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중앙박물관 탐방(2)
가야를 더한 4국 시대의 생활이 궁금하였다. 신라(국립 경주박물관), 백제(한성 백제박물관, 국립 공주박물관, 국립 부여박물관), 가야(고령 대가야박물관, 창녕 박물관-비화가야)를 탐방했었다.
고구려의 유적지가 있는 아차산을 방문한 후, 고구려 유물이 더욱 궁금하였다. 고구려 유물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2024.11.16, 토, 비)하였다. 그날은 선사시대~고구려관이 리모델링 중이어서 관람하지 못했다. 드디어, 전에 관람하지 못했던 선사시대~고구려관을 볼 기회(2025.02.22 토, 맑음)를 잡았다.
전회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에 이어, 금회 고조선 낙랑 부여 옥저 동예 삼한의 유물에 대하여 보고 드린다.
잠깐, 알려드립니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의 선사시대, 고조선,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 대한제국까지 한민족 역사 전체를 브런치북에 담았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국립중앙박물관 입문서"입니다.
고조선, 낙랑, 부여, 옥저, 동예, 삼한
우리 역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나라는 단군왕검 할아버지의 고조선이다.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진한 변한 마한)이 나타났다. 특히 남부의 진한 변한 마한은 훗날 신라 가야 백제로 성장 도약했다.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 할아버지가 세웠다. 기원전 108년 중국 한나라에 의해 멸망(우거왕)되었다. 고조선은 기원전 4~3세기경 중국 연나라와 대립하였고 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 준왕 등 강력한 왕이 등장하였다. 왕 아래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을 두었다. 8조 금법이 있었다. 그중 3개가 중국 역사서인 한서(漢書)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도적질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용서를 받고자 하는 자는 50만 전을 내게 했다.
남양주, 가평 등 북한강 유역의 움무덤에서 화분 모양 토기, 배부른 단지 등과 함께 을 (乙) 자 모양 동기(마차 부속품의 일부였음), 세형동검, 쇠도끼 등은 고조선의 특징적인 유물이다. 기원전 2~1세기 무덤들은 고조선 남쪽 영역 혹은 남부 지역과의 교통로 상에 있는 지역 세력이거나 고조선 멸망 후 유이민의 흔적이다. 이를 통해 기원전 108년 고조선 멸망 전후 고조선의 문화가 한반도 중남부지역으로 전해졌다.
고조선의 청동기
청동검은 비파를 닮아 비파형 동검이라고 부른다. 기원전 10세기에 만들어졌으며, 중국 랴오닝(요령) 길림(지린)과 한반도에서 발견된다. 기원전 5~4세기에 청천강 남쪽에서 발견된다.
철기의 등장과 고조선의 발전
고조선은 중국 연나라와 교류하고 경쟁하면서 중국 철기문화를 받아들였다. 연나라의 손칼모양 명도전과 철제품이 요동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서 출토되었다. 세형동검이나 마차 부속품등은 고조선의 문화 수준을 잘 보여준다.
비파형 동검
칼의 모양이 비파라는 악기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칼과 손잡이를 따로 만들고 나중에 합쳐서 만들었다. 손잡이는 한 손으로 쥐기에 적당하다.
낙랑은 한(漢) 무제가 고조선의 옛 땅에 기원전 108년에 설치했다. 이후 기원후 313년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었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반도 중북부설이 통설이지만, 중국 요동, 요서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새로움과 전통이 융합한 낙랑 문화
고조선 옛땅에 낙랑이 들어섰지만, 한동안 고조선 전통의 세형동검, 짧은 목 항아리를 계속 사용하였다. 고조선은 북방의 유목민 흉노와 가까웠다. 흉노 특유의 말장식과 청동그릇이 무덤에 꺼묻거리로 묻혔다.
낙랑 토기
고조선 때부터 사용해 오던 화분모양 토기와 짧은 목 항아리는 낙랑이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 만들어져 무덤의 껴묻거리로 사용되었다. 바닥이 평평한 그릇, 두꺼운 항아리, 뚜껑 있는 그릇등 다양한 토기가 사용되었다.
낙랑의 청동 그릇
낙랑 덧널무덤에서 청동그릇이 출토되었다. 기원전 1세기 북쪽 유목민들이 사용하던 술을 담거나 따뜻하게 데우는 데 사용한 청동솥(동복)과 철솥(철복) 등이 나왔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기원후 494년까지 북만주지역 길림성에 수도를 세운 예맥족(濊貊族)의 국가다. 기원후 346년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다. 동부여와 북부여로 분리되었다. 동부여는 기원후 410년 광개토왕에 의해 병합되었다. 북부여도 마침내 494년(문자왕 3)에 소멸되었다. 형사취수제도가 있었다. 정월에 제사를 지냈는데, 영고라고 했다.
부여는 고조선 다음에 나타난 나라다. 농사와 목축이 주업이었다. 말 구슬 모피가 특산물이었다. 고구려 백제 왕실은 스스로 부여 후손이라고 여겼다. 길림의 마오얼산의 무덤군에서 화려한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그 인근 지방(위수 라오허선 시펑 시차거우 등)에서 다양한 무덤이 확인되었다. 사출도로 대표되는 부여특유의 통치 제도가 있었다. 사출도는 왕이 중앙을 지배하고, 마가 우가 구가 저가등의 관리들이 나누어 통치했다.
아래 가면은 북만주 퉁퇀산(東團山) 마오얼산(帽兒山)에서 출토된 부여시대의 금동 얼굴모양 장식이다.
옥저는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기원후 285년까지 러시아 연해주와 함경도 일대에 존재했다. 왕은 없었다. 각 지역(읍락)의 우두머리(군장)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통일된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고구려의 간섭과 견제로 결국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두만강 일대의 단결문화(크로우노프카)가 옥저 문화로 추정된다. 민며느리제도가 있었다. 여성의 나이 10세 되기 전에 혼인을 약속하고, 신랑집에서 여성을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펴 준후, 아내로 삼는 제도다. 가족 공동 무덤이 있어, 가매장 후 뼈만 추려 하나의 곽속에 넣었다.
동예는 기원전 82년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한반도 동북부와 강원도 일대에 자리했다. 옥저와 비슷한 수준의 사회로 읍락들은 산과 천을 경계로 영역을 엄격히 지켰다. 경계를 어길 경우 노예나 소 말로 변상하는 제도가 있었다. 매년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무천이라고 불렀다.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며 놀았다. 단궁(박달나무로 만든 활)과 바다에서 사는 바다표범의 가죽(반어피)이 특산물이다. 표범이 많았다. 과하마(키가 작은 조랑말)가 많았다.
마한·진한·변한을 말한다. 삼한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마한은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진한과 변한 은 경상도지역으로 본다. 신지 읍차라는 군장이 다스렸다.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지역인 소도가 있었다. 변한은 철 생산이 풍부하여 화폐처럼 사용했고, 낙랑 왜 등에 덩이 쇠를 수출하였다. 5월 수릿날과 10월 계절제가 있었다. 남녀가 몸에 문신을 새기는 풍습이 있었다.
동아시아 정세 변화와 삼한의 국제교류
중국과 한반도, 일본 사이의 중계 무역을 독점하던 고조선의 멸망 후, 삼한은 대륙과 직접적인 교류를 했다. 중원 북방 왜와 접촉을 했다. 중국과의 교류는 청동 세발솥, 김해 양동리의 후한의 거울, 울산 하대의 청동정, 동전(사천 늑도의 반량전, 창원 다호리의 오수전, 인천 운북동의 오수전, 제주 금성리의 화전, 장흥 평화리의 대포황천 등)등 유물이 있다.
일본과의 교류로 경남 창원 다호리의 야요이 토기, 경남 김해 양동리의 청동 투겁창, 창원 삼동동의 청동 거울등 유물이 있다.
문자의 사용과 교역
우리나라에서 문자가 처음 사용된 시기와 증거는 기원전 1세기 경남 창원 다호리 1호 무덤에서 붓과 손칼이 발견되었다. 대나무나 나무판에 글을 쓰고 지우는 데 사용하였다. 다양한 재료로 만든 저울추가 삼한 유적에서 발견되어 당시의 교역활동이 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동 세발솥
울산 대리리에서 중국계 청동 세발솥이 출토되었다.
오수전
오수전은 한나라 무제 때인 기원전 118년에 처음 만들어진 동전이다. 수는 무게 단위로 1수는 0.65g이며 오수전 무게는 3.25g이다. 24수는 1량(15.6g)이다. 오수전은 기원후 621년까지 사용되었다.
대포황천(아래 1, 2번), 반량전, 오수전, 청동거울
마한 토기
경기 충청 전라지역의 마한에서 옹, 항아리, 시루등이 발견되었으며, 토기의 입 주변에 띠를 덧댄 겹아가리, 항아리와 양쪽에 구멍이 있는 손잡이가 달린 귀 달린 항아리가 대표적이다.
예족의 경질민무늬 토기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 토기와 비슷하지만, 더 높은 온도에서 구워 단단하다. 작은 단지, 항아리, 시루, 큰독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평평한 바닥과 밖으로 벌어진 입이 있는 토기가 대표적이다.
지역색을 담기 시작한 토기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중남부 지역의 토기는 독자적인 특색을 띠기 시작했다. 밀폐된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더욱 단단해졌다. 밑이 둥글거나 굽다리가 달리는 등 다양한 토기로 발전했다.
진한 변한의 와질 토기
와질토기는 기와와 비슷한 질감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운 점토로 구어 회색이나 어두운 색을 띤다. 주머니모양 항아리와 쇠뿔손잡이 항아리가 대표적이다. 나중에 굽다리가 달린 토기와 화로 모양의 그릇받침 모양으로 나타났다.
철기 만들기(제련)
용광로에 철광석과 숯을 넣어 가열하면, 철보다 녹는점이 낮은 불순불(슬래그)이 노의 외부로 먼저 흘러나온다. 슬러그가 나오고 나면, 그 후 철이 녹아서 나온다.
철도끼와 거푸집
붕어빵틀처럼 철도끼 거푸집(2개의 틀) 안에 쇳물을 부으면 도끼 모양이 만들어진다.
삼한의 철기
삼한 지역에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지만, 청동기도 함께 사용되었다. 농기구 공구 무기류는 철로 바뀌었지만, 세형동검 등 상징적인 청동무기는 2세기 중반까지 사용되었다. 진한 변한 지역에서는 오히려 화려한 청동기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철기 문화
한반도에 철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세기 무렵이었다. 전국적으로 사용된 것은 기원전 1세기경이었다. 처음에는 공구 농기구가 철로 만들어졌으나, 차츰 효율이 좋은 도구의 보급, 사용은 삼한 지역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와,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다.
철을 만들 때 약 60~80kg 철을 생산하기 위하여 철광석 400kg과 숯 800kg이 소요된다고 한다. 즉, 철 1kg 만드는데, 숯 10kg이 필요하다. 숯을 만들려면 나무를 베고 숯가마에서 구워야 했으니, 많은 시간과 노력과 재료가 필요하므로, 발달한 사회에서만 생산이 가능했다.
한반도 남부의 세형동검 문화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강력한 지배자가 출현되었다. 돌무지널무덤에서 청동 무기, 공구가 출토되었다. 많은 양의 청동기를 무덤에 넣은 것은 청동기를 독점할 수 있는 강력한 사회계층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韓) 사회의 태동
기원전 3~2세기에 한반도 서남부에 한(韓) 사회가 출현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청동 방울이 발견되었다. 팔주령, 쌍두령, 간두령등이다. 청동방울은 흔들어서 소리를 내어 귀신을 쫓거나 부르는 데 사용되던 의식용 도구다. 기원전 3~2세기 한반도 서쪽과 남쪽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팔주령
8개의 가지 끝에 달린 청동 방울이다. 몸통은 팔각형으로 중앙이 오목하며 안쪽은 비어있어 흔들면 소리가 난다. 뒷면에 반원 모양의 고리가 있어 옷 등에 매달 수 있다.
제사장의 화려한 청동기
기원전 3~2세기 지배층 무덤에서 청동검 청동거울 여덟 가지 방물등이 발견되었다. 지배층은 정치적 종교적 제사장의 지위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지배권력의 성장
청동기 시대 거대한 고인돌은 공동체의 위엄을 상징한다. 석검, 옥목걸이, 토기등의 부장품이 있었다. 지배자들은 특정의 희귀한 물품을 소유함으로써 권위를 드러낸다.
삼한 사람과 새
새를 본떠 만든 토기나 목기 청동기들이 출토된다. 새는 곡식의 씨앗을 가져다주거나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안내한다고 믿었다. 이승과 저승을 잇는 신성한 새라고 여겼다. 새에 대한 신앙의 결과물인 유물이 출토되었다.
큰 새의 깃으로 죽은 자를 보내는데, 죽은 자로 하여금 날아오르게 하고자 함이다.(삼국지 권 30 위서 동이전 한조)
삼한의 신앙과 의례
농경사회로 5월과 10월 씨 뿌릴 때와 거둘 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큰 나무에 북을 매달아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자연숭배와 개인과 마을의 안녕, 다산과 풍요, 사자를 공경하는 마음을 담았다. 사슴의 어깨뼈로 점을 쳤다.
통나무 널을 만들고 옻칠한 칼집과 청동검, 별 구름무늬의 청동거울등 부장품을 넣었다.
<참고 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팸플릿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 별별 한국사(최태성 저)
글이 길어져 고구려, 백제, 신라는 다음 편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