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5)
가야를 더한 4국 시대의 생활이 궁금하였다. 신라(국립 경주박물관), 백제(한성 백제박물관, 국립 공주박물관, 국립 부여박물관), 가야(고령 대가야박물관, 창녕 박물관-비화가야)를 탐방했었다. 고구려 유적이 있는 아차산 등산 후, 고구려를 좀 더 알기 위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2024.11.16와 2025.02.22)하였다.
가야 유물들은 고령 대가야박물관 탐방( https://brunch.co.kr/@jylee2020/200와 https://brunch.co.kr/@jylee2020/201, 2024.11.02 탐방)과 창녕 박물관-비화가야 탐방(https://brunch.co.kr/@jylee2020/210 와 https://brunch.co.kr/@jylee2020/211, 2025.01.26)를 통하여 이미 보고 드렸다. 예습이 어느 정도 되어 있어 눈에 익었고, 친구를 만난 것처럼 몹시 반가웠다.
가야는 낙동강 유역의 작은 나라였던 변한에서 출발했다. 여섯 가야 연맹체는 금관가야(김해, 기원후 42~기원후 532년) 대가야(고령, 기원후 42~기원후 562년) 아라가야(함안) 비화가야(창녕) 성산가야(성주) 소가야(고성)를 말한다. 발달한 철기 생산 능력과 우수한 해운 입지 조건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덩이쇠가 그 증거다.
초기에는 금관가야(김해, 532년, 신라 진흥왕에 병합))가 중심이 되어 북방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바닷길을 이용하여 낙랑, 왜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교역 역할을 했다. 5세기 이후는 대가야(고령, 562년, 멸망)가 중심이 되어 아라가야, 소가야 등과 함께 발전했다. 부드러운 곡선을 활용한 금속공예품, 구슬 장신구, 철제 판갑옷등 다양성이 담겨 있다. 지배자 무덤에서는 유물과 순장 풍습등으로 보면 당시 가야가 백제, 신라와 대등한 발전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탄생 신화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두 가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차이점은 형님이 세운 나라 이름이다.
삼국유사는 금관가야,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대가야가 형님 나라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기원후 42년 하늘에서 여섯 개의 황금알이 구지봉에 내려왔다고 한다. 그 알에서 여섯 아이가 태어났는데, 첫째를 수로라고 불렀다. 수로는 금관가야를 세웠다.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여러 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은 가야의 산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가 낳은 아이가 각각 대가야(첫째, 이진아시왕, 고령), 금관가야(둘째, 수로왕, 김해)의 왕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즉, 형님이 대가야를 세웠다. 고령시장 입구 간판 등 시내 곳곳에 신화를 바탕으로 한 정견모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히 합천해인사 경내에 정견모주를 모신 사당이 있는데,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역사가 아주 깊다.
사슴장식 구멍 단지
단지의 아가리 아래쪽에 사슴 두 마리가 장식되어 있다. 밑이 둥근 공모양이며, 중앙 한쪽에 구멍이 뚫려 있다. 몸체 위에는 넓게 벌어진 깔때기 모양의 아가리가 있다. 사슴은 고대 북방 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이 신성시한 동물이었다.
가야의 왕 급 지배자의 무덤에서 순장 풍습을 볼 수 있었다. 강력한 지배자였음이 밝혀졌다. 신라의 경우 비인간적인 순장제도가 502년(지증왕 3년) 종식되었다.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했는데, 이를 폐지했다(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는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즉, 신라에 복속되기 전의 금관가야, 대가야와 비화가야(非火伽倻) 시대에 순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천주교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본인이 모르는 어떤 무덤에 가서 사자를 위하여 기도해 주면, 대사면을 받는다고 한다. 즉, 속세의 모든 죄를 면하여 준다는 것이 있다. 물론 민형사상 범죄행위는 제외다. 그 왕릉군에 묻힌 모든 사자들을 위하여 기도드리고 있다. 특히, 경남 창녕 비화가야의 송현이는 더 특별하다.
김해 금관가야
김해 대성동 고분군 (1호 무덤)에서 5인의 순장 인골이 발견되었다.
고령 대가야
44호 고분 순장
약 40여 명이 순장되었다. 가운데에 3기의 큰 돌방이 있다. 그중 가장 큰 돌방은 무덤의 주인인 왕이 묻힌 으뜸돌방이다. 다른 2기는 왕의 내세 생활을 위해 껴묻거리를 넣은 딸린 돌방이다. 으뜸돌방에는 왕과 2명의 순장자가 있었고, 딸린 돌방에서도 각각 1명의 순장자가 확인되었다.
돌방 주변에는 32기의 순장덧널이 배치되어, 대략 40여 명이 순장되었다. 순장된 사람들은 1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의 남자와 여자로,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딸, 형제자매가 함께 순장되기도 했다. 역할도 왕의 저승생활을 위한 시종과 시녀, 호위무사, 창고지기, 마부, 일반백성 등 다양하다.
창녕 비화가야(송현이)
2007년 12월 송현동 15호분(현재 송현동 1 지구 10호분) 발굴현장에서 1500여 년 전 '송현이'를 비롯해 총 4구(남 2명, 여 2명, 머리 동쪽하고 남자-여자-남자-여자 순)의 순장자 유골이 발견되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중심의 여러 연구 기관이 1년간 연구 끝에 완벽하게 복원해 냈다. '송현이'의 탄생은 고고학을 비롯한 유전학, 법의학, 물리학, 인문학, 의학, 자연과학분야 최고 전문연구자들의 융합연구와 최첨단 과학기술이 합쳐진 결과물이다.
발견된 인골의 넓적다리 뼈를 통해 키를 대략 추정한 결과, 성장판조차 닫히지 않은 16세 가야소녀였다. 발굴된 뼈대를 디지털화하고 복제 뼈를 만들어 조립한 다음 인체 통계학 자료를 바탕으로 근육과 피부를 복원하는 과정을 거쳐 최종 키 153.5㎝, 허리 21.5인치인 가녀린 몸매의 소녀를 복원해 '송현이'라 명명했다.
쇠납작 도끼, 덩이쇠, 농공구, 굽은칼, 쇠낫, 손칼, 단야구, 쇠망치, 모루
가야의 말갖춤
가야의 말갖춤은 기능에 따라 말을 제어하는 재갈, 굴레, 고삐 등과 말에 탄 사람을 안정시키는 안장 발걸이 가슴걸이, 말을 꾸미는 말방울 말띠드리개 기꽂이등으로 나뉜다.
초기의 말갖춤은 북방 기마민족과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점차 가야의 독자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초기는 실용성 위주였으나, 점차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꾸며, 사용하는 지배자의 위상을 높였다.
갑옷과 투구
가야는 초기에 큰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판 갑옷과 투구를 사용하였다. 보병중심의 소규모전투에서 점차 말을 타고 벌이는 대규모 전투로 바뀌면서 갑옷과 투구를 대량생산했다. 더욱 발전되어 작은 철판을 엮어 만든 비늘 갑옷을 제작하여 편리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또한 말에도 투구와 갑옷을 입혀 방어력을 높였다.
무기
칼 창 활 등 용도에 따라 다양한 철제 무기를 만들어 전투에 사용하였다. 점차 성능이 개선되고, 실용성과 권위의 상징인 큰 칼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손잡이를 용과 봉황 등의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한 고리자루 큰 칼은 지배자의 정치 군사적 지위의 상징물로 활용했다.
굽다리에 가야의 특징인 상하 일렬의 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는 굽다리 접시다. 단추모양의 꼭지가 얹혀 있어 한 세트를 이룬다. 금관가야 왕의 무덤인 대성동 1호 에서 출토된 토기는 세련된 토기문화를 보여준다.
3세기 후반부터 더욱 발전된 기술을 이용하여 더 단단한 토기를 생산했다. 물레를 빠르게 돌려 모양을 만들고 표면을 매끄럽게 했다. 1,000~1,200도 정도의 고온과 밀폐된 가마에서 구워 매우 단단했다. 그 결과 가야토기의 대부분은 짙은 회청색을 띤다. 유약을 바르지 않아도 높은 온도로 반질반질 윤기가 도는 자연유가 생겨 광택이 났다. 처음에는 어깨에 꼭지 두 개가 달린 항아리 형태로 만들었다가 더욱 다양한 토기를 제작했다.
지역마다 형태와 특징이 다르다. 금관가야는 아가리가 밖으로 나온 접시와 손잡이가 달린 화로모양토기가 대표적이다. 아라가야는 불꽃모양의 굽구멍이 뚫린 굽다리접시가 대표적이다. 대가야는 굽다리접시가 가로로 넓고 납작하여 안정감을 주며, 원통형 그릇받침에는 뱀이나 고사리모양과 같은 긴 띠가 붙어있다.
소가야의 그릇받침과 항아리의 끝이 수평으로 꺾여 벌어져있다. 비화가야는 그릇 뚜껑에 애벌레 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접시는 얇은데 비해 굽다리가 굵은 굽다리접시가 많다.
가야는 당시 중국과 한반도, 왜를 연결하는 국제 교류의 중심지였다. 바다항로를 이용하여 중국, 북방지역과 고구려등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왜와 활발하게 교역하였다.
가야지역에서 출토되는 중국중원지역의 청동 거울과 그릇, 북방 유목민족 관련된 청동솥과 말갖춤등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금관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바람개비 통모양 청동기 등 왜와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일본 규수, 킨키등의 지역에서도 가야 계통의 유물이 확인되고 있어 당시 가야의 국제성을 알 수 있다.
청동 솥
북방 유목민족들이 말 등에 싣고 다니며 사용한 취사도구이다. 오르도스형 청동 솥이라고 한다.
가야는 는 바다와 접한 지리적 특성과 풍부한 철 자원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낙랑, 왜등 주변국과 활발히 교역했다. 새로운 철기 토기 제작 기술을 받아들이고.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동북아 해상무역의 중심지로서 일본에까지 전해져 스에키와 같은 새로운 토기문화 성립과 철기 문화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원통모양 그릇 받침
대가야지역의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아랫부분은 마치 치마를 입은 것처럼 부풀려져 있다. 윗부분은 바깥으로 벌어져 있어 작은 항아리를 올리기에 안정적인 모양이다. 몸통전체에는 세모꼴 네모꼴의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 있어 화려한 느낌을 준다. 원통의 옆면에는 끝이 말려 있는 긴 띠가 세로로 부착되어 있는데, 대가야 원통모양 그릇받침의 큰 특징이다.
<참고 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팸플릿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www.museum.go.kr)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 별별 한국사(최태성 저)
글이 길어져 신라 및 발해는 다음 편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