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효창공원에는 꼭 한번 방문하고 싶었다. 김구 선생 묘소와 안중근 의사 가묘가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작년 남산 공원 탐방 때, 백범 김구 광장 (https://brunch.co.kr/@jylee2020/100)의 흰 호랑이상은 벅찬 감동을 주었다. 그 바로 언덕 아래의 안중근의사 기념관(https://brunch.co.kr/@jylee2020/99)에서 보았던 안의사의 혈서와 단지는 나에게 언제 효창공원에 가볼 것이냐고 계속 물어왔다. 더구나 김구 선생이 돌아가신 경교장 (https://brunch.co.kr/@jylee2020/124) 2층에 안두희의 권총 탄환이 뚫은 창을 보았을 때의 안타까움이 결국 나를 효창공원으로 이끌었다. 오늘(2024.05.25, 토, 맑음 20도)이 바로 그날이다. 새남터 순교 성지 탐방 후 도보로 이동, 용산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400번 버스를 타고 숙대입구에서 내렸다.
효창공원을 둘러보고 백범 김구 기념관을 관람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백범 묘소에 큰 절을 두 번 올렸다. 삼의사 묘와 안중근의사 가묘를 본 순간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이내 슬픔이 밀려왔다. 끝내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신 분들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해서 임시로 가묘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분들의 희생에 보답하는 것은,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강토를 반드시 물려주는 일일 것이다.
효창공원
효창공원은 1989년 6월 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조선 22대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1782~1786, 세자책봉 후, 3세졸)를 비롯한 왕가의 묘를 모신 장소여서 효창원이라고 했다. 효창은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의미로 정조가 문효세자 묘소를 궁궐 가까운 곳에 두고자 이곳 소나무가 울창하고 한강이 보이는 언덕에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 군대가 불법 주둔하면서 산림을 훼손하였고, 더욱이 일제 말기(1945년 3월) 묘들을 강제로 서삼릉(고양시)으로 이장하고 공원으로 만들었다.
광복 후 김구선생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모셔와 삼의사 묘역을 조성하고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모셨다. 또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의 유해를 모셔 임정요인 묘역을 조성하였다. 김구 선생 서거 후 유해를 안장하여 일대가 선열묘역이 되었다. 사적 시설인 의열사, 김구 선생묘역, 안중근 의사 가묘, 삼의사 묘역, 임정요인 묘역이 있다. 효창광장, 자연학습장, 운동시설이 있다. 공원 면적은 143,653m 2이다.
백범 김구 묘소 입구
백범 김구선생 묘소
백범 김구선생(1876~1949) 묘역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그 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이곳에 안장하였다. 이후 일대가 독립운동에 앞장선 선열들의 묘역으로 지정되었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을미사변 후 일본군 장교 스치다를 의살 하여 인천 감옥에 투옥되었다. 을사늑약의 철폐를 위해 투쟁, 신민회에 가입하여 국권수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3.1 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과 내무총장, 국무령등을 거쳐 주석에 이르렀다. 한인애국단,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해방 후 민족통일 자주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안두희 흉탄에 서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1945년 11월 귀국한 김구 선생이 다음 해 6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모시고 와 그 해 7월 6일 옛 문효세자 묘터에 국민장으로 안장하였다. 안중근 의사를 모실 가묘도 조성하였다.
안중근 의사 가묘
안중근 의사
(출처 :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안중근 의사상(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내)
안중근 의사(1879~1910)
해주 출신으로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상하이로 갔다가 국내에서 교육 등 실력향상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 깨닫고 1905년 귀국,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 학교를 인수하여 인재교육에 힘썼다. 1907년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어 항일 운동을 시작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체포되었어도 당당한 태도와 정연한 이론에 재판관과 검찰관들이 탄복하였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족장이 추서 되었다. (저의 브런치 글 2023.02.19 '안중근 의사 기념관' 참조, https://brunch.co.kr/@jylee2020/99 )
이봉창 의사상
이봉창 의사 선언문
이봉창 의사(1901~1932)
효령대군 후손으로 서울 용산 효창동에서 태어났다.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1년 상하이에서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 선생과 함께 일본 왕 폭살 계획을 세워, 1932년 1월 8일 동경 사쿠라다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다. 불행히 명중시키지는 못하였으나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거사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10월 10일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32세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윤봉길 의사(1908~1932, 매헌)
충남 예산 출신으로 1926년 계몽 농촌부흥 독서회 운동 등으로 농촌부흥에 전념하였다. 1930년 망명길에 올라 만주를 거쳐 상하이 임시정부 김구 선생을 만났다.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공원 천장절(일왕 생일) 겸 상하이 사변 전승 축하 기념식에서 시라카와 대장 이하 일본 요인들을 폭살 중상시키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12월 19일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백정기 의사(1896~1934, 구파)
전북 부안 출신으로 1919년 3.1 운동 후 상하이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여 노동자운동과 일본상품 배격운동을 지도하였다. 일본 시설물 파괴 공작과 요인 사살, 친일파 숙청등 항일운동을 하였다. 1933년 상하이 홍커우 육삼정연회에 참가한 주중 일본 공사 아리요시를 습격하려다가 역습을 받아 체포되었다. 일본 나가사키법원에서 무기형을 받고 복역 중 6월 5일 지병으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임정요인 묘역 입구
임정요인 묘역
1948년 9월 중국 땅에서 순국하신 이동녕 선생과 차리석 선생의 유해를 봉환하여 사회장으로 안장하였다. 같은 해 10월 환국 후 서거한 조성환 선생을 사회장으로 안장하였다. 1991년 11월 현재와 같이 묘역을 조성하였다.
임정요인 묘역(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선생)
이동녕 선생 (1869~1940, 석오)
충남 천안 출신으로 독립협회 활동과 언론계몽, 기독교 청년회(YMCA) 운동 및 을사 늑약 반대운동을 하였다. 1906년 북간도 망명 후 서전의숙을 설립하여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였다. 1907년 귀국하여 신민회 조직에 참가하였다. 1910년 서간도로 망명하여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3.1 운동 후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임정 의정원, 국무위원, 주석 등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차리석 선생 (1881~1945, 동암)
평북 선천 출신으로 신민회에 참여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 중 검거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3.1 운동 때 만세 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 기자와 편집국장으로 활동하였다. 임시 의정원 위원, 국무위원을 지냈고, 1935년 국무위원회를 조직하고 비서장에 선출 활약했다. 한국독립당 이사를 지냈으며,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단무를 총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조성환 선생 (1875~1948, 청사)
서울 출신으로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에서 활동하였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의 만주 시찰 때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옥고를 치렀다. 3.1 운동 후 임시정부에서 군무부장을 지내면서 청산리전투 등 무장 독립운동을 하였다. 임정 국무위원으로 활동하고 광복군 창설과 활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45년 조국으로 돌아와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의열사
의열사
이동녕 김구 조성환 차리석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1990년 11월 의열사 및 창열문이 건립되었고, 1991년 7월 7인의 영정을 이곳에 봉안하였다. 방문 당일 의열사는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 보지 못하였다. 영정관리를 위하여 특수한 경우에만 개방된다.
백범 김구 기념관 입구
백범 김구 기념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주, 민주, 통일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삶과 사상을 알리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 2002년 10월 22일 개관하였다. 선생의 삶과 사상을 통하여 근현대사를 이해하고, 분단된 조국의 자주 민주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겨레의 문화적 삶의 공간이다. 백범의 일대기와 역사적 사건이 전시되어 있다.
백범 김구 기념관
백범 김구 선생 좌상
중앙홀
기념관에 들어서자 중앙홀에 백범좌상이 있다.
<나의 소원> 중
나의 소원
가장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였다.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우리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부력은 생활을 풍족하게 할 정도면 되고,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김순영과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남
1887년
양반이 되기로 결심, 과거를 위한 서당공부 시작
1892년
과거 낙방, 관상공부하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
백범 유년기~청년기
1894년
황해도 동학농민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 공격
동학농민군 진압측의 안태훈 진사(안중근 의사의 부친)와 상호 공격하지 않는다는 비밀협정함
실패후, 안태훈 진사에게 의탁하고, 그 집에서 스승 고능선을 만남
훗날 김구 선생의 장남 김 인과 안정근(안중근의사의 동생)의 셋째딸 안미생이 결혼하게 된 인연이 됨
을미사변(1895.10.08)
국가 치욕을 갚기 위한 치하포 의거(1896.03.09, 07:00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주막에서 일본군 중위 처단한 의거)
1896.06.21(해주 감옥 수감)~08.13(인천감리서로 이관)
1896.10. 사형 선고
김구의 사형 소식 (1896.11.07, 독립신문, 붉은 선안)
김구를 살린 전화기(1896.10.02) 수화기 소리 "사형집행을 당장 멈추시오!"
1896년
-.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를 국모보수로 처단
(1896.03.09, 07:00경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주막에서 처단, 치하포 의거라고 함)
-. 해주 감옥소, 인천감리서(06.21 해주 감옥 수감~08.23 인천 감리서로 이관)
-. 사형 판결(1896.10월 )
-. 고종의 사형 집행중지 명령 (10.02)
-. 사형집행중지중, 극적으로 탈옥
백범 김구가 감옥 안에서 죄수들을 가르쳤다는 기사(1898.02.15, 독립신문)
탈옥(1989.03)
마곡사 승려 생활(탈옥 후), 농사, 교육사업, 풍수지리, 불교, 기독교 공부
1898년
마곡사 승려 생활
1903년
아버지 탈상 후 황해도에서 교육사업 시작
탈옥 후 기독교 입교, 교육계몽운동 전개, 1905 을사늑약 후 반대시위 주도
1907년
국권회복 위해 신민회 가입,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
1915.08 가출옥후 아내 최준례가 교원으로 근무 중이던 안신학교에서 교육활동 시작. 1917년 농장 안에 소작인 자녀 위한 학교 세움
안악사건, 양기탁 보안법사건으로 4년 8개월 옥고 치름
안악 사건(1910.11 안명근 등이 무관학교 설립 위한 자금 모금중, 신민회원과 기독교인들이 일제에 체포된 사건)으로 15년 선고
1910년
신민회 독립운동 자금 모금책 (김구 선생, 황해도 책임자)
황해도 모금 책임자, 김구
1911년
안악사건으로 15년 선고, 4년 8개월 옥살이
3.1 운동 후 중국 상해로 망명
1919년
3.1 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의 경무국장, 내무총장, 노동부총판, 국무령 역임
1931년
한인애국단 조직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로 위기의 독립운동을 되살림
1940년
한국광복군 조직, 본격적인 군사활동 전개
가족 가계도 / 안미생(안중근 의사 조카) / 백범 어머니 곽낙원 여사
김구 선생의 큰아들(김 인)과 안정근(안중근 의사의 동생)의 셋째 딸(안미생)이 결혼하였다. 안미생은 김구 선생의 며느리자, 비서로 활약했다. 2022년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추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