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장(京橋莊)은 오래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그 공간에 도착하자 괜스레 긴장이 되어 옷매무새를 다시 고쳤다. 2층 집무실에 올라가자 당시에 선생이 앉았던 책상과 의자가 보였다. 창문에 권총알이 창 유리를 뚫고 지나간 구멍 2개가 보였다.
순간 내가 얼어붙었다. 일제로부터 독립국가를, 분단의 위기에 처한 한반도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몸과 마음을 바친 민족의 어른이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신 것이다.
김구 선생 흉상 / 동상(남산 백범 공원)
2층 집무실에 안내하는 여성분에게는 인사말도 못 건넸다. 다 돌아본 후 간신히 고맙다는 말만 하고 1층으로 내려왔다. 두 손을 공손히 모은 그분의 표정이 너무나 그 공간과 잘 어울렸다. 존재만으로도 김구 선생의 마음이 전해져 오는, 이심전심의 그런 경건한 분위기였다. 1층을 돌아본 후 어떤 관리하시는 분이 지하 1층에 전시실이 있다고 설명해 주셨다.
돈의문 역사관과 돈의문 박물관 마을을 돌아본 후 송월길을 가로질러 100m 정도 인접한 강북삼성의료원 내에 위치한 백범 김구 선생의 경교장으로 이동하였다. 강북삼성의료원 출입구 첫 건물에 응급실이 있어, 119 앰뷸런스 차량과 119 대원들이 분주히 드나들고 있었다. 경교장은 응급실 건물 바로 옆에 있다.
나의 소원(남산 백범 공원) / 환국 기념 (1945.11.3)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아래에 백범 광장 (白凡廣場,https://brunch.co.kr/@jylee2020/100 )이 있다. 올해 봄 남산의 백범 광장을 돌아보았었다.(2023.02.26 백범 김구 광장 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하셨다. 또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셨다.
경교장은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공간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역사적 현장이다. 서울시는 경교장을 복원하고 내부를 전시공간으로 조성하여 2013년 3월부터 공개해, 우리 근현대사를 알리는 소중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경교장 복원공사는 1949년 백범 김구 서거 이후 오랜 기간 대사관 및 병원시설로 사용되면서 변형된 내부 공간을 철거하고, 이 과정에서 옛 모습이 잘 남아있는 부분은 최대한 원형을 살렸다.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1938년 8월호)에 수록되어 있는 경교장 건축도면과 사진을 근거로 하여 복원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와 유물을 살펴볼 수 있다.
경교장 역사 / 경교장 1층 안내도
1938년 금광업자 최창학의 저택으로 건립되었다. 대지 396.69㎡, 연면적 지하 1층~지상 2층 945.45㎡규모다. 2005년 사적 제465호로 승격되었다.
1층 응접실 / 귀빈식당
지상 1층은 응접실, 관리인실, 사무실, 홀, 오리엔테이션실, 귀빈식당, 임시정부 선전부 활동공간등의 공간이 있다. 귀빈식당은 김구 선생이 서거했을 때 빈소로 사용되었다.
2층 집무실 책상과 의자 / 탄흔 2발 (책상과 의자의 왼쪽 창문)
2층 집무실 서거한 곳 / 조문과 서거 직후
지상 2층은 건축원형 전시실, 김구 침실, 김구 거실(집무실), 임시정부 요인 숙소 1과 2, 오토마타 체험실, 2층 응접실(서재)등의 공간이 있다. 집무실은 김구 선생이 서거한 장소다. 임시정부 당시의 경교장 원형을 재현해 놓았다.
지하 1층에는 3개의 전시실로 아래와 같이 구분되어 있다.
제1전시실 - 경교장의 역사
죽첨장 (竹添莊) 시기
1938년 죽첨정(竹添町, 오늘날 서대문구 충정로)에 금광업자 최창학(崔昌學, 1891~1959)의 저택으로 건립되어 죽첨장(竹添莊)으로 불렸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광산업으로 큰 부를 축적하였다.
경교장(京橋莊) 시기
194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해 경교장으로 입주하면서 임시정부 청사이자, 김구(金九, 1876~1949)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최창학 일가는 집을 비워주면서 가재도구의 일부를 경교장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가끔씩 방문하여 놓고 간 가구와 짐의 안부를 확인등 구실을 붙여 주거를 방해하였다고 전해진다. 선생은 근처에 있는 경구교라는 다리 이름에서 경교(京橋)라고 한국식으로 건축물 이름을 개명했다. 그만큼 일제의 잔재를 싫어했다.
훼손 및 복원기
1949년 선생이 경교장에서 서거한 후 중화민국대사관 사택과 월남대사관으로 사용되었고, 1968년 고려병원(강북삼성병원의 전신) 개원 후에는 병원시설로 사용되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이후 경교장을 복원·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2010년부터 복원하기 시작해 201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방되고 있다.
임시정부 시절 단란한 가정 모습 / 백범 일지와 인감도장
제2전시실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
1919년 3월 1일,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자주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총괄 지휘하였다. 1945년 광복 후 11월 23일과 12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입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경교장에서 활동하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제헌헌법 전문에는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는 사실을 명시했다. 국호(대한민국), 연호(대한민국), 국기(태극기) 애국가도 그대로 계승하였다. 속옷(팬티)에 쓰인 밀서는 당시의 상황을 잘 대변해 주었다.
환국기념 서명 / 그대들 돌아오시니 (정지용)
제3전시실 -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
임정요인들의 환국기념 서명이 있다. 그분들이 독립된 고국땅에서 서명하였을 때의 당시의 감격이 전해져 왔다. 1945년 11월 입국한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은 경교장에서 자주통일의 구체적인 방안을 완성하기 위한 국무위원회를 개최하면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추진하였다. 남북협상을 위하여 북으로 출발 당시 반대세력의 출발 방해를 피하기 위하여 지하실 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 모든 활동은 경교장에서 이루어졌다.
혈의 / 백범일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2층 응접실에서 대한민국 육군 소위이자 주한미군방첩대(CIC) 요원이었던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영웅은 그렇게 쓰러졌다. 백범의 피 묻은 겉저고리가 벽에 전시되어 있다. 총알 한 발이 좌측 팔부분을 찢으며 지나갔다.
포효하는 백범(남산 백범 공원) / 백범 연보
백범 김구 선생 일대기(백범 김구 광장)
남산 백범 공원에 있는 백범 동상옆 표지판에는 선생의 간략한 일대기가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김구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부친 김순영(金順永)과 모친 곽낙원(郭樂園)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9월 탐관오리의 척결과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외치며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으며 1896년 3월에는 변복(變服)한 일본인 중위를 살해하여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광무황제(光武皇帝)의 특명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1907년에는 독립지사들의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 만세 시위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한인애국단 등을 조직하고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주석을 역임한 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여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효창공원 백범 묘소 / 국장
백범 묘소 (효창공원, 2024.05.25 방문 참배)
백범 김구 기념관 (효창 공원)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오는 등 민족통일을 염원하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효창공원과 백범 김구 기념관 탐방 : https://brunch.co.kr/@jylee2020/172)되었으며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