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義士)의 마지막 1년을 그린 뮤지컬 영화‘영웅’을 관람했다. 브런치에 ‘무릎이야기’ (2021.11.22.)에도 잠시 언급한 나의 영웅, 우리 모두의 영웅 이야기였다.
안중근 의사 좌상
2. 안중근(安重根) 의사 기념관
남산의 한양도성유적전시관을 둘러보고 아래로 내려갔다.좌측(서쪽) 낮은 터에 남산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다.태극기를 휘날리고 있는 안의사의 동상을 보고서야 이곳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안중근의사 동상을 기준으로 오른쪽 기념관 광장에는 안의사의 글씨와 그 유명한 왼손 약지 끝마디가 단지 된 손바닥 도장이 새겨진 십 여점 대형 표석들이 서 있었다. 옥중에서 쓴 유묵遺墨을 돌에 새겼다.
안타깝게도 일제가 유체를 비밀리에 처리하였다. 아직도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성역화되고 조선 독립의 핵심 기지가 될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현재 효창공원 삼의사와 안중근 의사 묘역에 가묘로 모시고 있다. (https://brunch.co.kr/@jylee2020/172 )
안중근 의사 친필 표석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고, 위기를 보면 목숨을 바쳐라)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와룡매
와룡매라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남산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임진왜란 때 창덕궁에 심어져 있던 홍백 매화를 왜군이자국의 어느 사찰 입구 좌우측에 옮겨 심었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사찰의 주지가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수많은 인명 살상에 대한 참회로 안중근의사숭모회에 매화 반환 제의를 하였다. 1999년 안의사 순국 89년을 맞아 400여 년 만에 그 후계목이 되돌아왔다는 사연의 매화나무였다.
안의사 동상을 기준으로왼쪽(서쪽) 약간 경사된 통로로 내려갔다. 반투명 박스형 건물인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다. 안의사의 글씨와 손바닥이 검은 대리석에 새겨진 벽면이 있는 유도 길을 따라 내려갔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제1전시실(지하 1층)로연결되어 있다. 4층 건물(지하 2층, 지상 2층)이다. 지하 2층(강당 200석), 지하 1층(제1전시실,세미나실), 지상 1층(제2전시실,자료실), 2층(제3 전시실, 체험전시실, 추모실)으로 구성되어 있다.
1970년 10월 26일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지시와 국민의 성금 등으로 일제시기 민족정기를 탄압했던 조선신궁이 있던 서울 남산 현 위치(회현자락)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을 건립·개관하게 되었다. 그 후 기념관이 노후·협소해짐에 따라 2004년 (사)안중근의사숭모회와 광복회의 요청으로 노무현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가보훈처에서 2010년 10월 26일 새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안중근의사기념관 홈페이지 참조)
안중근의사의 간략한 일대기는 아래와 같다. (후술 할 내용의 이해를 위함)
1879년(1세, 출생 9월 2일, 황해도 해주), 1885(7세,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사, 유교 경전과 조선역사를 배우기 시작), 1894(16세, 김아려 여사와 결혼, 신천의려 선봉장으로 동학군 진압), 1897(19세, 빌렘신부로부터 영세받음,영세명 도마-토마스, 선교활동에 전념), 1905(27세, 항일운동 거점 마련 위해 중국 산둥 상하이 일대 답사), 1906(28세, 진남포로 이사, 삼흥학교와 돈의 학교 운영 교육에 힘씀), 1907(29세,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해외 망명), 1908(30세, 동의회 참여, 의병부대 지휘, 국내 진입작전 2회 전개), 1909(31세, 크라스키노에서 단지동맹 결성, 10월 26일 하얼빈의거 결행), 1910(32세, 안응칠역사, 동양평화론 저술, 옥중육필 200여 점 씀,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에서 순국)
주요 관람 코스는 다음과 같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입구(지하 1층)
1) 참배홀 (지하 1층, 전시관 입구)
안의사의 흰 두루마기를 입은 좌상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좌상뒤 배경에는 왼손 약지(네 번째 손가락) 끝마디를 자르고 피를 종지에 받아 붓글씨로 쓴 대한독립(大韓獨立)이 태극 문양 네 귀퉁이에 혈서 되어 있다. 1909년 안의사 포함 12인의 단지동매 때 죽음으로 독립쟁취할 것을 맹세한 것이다.
2) 상징 공간
안중근의사 사진(이토 히로부미 사살 후 체포 후의 모습)과 부조(손가락이 독립쟁취 방향을 제시하는 상), 전언(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등이 있는 공간이다.
을사늑약 당시 경운궁(덕수궁) 문 앞에 도열한 일본군 / 남산에서 포대를 걸어 놓고 무력시위중인 일본군
3) 격동의 시대를 산 출생과 성장
강화도조약(1876),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혁명(1894), 청일전쟁(1894, 청국 패전), 을미사변(1895), 러일전쟁(1904, 러시아 패전), 을사늑약(1905) 등의 격변을 거치면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해 갔다. 안중근의사는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와중에 황해도 해주에서 1879년 9월 2일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과 같은 점이 7개 있어, 아명을 응칠(應七)이라 지었다. 기념관에는 책벌레 안의사의 서재가 있다.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문구와 수묵 도장이 증명한다.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일찍이 진해현감을 지냈으며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다. 셋째 안태훈(安泰勳)이 안의사의 아버지였다. 안태훈은 열 살이 되기 전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해 선동(仙童)이라 불렸다. 중년에 과거에 응시해 진사(進士)가 되고 아내 조 씨(趙氏)와 결혼해 3남 1녀를 낳았으니 맏이가 중근, 둘째가 정근(定根), 셋째가 공근(恭根)이었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학문 대신 사냥을 즐겨 산과 들로 다녀 부모가 꾸짖기도 했으나 끝내 복종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옛날 초패왕 항우가 말하기를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라고 했다. 그랬는데도 만고영웅 초패왕의 명예가 오히려 천추에 남아 전한다. 나도 학문을 가지고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4) 안의사와 가문
항일독립운동가의 명문가문으로 15명이 독립운동에 대한 공로로 서훈을 받았으며, 안중근의사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다. 안의사 사후, 친동생 정근과 공근은 러시아로 망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사촌동생 명근은 친일대신 처단하거나 서간도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다. 조카들도 만주독립군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안중근 의사 활동도
5) 안의사의 활동
항일운동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1905년 말 중국의 산둥과 상하이 등지를 돌아보았다. 1907년 국외 망명을 떠나 연해주의 한인사회 결속과 환난 구제를 위해 동의회를 조직,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08년 연해주 의병을 이끌고 2차례 국내진입작전(1차 1908년 6월 두만강 함경북도 경흥 주둔 일군 수비대 급습 전투, 2차 1908년 7월 경흥과 신아산 부근 일군 급습 전투)을 했다.
포로 석방
영화 영웅에서 보듯이 생포된 일본군 포로의 석방(만국공법에 근거)으로 부대위치가 노출되어, 안의사 군대는 패퇴하고, 내부 분열(엄인섭 부대와 결별)이 일어나 어려움에 처했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복귀했다.
안중근 의사와 천주교 / 빌렘 신부와 안의사 동생 정근 공근
6) 안의사와 천주교
안의사의 부친 안태훈이 억울한 역모에 몰려 서울의 종현성당(명동성당)으로 피신한 것이 천주교를 믿게 된 계기였다. 부친의 영향으로 1897년 1월 11일 니콜라스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 1860~1938) 신부에게 영세(세례명 토마스 Thomas, 도마)를 받았다. 수년간 천주교를 전파하는 한편 독실한 신앙인으로 계몽운동을 했다. 빌렘 신부는 사형 며칠 전 1910년 3월 2일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본당에서 출발하여 뤼순으로 갔다. 3월 8일부터 11일까지 4일 동안 안중근 의사의 두 동생 정근 공근과 함께 면회하고,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주었다.
천주교 교리상 살인행위는 계명을 범한 죄인이다. 천주교에서는 84년 동안안의사는 죄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93년 8월 21일 김수환 추기경의 안중근 의사 추모 미사에서 일본에 선전포고한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는 군인 신분으로서 독립전쟁 중에 행한 전투행위로 해석하고 “안중근 의사의 거사는 정당방위다”라고 대내외에 선포하여 복권이 되었다. 현재 한국 가톨릭 교회는 한국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기 위해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7) 교육 운동
삼흥학교를 세우고 중등부 야간학교인 돈의 학교를 운영(교장)하는 등 조국과 민족을 되살리기 위해 활발한 교육활동을 펼쳤다. 대학설립도 계획했었다.
8) 국채보상운동
1907년 초 안중근의사는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국사는 공이요, 가사는 사이다. 지부장인 우리 가정이 솔선수범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특히 의사 일가가 의연금을 냈다.(대한매일신보, 1907.5.29. 조마리아 여사 은가락지 2쌍 기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패물을 내어 놓았다(대한매일신보, 1910.1.30.)
혈서와 단지
9) 동의단지회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지낸 최재형(崔在亨·1858~1920) 선생 밑에서 일명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909년 2월 함경북도 경흥 두만강 건너편 러시아 크라스키노(연추)의 하리(下里) 마을에서11명의 동지들과 ‘조국독립 회복과 동양평화의 유지’를 위하여 단지동맹을 맺었다. 왼손 약지의 첫 관절을 잘랐다.
10) 하얼빈 의거
일별 계획 및 실행
1909년 10월 안중근의사는 이토의 하얼빈 방문 소식에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의거를 계획하고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구체적 의거 추진은 아래와 같다. 1909.10.21.(블라디보스토크,신문등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간다는 정보입수, 거사 결심, 동지 우덕순 의사와 하얼빈으로 출발), 10.23(하얼빈, 안의사 일행 의사 계획 수립), 10.24(열차가 채가구 역에서 중간정차한다는 정보 입수, 안의사 우덕순 조도선 채가구역으로 향함), 10.25(우덕순 조도선이 채가구 역을 맡고, 안의사는 하얼빈으로 돌아와 거사 준비), 10.26(채가구, 역에서 우덕순 등을 수상히 여긴 러시아 경비병이 우덕순 등을 역 구내 여관에 감금, 열차는 정차하지 않고 하얼빈으로 직행)
저격하는 안중근의사
이토 히로부미 신체 검안도(3발 관통, 화살표가 탄착점) /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벨기에 권총(브라우닝 권총, 총번호 262336 번)
역사적 거행
10.26 09:00(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 역 구내로 들어옴, 정거장 찻집에서 차 한 잔을 부어놓고 뜨거운 마음을 녹이면서 모든 정신을 한데 뭉쳐서 어떻게 거사를 행할까를 고민하던 중 열차 소리가 나서 얼른 밖으로 뛰어나감), 09:15(하얼빈역에 러시아군 의장대 도열), 09:20(이토 히로부미 일행이 열차에서 내림, 러시아 대장대신 코코프체프가 마중), 09:30(안중근 의사의 총탄3발 발사 히로부미 쓰러짐, 이토가 회담을 마친 뒤 환영군중 쪽으로 갈 때 권총 3발을 쏘아 사살. 나머지 3발을 일행에게 발사. 7발 중 1발 남음)꼬레아 우라!(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뒤 현장에서 스스로 체포되었다. 잠시 후 러시아경비병에 의해 압송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우측팔 관절 위부분-심장관통, 주변 인물인 일인 총영사 천상(川上), 비서관 삼(森), 철도총재 전중(田中) 등 3명도 심장 주변 관통 정확히 사격) 10:00(이토 히로부미 사망)
이토 히로부미 약력(1841~1909)
1841(야마구치현 농민 아들로 출생, 부친이 하급 무사 가문인 이토가의 양자가 되어 이토로 성을 고치고 하급 무사가 됨), 1868(메이지 유신에 참여, 유신인사에 발탁, 영국 유학), 1870(미국 사절단 일원으로 미국 파견, 화폐 은행제도 조사), 1871(이와쿠라 사절단 일원으로 세계 각국 여행), 1881(정적 오쿠마 시게노부 축출 정권 장악), 1885(내각제도 창설, 초대 내각총리대신), 1889(헌법제정), 1890(의회 개설), 1905(을사늑약 강제 체결, 통감부 설치, 초대 통감), 1909(통감 사임, 추밀원 의장됨), 1909.10.26(러시아와 만주를 분할 점령한다는 계략 꾸민 뒤 이를 협의하기 위해 하얼빈에 도착 안중근의사 의거로 최후를 맞이함)
이토 히로부미 죄악 15가지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가지
(안중근 의사가 거사 후 검사의 심문을 받을 때 제시한 것이다.)
1. 1867년, 일본 명치왕 부친 태왕을 시살 한 대역부도의 죄.
2. 1895년, 자객들을 황궁에 돌입시켜 대한 황후 폐하를 시살 한 죄.
3. 1905년, 병사들을 개입시켜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위협해 강제로 다섯 조약을 맺게 한 죄.
4. 1907년, 다시금 병사들을 이용해 칼을 뽑아 들고 위협하여 강제로 일곱 조약을 맺게 한 후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폐위시킨 죄.
5. 한국 내 산림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 상, 공업 등을 일일이 늑탈한 죄.
6. 소위 제일 은행권을 강제하여 한국 내의 땅들을 억지로 팔게 만든 죄.
7. 국채 일천 삼백만 원을 한국에 강제로 지게 한 죄.
8. 한국 학교 내의 서책을 압수하여 불사르고, 내외국의 신문을 인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막은 죄.
9.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수많은 의사들의 봉기를 폭도라며 쏴 죽이거나 효수하고 심지어 의사들의 가족까지 십수만 인을 살육한 죄.
10. 한국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11. 소위 한국 정부의 대관이라는 오적, 칠적 등 일진회 놈들을 통해 일본의 보호라는 헛소리를 운운한 죄.
12. 1905년 또다시 거짓으로 5가지 늑약을 맺게 한 죄.
13. 한국 삼천리강산을 욕심내어 일본의 것이라 선언한 죄.
14. 이천만 생령의 살육의 곡소리가 하늘에 끊이질 않고 포성과 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 숨 쉴 틈 없는 와중에도 한국이 무사태평한 것처럼 명치천황을 속인 죄.
15. 동양 평화의 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죄.
중국 반응
중국은 청일전쟁 패배의 대가로 일제에게 영토를 분할당하는 등 굴욕적 수모를 당한 바 있는 데다가,러일전쟁 당시에는 청의 발상지인 만주가 전쟁터로 화하게 되자 중국인들의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욱이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야합하여 만주를 분할 점령하려는 야욕 아래 하얼빈을 방문하기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럴 때 하얼빈 의거가 터진 것이었다. 이 역사 사건은 중국과 한국 두 나라 국민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공동투쟁의 서막이 되었고, 양국 국민의 유대를 강화시켰다.
안중근의사의 감방
11) 의사의 법정투쟁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의거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거행된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안중근의사를 면회하는 빌렘 신부와 동생 정근 공근
12) 옥중 남긴 글과 서간문
1909년 11월 3일부터 1910년 3월 26일까지 5개월 동안 뤼순감옥에서 2권을 저술했다. 자서전 「안응칠 역사」는 완성되었다. 그러나, 한국 독립을 위해 나아갈 길을 제시한 「동양평화론」은 1910년 3월 15일경 착수하였으나, 사형 집행일을 한 달 연기한다는 당초의 약속과 달리 1910년 3월 26일에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동양평화론』을 저술할 수 있었던 기간은 10여 일 정도에 불과했다.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인 채로 끝나고 말았다.
「동양평화론」
동양평화론의 체계는 1서(序) 2 전감(前鑑) 3 현상(現狀) 4 복선(伏線) 5 문답(問答)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실제 집필한 것은 서(序)와 2장의 전감(前鑑)인데 그중 전감도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남아 있는 『동양평화론』은 서론에 해당되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약 5개월에 걸쳐 옥중에서 11회 신문을 받는 동안 미조부치(講淵孝雄) 검찰관과 벌인 논쟁을 통해 「동양평화론」의 면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정치적 구상은 오늘날 유럽공동체(EU)와 흡사하고 경제적 뒷받침을 위해 공동은행을 세우려는 구상은 세계은행(IBRD)·국제통화기금(IMF)의 구상과 일치하여, 100년 후의 오늘을 내다본 탁월한 정치사상가이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홈페이지 참조)
조마리아 여사(그 어머니에 그 아들)
조마리아 여사 편지
1910년 일제에 의해 사형이 언도되자, 안중근의사는 항소를 포기했다. 호생오사(好生惡死)는 인지상정이건만,살아있는 존재들이 본능적으로 잡고 싶어 하는 생명에 대한 본성을 저버리고 대의를 택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사형언도 소식을 들은 조마리아는 아들 정근과 공근 형제 편에 간결하면서도 단호한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전언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안타깝게도 그 진짜 편지는 남아 있지 않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 의사가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 겸 편지
(사형판결 후)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 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大要)이며, 그 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려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안중근 의사 천주교 세례명, 토마스와 동일) 올림
분도 모에게 보내는 글
(안중근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고 아내에게 쓴 편지)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 반드시 감정에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 뿐이오. 장남 분도(세례명)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께 바치어 후세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많고 많은 말을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1910년 경술 2월 14일
장부 도마(토마스多默) 올림
13) 의사의 순국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모친이 보낸 하얀 명주 한복을 입고 교수대 옆 대기실로 가서 눈을 가린 채 교수대에 올랐다. 10시 4분쯤 조용히 형의 집행을 받았다. 감옥의사는 10시 15분 절명했다고 보고했다. 안중근의사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몸과 집안을 돌볼 겨를 없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이는 한국 독립운동의 방향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었다.
효창공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 가묘
안중근 의사 가묘(2024.05.25 참배후 촬영, 효창공원)
안중근의사, 이봉창의사, 윤봉길의사, 백정기의사 묘소
안의사는 해방 후에 고국에 반장하여 달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교수형 후에 목에 건 밧줄을 푼 후 무릎을 꺾어서 나무통 안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두 동생이 유해 인도를 강력하게 요구하였으나 거부했다.이미 상부의 지시를 받아 절대 유족에게 넘겨주지 말라는 전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두 동생이 더욱 강력히 주장하자, 이들을 강제로 차에 태워 귀국시켰다. 안의사의 무덤은 중국 뤼순(여순) 감옥 인근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이야기에 다방면으로 수소문하였지만,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효창공원에 빈 무덤으로 혼백을 모시는 가묘가 있다.
글이 길어져, 다음회에 백범 김구 광장, 숭례문, 덕수궁 돌담길, 고종의 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