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북쪽 방향으로 걸어서 내려왔다.백범 광장이다. 좌측(서쪽)에는 남산성곽이 있고 멀리 힐튼호텔이 보인다.
백범 광장 / 남산 성곽
남산이 올려다 보이는 공원이다. 1969년 백범 김구 서거 20주기를 맞이하여, 백범 출생일에 동상 제막식을 열었다. 넓은 잔디밭에 백범 김구선생상과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 동상이 있으며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신라의 명장 김유신장군상이 있다.
백범 김구선생 상(좌측 검은 대리석에 '나의 소원' 전문이 새겨져 있다)
1.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08.29~1949.06.26.) 선생
백범 김구 선생이 우뚝 서 계셨다. 광장 인근에 사시는 분인 듯 고양이 두 마리를 데리고 광장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다. 여학생 둘이서 주인의 허락을 얻고, 허리를 구부리고 냥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목줄도 없는 냥이가 주인을 따라다니는 아주 평화로운 광경이다.
귀염둥이 냥이 형제와 냥이 아빠
동상 앞 계단에 주인이 앉자 둘레를 빙빙 돌며 애교를 뜬다. 이런 평화를 후손들에게 주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애국선조들께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나의 소원 (백범 김구)
국어 교과서의 ‘나의 소원‘이 백범 김구 선생의 모든 것을 말해 준다. 동상 뒤편 좌측 검은 대리석에 그 전문이 새겨져 있다. (전체문은 하단 별첨 파일에 별도 저장)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하셨다. 또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셨다. 언제 시간이 나면 효창공원의 백범 묘소와 백범이 돌아가신 장소 경교장을 둘러보고 싶었다. 저서에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동상옆 표지판에는 선생의 간략한 일대기가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김구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부친 김순영(金順永)과 모친 곽낙원(郭樂園)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9월 탐관오리의 척결과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외치며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으며 1896년 3월에는 변복(變服)한 일본인 중위를 살해하여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광무황제(光武皇帝)의 특명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1907년에는 독립지사들의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 만세 시위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한인애국단 등을 조직하고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주석을 역임한 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여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오는 등 민족통일을 염원하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 https://brunch.co.kr/@jylee2020/124)에서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이시영 선생 동상(좌상) 옆에는 백호상이 있다. 배부분이 노란 노랑할미새(추정) 한 마리가 동상 주변을 돌다가 백호상 앞발에 있다가 머리 위를 이동하고 있어 카메라에 급히 담았다. 백호가 관대하게도 연약한 새에게 자기 몸을 내어주고 놀 수 있게 한다는 생각이 언 듯 들었다. 자신 가족보다 민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백범 김구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을 닮은 포효하는 백호다. 아래 글은 동상에 새겨진 내용을 옮겨 보았다.
이시영 선생은 대한제국 신진개화 관료로서 외교부 교섭국장, 한성재판소 소장, 평안남도 관찰사(평안감사)를 거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분이다. 서울 저동 13번지에서 백사 이항복의 10대 직계손으로 태어났다. 약관 17세부터 관직을 시작하였으며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피탄 당하자 형제 가족 40여 명과 중국으로 망명하여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을 진흥하고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였으며 법무총장, 재무총장으로 재직하며 1945년 해방 시까지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으며 광복 후 환국하여 신흥무관의 건학이념을 계승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1947년 성재학원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을 설립하였다.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51년 5월 9일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의하여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하였으며 시위소찬(尸位素餐)이라는 명구를 남기기도 하였다. (시위소찬은 자기 능력이나 분수에 맞지 않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이시영 선생 묘소 (수유동 선열 묘역, 출처 강북구청)
1953년 4월 17일 피난처인 부산 동래에서 85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전란중임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로 국민장 9일로 결정하였으며, 95년 정릉묘소에 안장되었다. 1964년 수유동 선열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국민에게 고함'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태욱 교수의 교실'로부터 인용함 )
“내 본래 무능한 중에도 모든 환경은 나로 하여금 더구나 무위 하게 만들어 이 이상 고위에 앉아 국록만 축낸다는 것은 첫째로 국가에 불충한 것이 되고, 둘째로는 국민에게 참괴(慙愧)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국가가 흥망(興亡) 간두(竿頭; 장대 끝)에 걸렸고 국민이 존몰(存沒) 단애(斷崖; 낭떠러지)에 달려 위기일발에 있건만 이것을 광정(匡正; 널리 바로잡음)하고 홍사(弘赦; 널리 구함)할 성충(誠忠)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동량지재(棟梁之材)가 별로 없음은 어쩐 까닭인가?
그러나 간혹 인재다운 인재가 있다 하되 양두구육(羊頭狗肉)인 가면을 쓴 애국위정자(愛國爲政者)들의 도량(跳梁; 거리낌 없이 날뜀)으로 말미암아 초야에 묻혀 비육(髀肉; 허벅지 살)의 탄식(비육지탄;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일을 못하여 살만 찌는 모습을 말함)을 자아내고 있는 현상에 유지자(有志者; 뜻이 있는 이)로서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뿐만 아니라 나는 정부수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관의 지위에 앉은 인재로서 그 적소에 등용된 것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 다가 탐관오리는 도비(都鄙; 서울과 지방)에 발호하여 국민의 신망을 상실케 하여 정부의 위신을 훼손하고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엄을 모독하니 이 어찌 신생 국민의 눈물겨운 일이 아니며,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마다 이것을 그르다 하되 고칠 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 잡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의 시비를 논하던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濁水) 오류(汚流)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