아주 작기 때문이래요. 저는 공차의 초당옥수수 음료에서, 부드러운 마들렌과 고소한 우유 한 잔에서, 맑은 날 강아지와의 산책에서, 드라이브하면서 듣는 좋아하는 음악에서, 마음을 벅차게 하는 책을 읽으면서 그 행복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어제는 저녁을 과식하고 해가 떨어지는 걸 보며 운동장을 도는데 행복했어요. 폴 매카트니의 'Silly love songs'를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추면서 걷는데, 내가 사람이 아니라 음표가 된 기분이 들었거든요.


이왕 정답이 없는 거, 그게 답인지 아닌지 모른 채 일단 살아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때로는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그때 그게 행복이었던 것을, 그때 그게 최선이었던 것을, 최선이 아니어도 나쁘지 않은 차선이었음을 말이에요.


나이도 이름도 성별도 모르는 분이지만, 빵야 님과 제가 이렇게 살아 만나서 정말로 반갑고 감사합니다. 또 어떤 즐거운 일이 생길지 모르니, 저는 또 더 살아가 보려고 합니다. 저답게, 그리고 이왕이면 행복하게 말이에요. 뜨거운 여름을 무사히 보내고, 정해진 이별이 있는 우리의 삶을 잘 여행해 보아요. 아마 따뜻한 마음을 가지셨을 빵야 님을, 멀지만 가까운 어느 곳에서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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