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국립중앙박물관,선사시대(구석기 신석기 청동기)(1)

선사 시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유물

by 애바다 Mar 03. 2025
국립 중앙박물관(용산)

   가야를 더한 4국 시대의 생활이 궁금하였다. 신라(국립 경주박물관), 백제(한성 백제박물관, 국립 공주박물관, 국립 부여박물관), 가야(고령 대가야박물관, 창녕 박물관-비화가야)를 탐방했었다. 고구려의 유적지가 있는 아차산을 방문한 후, 고구려 유물이 더욱 궁금하였다. 고구려 유물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하여 국립중앙박물관(2024.11.16, 토, 비)을 방문하였다.

선사시대~고구려관 휴관 안내(현재는 개관, 관람 가능함)

   하필이면 동일 구역에 있던 선사시대관과 고구려관이 리모델링 차, 휴장 중(~2025.01.20까지)이었다. 선사시대관과 고구려관을 제외하고 나머지 백제, 신라, 통일신라, 고려, 조선관은 둘러보았다. 간 김에 2층(서화관, 기증관, 사유의 방)과 3층(조각. 공예관과 세계문화관)으로 올라가서 관람하였다. 전체 관람에 적어도 2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대한민국 대표 유물을 집합한 곳으로 긴장감을 가지고 관람하게 된다.

검색대(중앙), 안내(우측)

   1층 입구 으뜸홀 검색대는 공항 검색대 시스템이다. 개인 소지물을 모두 꺼내 플라스틱 상자에 넣으면 자동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 소지품 내용물이 화면에 실시간으로 나타난다.


    어깨 가방 안의 간식거리가 검색 보안 요원에 적발되어, 어린이 박물관과 기념품 판매하는 방향에 있는 개인 물품보관소함에 배낭을 넣고 다시 와서 통과했다.

광개토대왕비 / 개성 경천사10층 석탑

    1층 고구려관 옆 역사의 길에는 광개토대왕비가 실물높이의 대형 스크린에 나타난다. 신라관과 통일신라관 사이의 통로에는 개성 경천사 10층 석탑이 우뚝 서 위엄을 드러낸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대한민국의 미래, 꿈나무

   부모님과 함께 온 어린이들이 많이 보였다. 이런 조기 교육은 국가차원에서 적극 지원 응원 장려해야 한다. 특히 유치원 초등학생들이 해설사 선생님들의 설명에 헤드폰을 끼고 귀를 기울이며 쪽지에 받아 적고 있는 똘똘한 눈빛에서 한국의 미래 희망을 보았다.  

광개토대왕

   드디어 전에 관람하지 못했던 선사시대와 고구려관을 볼 기회(2025.02.22 토, 맑음)를 잡았다. 고구려 유물은 만주벌판을 누비던 야생마 같은 야성미가 있어 좋았다. 신라 백제 가야의 다른 지역의 박물관에서 봤던 비슷한 모양의 유물들은 반가웠고, 좀 더 유심히 관찰해 보았다. 통일이 되어 고구려박물관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관람도중에 각 지역의 박물관 상호 간에 유물 대여 형식의 출장 중이라며, 사진으로 대체하는 유물을 몇 종류를 봤다. 이동 혹은 전시 중 분실 파손 우려도 있으니, 꼭 필요하다면 요즘의 3D 최첨단 기술로 복제물(학계 검정)로 대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네덜란드 박물관에서 루마니아로부터 빌려 전시했던 2,500년 된 황금 투구가 분실 증발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최근 한글박물관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중앙 박물관을 비롯한 전국의 박물관은 지진 화재 등 재해에 잘 대비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45년 8월 15일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1915년 12월 1일 경복궁 안에서 개관)을 인수하여 동년 12월 3일 개관하였다. 1950. 12. 한국전쟁으로 소장품 부산으로 임시 이전(광복동 사무실)하였다가,  1953. 08. 부산에서 경복궁내 청사로 복귀하였다.


   1955. 06. 23 남산분관에서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 개관하였다. 1986. 08. 21.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구 중앙청)하였다. 2005. 10. 28. 현재의 새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신축 이전 개관(용산)하였다.

층별 안내도(1)
국립중앙박물관 층별 배치도

층별 전시실 안내

1층 : 선사. 고대관(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고조선 부여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발해)

         중. 근세관(고려, 조선, 대한제국), 디지털 실감 영상관 1, 특별전시실 2

2층 : 서화관(외규장각의궤, 서화, 불교회화, 목칠공예), 디지털 실감 영상관 2, 기증관(1~4), 사유의 방

3층 : 조각. 공예관(분청사기. 백자, 청자, 금속공예, 불교조각), 세계문화관(그리스. 로마, 일본,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1층 배치도(1)
1층 배치도(2)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1층 선사. 고대관)

   석기시대는 보통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시대로 나눈다. 구석기시대는 돌을 깨서 만든 뗀석기(타제석기)를 사용했다. 중석기 시대는 해빙기에 작아진 동물들을 잡기 위해 작은 잔석기(세석기)를 썼다. 신석기시대는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마제석기)를 사용하였다. 청동기 시대에는 최초의 금속 도구를 썼으나 청동기의 생산량이 부족하여 제기와 군사용으로만 썼다. 철기 시대에는 대량 생산이 가능해져 농기구도 금속을 사용하게 되었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발달하며 문자를 기록한 역사 시대가 시작되었다.

선사. 고대관 (연주황 색)
1층 구석기~신라관

구석기시대

   인류가 처음으로 나타난 시기부터 약 1만 년 전에 신석기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돌을 깨뜨려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시기다. 인류는 약 7백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여 4백만 년 전~2백만 년 전 경에 초기 호모(오스트랄로피테쿠스)들이 유라시아대륙으로 퍼져 나왔다. 동아시아 지역에는 호모 에렉투스가 2백만 년 전~40만 년 전에 최초로 등장하였다. 한반도에도 이른 시기에 호모 에렉투스가 출현했을 가능성이 많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현생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는 4만 5천 년~3만 5천 년 전 경에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호모 사피엔스의 이동 경로
오스트랄로피데쿠스(400만년전~200만년전), 호모 엘렉투스(200만년전~10만년전)와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 20만년전~현재) / 인류의 생존 활동

   박물관은 인류가 가꾸어 온 물질문화의 보물 창고다. 선사시대는 사람들이 글자를 만들어 기록하기 전의 시기를 말한다.

선사시대를 돌아보는 이유

   한국 주먹도끼는 미국 애리조나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주한미군, 그렉보웬에 의해 1978년 연천 한탄강변에서 발견되었다.  

그렉 보웬과 주먹도끼

구석기 제작 방법

간접 떼기

   돌끼리 직접 때리는 대신에 동물의 뼈등 도구를 이용하여 목적석 부위를 정교하게 타격, 떼어내어 사용하였다.

간접 떼기

눌러 떼기

   돌감의 가장자리에 동물 뼈나 단단한 돌등 도구를 눌러서 돌을 더욱 정교하게 떼어내는 방법이다. 떼어낸 돌은 화살촉 등으로 사용하였다. 잔돌날을 끼운 창은 매머드도 사냥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무기였다.

눌러 떼기 (5cm 정도의 잔돌날을 나무 장대에 고정 연결한 창으로 매머드도 사냥 가능)

신석기시대

   구석기 다음의 시대다. 농경과 정주, 토기, 마제석기, 궁시 등을 주요 문화적 지표로 하는 시대이다. 최종 빙하기가 끝나가는 무렵, 환경 변화에 적응한 신석기인은 기술혁신을 통해 생업 형태의 다변화와 더불어 생계 방식, 생업 도구, 의식주, 분묘, 신앙 의례, 장거리 교역 등과 같은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였다. 신석기 문화는 자체적인 변화·발전 과정을 거쳐 도작농경과 무문토기를 주체로 하는 청동기문화가 유입되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간석기 시대

   날을 갈아서 더욱 정교한 도구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다. 신석기와 구석기가 혼재되어 용도에 따라 뗀석기 혹은 간석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간석기 (구석기시대에 보이는 신석기 초기의 간석기 유물)
신석기시대에 보이는 구석기의 뗀석기 유물

신석기시대 토기

   덧무늬 토기는 겉면에 진흙 띠를 붙이거나 손톱으로 겉면의 흙을 조금씩 끌어 모아서 무늬를 만들었다. 빗살무늬토기는 뾰족한 도구를 이용하여 지그재그로 무늬를 만들었으며, 모래등 부드러운 땅에 꽂아서 사용할 수 있도록 바닥을 뾰족하게 제작하였다.

각종 신석기 시대 토기 / 빗살무늬 토기(위) 덧무늬 토기(아래)

토기로 읽는 조개무지의 시간

   부산 동삼동 조개무지의 토기들이 묻혀 있는 층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제일 아래층에서는 점토를 덧붙인 덧무늬 토기가 나왔다. 중간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가 나왔으며, 맨 위 층에서는 점토 띠를 아가리에 둘러 붙인 늦은 시기의 겹입술 토기다. 따라서 동삼동 조대무지터는 기원전 6천 년부터 기원전 2천 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이용한 역사의 타입 캡슐이다.

덧무늬 토기(하)/찍은 무늬토기 (중하)/ 빗살무늬토기(중상)/ 겹입술토기(상)
동삼동 조개무지의 토기 타임캡슐
화살촉 만드는 방법 (눌러 떼기<--- 간접 떼기<--직접 떼기)
주먹도끼 만드는 방법(잔손질<---1차 가공<---직접 떼기)

장례 풍습

   신석기시대 무덤 매장자 32명 중 24명(75%)이 무릎을 굽힌 태아기의 태내 자세로 묻혔다. 이유는 무덤을 작게 만들기 위함인지 아니면 태아기의 자세가 최적의 자세라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매장 자세(태내 태아기의 무릎을 굽힌 자세)

신석기시대 고기 잡는 방법

   남해는 따뜻한 물이 흘러 생물자원이 다양하였다. 부산 동삼동에서 참돔 상어 고래 강치등 바다 포유류 뼈와 굴 홍합 전복등의 조개껍질이 나왔다. 서해에는 굴이 많이 나왔다.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고정식 그물로 물고기를 잡았다. 수심이 깊은 동해 지역에서는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등을 잡아먹었다.

어로 도구 (지역마다 다른 어로 활동)

   암각화에서 고래등에 작살이 박힌 모습에서 고래 사냥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역 간에 교류 및 이동을 하였음을 토기등을 통해 알 수 있다.

토기 제작 기술의 유입 경로 / 고래 사냥 암각화

지역별 토기의 특징

   중동부 지역(강원 태백산맥 동쪽)에서는 좁고 편평한 바닥을 가진 사발, 아가리가 작은 항아리, 점토 띠를 붙인 덧무늬토기를 사용하였다. 동북부(두만강 유역)에서는 바닥이 편평한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사발모양의 토기나 빗살무늬토기를 만들었다.


   중서부 (평남 황해도 서울 경기) 지역은 바닥이 뾰족한 포탄모양의 빗살무늬 토기를 만들었다. 남부(남해안, 섬, 제주)는 제주의 식물줄기를 섞어 만든 고산리식 토기, 점토띠를 붙인 덧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 겹입술토기를 사용하였다.

중동부 지역(강원 태백 동쪽), 좁고 편평한 바닥을 가진 사발, 점토 띠를 붙인 덧무늬토기 / 동북부(두만강 유역)는 바닥이 편평한 토기 사용
중서부 (평남 황해도 서울 경기), 바닥이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 / 남부(남해안, 섬, 제주)는 식물줄기로 만든 제주 고산리식 토기, 점토띠를 붙인 덧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
민무늬 토기 / 겹아가리 토기, 굽다리 접시, 빗살무늬 토기, 영선동식 토기
여인상, 멧돼지 그림 새긴 토기, 멧돼지 모양 흙인형, 사슴 곰 물개 모양토기, 간돌도끼, 조개 가면
덧띠 토기 문화

청동기 시대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00년 대 전반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무문토기와 함께 청동기, 마제석기를 사용하였다. 마을은 장방형 혹은 원형의 수혈 주거지로 구성되고, 무덤은 지석묘, 적석묘, 석곽묘가 대부분이다. 벼를 비롯한 곡물 농사가 시작되었다. 무덤에 부장 된 것으로는 청동기로 비파형 동검 등의 무기와 다뉴기하학문경(다뉴세문경)이다. 청동기의 중심지는 요서 지역에서부터 요동 지역을 거쳐 길림, 한반도 지역으로 이동되었다.(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청동도끼와 거푸집

   위쪽에는 나무 자루를 끼웠던 구멍이 있다. 제작은 붕어빵 만드는 것처럼 거푸집 2개를 합쳐서 만든다. 거푸집 속으로 녹인 청동 쇳물을 부어 만든다.

청동도끼와 거푸집

반달 돌칼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곡식 수확 도구다. 보통 반달 모양이지만, 사각형, 사다리꼴, 배, 물고기, 삼각형등 다양하다. 가운데 1~2개의 구멍에 고리처럼 줄을 걸고 손을 끼워 사용한다.

반달 돌칼(1)
반달 돌칼(2)

돌로 만든 도구

   나무를 활용한 도구를 만들기 위하여 돌도끼, 돌자귀를 활용하였다. 농사, 사냥, 어로활동 등으로 먹거리를 해결했다. 돌로 만든 공구로 옥돌을 다듬어 목걸이 등을 만들었다.

돌로 만든 도구
돌화살, 돌창,  그물추등으로 사냥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았다.
옥으로 만든 장신구 (대롱옥, 옥꾸미개, 곱은 옥), 숫돌, 옥조각, 옥에 구멍 뚫는 도구

농경문 청동기

   가운데 세로무늬 띠가 있어 좌우 공간으로 나누어진다. 한 해의 농사 과정과 솟대가 표현되어 있다. 고리가 달려 있지 않은 앞면에는 머리 뒤에 긴 깃털을 꽂고 벌거벗은 채로 밭을 일구는 사람, 괭이를 치켜든 사람, 항아리에 뭔가를 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반대편에는 두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가 있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솟대를 표현한 것이다.


   방패형 농경문 청동기도 유사한 형태다.

농경문 청동기(1)
방패형 농경문 청동기(2)
고무래, 돌괭이

붉은 간토기와 가지무늬토기

붉은 안료를 개어 발라 문질러 매끄럽고 윤이 난다. 세련된 모습이다. 무덤의 껴묻거리로 사용되었다.

붉은 간토기와 가지무늬토기

석검의 상징성

   돌을 정교하게 갈아서 만들었다.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유물이다. 실용성은 떨어진다. 무덤의 껴묻거리로 출토된다.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여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

   우두머리의 죽음과 장례식에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였다. 무덤에 넣은 청동검과 석검등은 죽은 자의 위세와 권위를 보여준다.

고인돌

<참고 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팸플릿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글이 길어져  고조선 부여 삼한 시대는 다음 편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창녕 우포늪 이야기(조류독감 경보, 해제!)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