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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Oct 26. 2022

2. 동영에게

이름없는 중고책방 두 번째 손님께

안녕, 동영!


왠지 '딩동!' 하고 포문을 열어야 할 것만 같은 이름이군. "딩동, 동영!" 이렇게 말이야. 놀랍게도 오늘은, 너에게 박웅현 작가의 『여덟 단어』를 읽어준 지 꼭 두 달째 되는 날이야. 책 한 권을 참 오래 붙들고 있었다 싶지만, 이번 초여름은 정말 바빴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가 있기도 했고, 돌아와서도 몇 번씩 다시 떠나기도 했었으니까. 그러는 사이에도 너에게 보낼 책만은 꼭 챙겨 다녔어. 버스 터미널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기차 안에서도, 바람 부는 어딘가에 드러누워서, 잔디밭에 앉아서 책을 읽었어. 나와 함께 여행을 다닌 셈이지. 그 사이 두 달이나 흘러 버렸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네. 시간은 정말 착실하게 흐르고 있구나. 우리를 늘 어딘가로 데려다 놓는 시간. 그 시간 안에서 너를 만나서 반가웠어.  좋은 글을 함께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건 정말 근사한 일이야.


어느 무료한 주말 오후였지. 진지하게 책을 읽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자꾸 웃음을 터뜨리는 네 덕에 나도 몇 번씩이나 웃었던 것 같아. 함께 읽으니 더 재미있더라. 더 이상 휴대폰은 전자파가 흐르는 차가운 기계만은 아닌가 봐.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수단이고, 헤어지고도 또 만나게 하니까.


정여울 작가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분이야. 작가 중에 내 진한 팬심을 담아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둘 있는데, 그중 한 분이 정여울 작가님. 스리랑카에서 2년을 살 때도, 정여울 작가가 쓴 칼럼만은 꾸준히 찾아 읽었었어. 프린트해서 틈틈이 읽으면서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지. 실제로 뵌 적은 없지만, 글로는 참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인 거야. 너에게 보내는 이 책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은 5년쯤 전에 읽고 다시 읽었어. 그때 밑줄 친 문장과는 또 다른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읽었겠지. 너에게도 밑줄 긋고 싶은 문장이 많은 책이면 좋겠다.


독서 중에 집중이 잘 안되거나 흥미를 잃어간다면, 그때 내가 네게 읽어줬듯 혼자서라도 낭독을 해 봐. 네가 너에게 읽어 주는 거야. 조금 어색하거나 서툴더라도 금세 익숙해질 거야. 그렇게 소리 내어 책을 읽다 보면 주변은 고요해지고 마음은 가라앉아. 고요한 물결 같은 마음에 어떤 문장들이 파동을 만들 거야. 뜨거운 여름, 더위도 잊는 즐거운 독서 시간을 보내길 바랄게.


책 이야기는 이쯤하고, 요즘 내 근황을 이야기해 볼까? 대단한 근황이랄 건 없지만, 실은 일상이 대게 그렇잖아. 삶이라는 게 구십구 퍼센트의 평범과 일 퍼센트의 특별함으로 이루어진 거니까. 나는 내일, 너에게 택배를 부친 후에 지리산이 보이는 어느 마을로 가. 그곳에서 찍은 사진들로 만든 엽서북을 팔고 올 거야. 판매 수익금은 모두 기부하기로 했어. 그래서 꼭, 아주 잘 팔렸으면 좋겠어. 전에도 톡으로 짧게 이야기한 적 있었지? 그런데 또 그 디데이가 이렇게 불쑥 코앞까지 찾아왔네. 혹시 누군가 정말로 시간에 날개를 달아 놓은 걸까? 아, 시간이 너무 빠르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들린다면 그건 분명 '후닥닥 부닥닥'일 거야.


요즘 오후 햇살은 너무 공격적이야. 실내에 찬 공기가 가득 차서 에어컨을 끄면 금세 열기가 차올라. 매미는 비명을 지르듯 세차게 울고, 어느 나무 앞을 지나갈 때는 귀가 따가울 지경이지. 한낮을 걷다 보면 두피가 지글지글 끓는 기분이야. 혹시 오후에 외출할 일이 있다면 모자나 양산을 꼭 챙기도록 해(이런 조언을 하지만 나는 두피를 지글지글 끓이며 맨몸으로 다니겠지). 하지만 이 여름도 곧 끝날 거라는 걸 알기에, 이 무자비한 더위의 계절도 마냥 미워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애틋하고 사랑스럽지. 맑고 밝은 하늘과 쨍한 초록의 나무들, 선명한 그림자, 고음질의 매미 소리, 풀벌레 소리. 한여름의 분수를 본 적 있어? 가장 높은 곳까지 떠올라 마침내 물방울이 햇빛과 잠깐 만나는 그 순간. 그 반짝임은 정말 찬란하고 아름다워. 내 생에 그 '잠깐'은 언제였을까? 앞으로는 몇 번이나 남아 있을까? 너에게 그런 '잠깐'은 언제였어? 


동영.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음으로 책을 들어주던 너. 공차 초당옥수수를 맛있게 마시던 너. 나를 믿고 선뜻 책값을 입금한 너.  훌쩍 여행을 떠나느라 몇 달을 잠적한 나를 계속 믿고 기다려준 너. 요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재미있게 보고 있니? 내 목소리랑 말투 박은빈 같다고 했던 거, 나 기분 너무 좋았었잖아. 아무튼! 여러모로 너에게 참 고마워. 잘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해. 물론 너를 잘 모르지만, 잘 모르는 그만큼의 정보로도 알 수 있으니까. 매일을 잘 일구어나가고 있을 사람이라는 거. 책의 내용을 인용해 네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 "어느 쪽으로 가도, 당신은 결국 당신이 원하는 곳에 언젠가는 도착할 것이므로." 우리, 어느 쪽으로 가도 결국 우리가 원하는 곳에 도착하자. 서로에게 멀리서 보내는 응원이 되자.


책에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라는 시가 언급돼. 양애경 시인의 시인데,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아. 내가 어제 찾아 읽었는데, 좋아서 편지 끝에 첨부할게. 책을 읽다 그 시 이야기가 나오면 내 편지를 꺼내 읽어 줘. 그렇게 우린 또 만나자.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나를 믿어줘서 고마워. 내가 책을 다시 읽는 동안 천천히 기다려줘서 고마워. 내게 즐겁고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 줘서 고마워. 늘 건강하고 자주 행복하길 바랄게.


-2022년 여름, 란






날마다 한치씩 가라앉을 때

주변의 모두가 의자째 나를 타고 앉으려고 한다고

나 외의 모든 사람에겐

웃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될 때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

눈이 스치는 곳곳에서

없는 무서운 얼굴들이 얼핏얼핏 보일 때

발바닥 우묵한 곳의 신경이

하루 종일 하이힐 굽에 버티느라 늘어나고

가방 속의 책이 점점 늘어나

소용없는 내 잡식성의 지식의 무게로

등을 굽게 할 때


나는 내 방에 들어와

바닥에 몸을 던지네

모든 짐을 풀고

모든 옷의 단추와 열쇠들을 끄르고 

한쪽 볼부터 발끝까지

캄캄한 속에서 천천히

바닥에 둘러붙네

몸의 둥근 선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온몸을 써서 나는 바닥을 잡네

바닥에 매달리네


땅이 나를 받아주네 

내일 아침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그녀가 나를 지그시 잡아주네


-양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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