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백제(百濟), 국립중앙박물관 탐방 입문서

국립 중앙박물관 탐방(4), 위례성 웅진성 사비성의 백제

by 애바다
20241116_105546.jpg 국립중앙박물관
img1.daumcdn.png 백제관(106)

정약용 선생은 삼한 가운데 백제가 가장 강하고 문화가 발달하였다고 했다.(三韓之中 百濟最强最文, 강역고 疆域考) 단 하나의 예를 들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백제금동대향로를 말하겠다. 백제의 모든 것이 백제금동대향로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백제라는 단어에는 뭔가 잃어버린 유물 같이 쓸쓸함과 비애와 고독이 묻어 있다.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간다.

백제의 전성기(근초고왕) 지도 / 백제 연표

가야를 더한 4국 시대의 생활이 궁금하였다. 신라(국립 경주박물관), 백제(한성 백제박물관, 국립 공주박물관, 국립 부여박물관), 가야(고령 대가야박물관, 창녕 박물관-비화가야)를 탐방했었다. 아차산 등산 후, 고구려를 좀 더 알기 위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2024.11.16와 2025.02.22)하였다.



잠깐, 알려드립니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의 선사시대, 고조선,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 대한제국까지 한민족 역사 전체를 브런치북에 담았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국립중앙박물관 입문서"입니다.



백제유물들은 이미 방문한 박물관들(한성 백제박물관, 국립 공주박물관, 국립 부여박물관)에서 대략 눈에 익혔고, 몹시 반가웠다.

백제 개관 / 백제관 입구의 미래의 대한민국 주역, 꿈나무 친구들

백제 (百濟)

백제의 첫 수도 위례성(풍납토성-내성, 몽촌토성-외성) / 백제 건국

백제의 수도 변천사와 시기별 대표적 상징(물)과 특성을 잠깐 살펴본다. 백제 관련 지역 및 박물관인 위례성(서울, 한성백제박물관), 웅진성(공주, 국립공주박물관), 사비성(부여, 국립부여박물관)을 방문한 결과를 백제의 품격(https://brunch.co.kr/brunchbook/jylee2031, 백제의 위례 한성~공주~부여)이라는 주제로 이미 보고를 드렸었다. (대표적 상징 왕/성곽/무덤/박물관. 부장물. 특징)

몽촌토성 / 칠지도(근초고왕, 한성백제박물관) (한성 위례성 시대)

1) 한성 위례성 시대 BC 18~ AD 475 (1대 온조왕~21대 개로왕, 약 495년간, 백제 총 680년의 73%, 2024.09.28. 방문)

근초고왕(칠지도)/풍납. 몽촌토성(서울)/석촌고분(적석총)/한성백제박물관(풍납토성 축성 장면, 실물형태, https://brunch.co.kr/@jylee2020/185)

공산성(공주) / 금동 신발(무령왕, 국립공주박물관) (웅진성 시대)
무령왕(국립공주박물관)

2) 웅진성 시대 AD 475~ AD 538 (22대 문주왕~ 25대 무령왕 성왕 16년, 공주, 약 64년간, 2024.10.01. 방문)

무령왕(백제 금동 신발)/공산성(공주)/무령왕릉(벽돌분)/국립공주박물관(진묘수, 금제관식, https://brunch.co.kr/@jylee2020/192)

부소산성과 백마강 / 백제금동향로 (국립부여박물관) (사비성 시대)
성왕상(부소산성 앞)

3) 사비성 시대 AD 538~AD 660 (26대 성왕 16년~ 31대 의자왕, 부여, 약 123년간, 2024.10.03. 방문)

성왕(사비천도)/부소산성. 나성(부여)/부여왕릉원(동하총-1호, 돌방무덤)/국립부여박물관(백제금동대향로, https://brunch.co.kr/@jylee2020/194)


전회,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의 선사 시대와 고조선 낙랑 부여 옥저 동예 삼한 고구려에 이어, 금회 백제의 유물에 대하여 보고 드린다. 이번 회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제 유물 중심으로 살펴본다.


한눈에 보는 백제 연표 (출처 : 국립 부여 백물관)

백제 약사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부여족 계통인 온조왕(1대) 집단에 의해 위례 한성(지금의 서울), 한강을 중심으로 한인·예인 등의 토착 세력과 결합하여 건국하였다. 점차 마한의 여러 소국을 통합하면서 고대국가로 성장했다. 3세기에는 마한의 여러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가 되었다. 4세기에는 영토가 넓어지고 국제적 위상이 올라갔다.

백제 13대 근초고왕의 고구려 평양 공격(고구려 고국원왕 전사, 371년) /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백제 한성 함락(백제 개로왕 전사, 475년)

이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국력이 약해져 웅진(AD 475~ AD 538)으로 도읍을 옮겼다. 무령왕은 정치적 혼란을 잘 수습하고, 중국 일본과 외교에 힘써 재도약했다.

백제 22대 문주왕의 웅진(공주) 천도 (475 년) / 백제 26대 성왕의 사비 (부여) 천도 (538년)

사비 시기(AD 538~AD 660)에는 생산 경제가 발달하면서 도성과 사찰, 능묘를 중심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문화를 꽃피웠다. 외교적으로는 중국 남북조를 비롯, 신라 가야 왜 등 주변 국가와 활발한 교류를 하여 고대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당에 의해 기원후 660년 멸망했다.

풍납토성 성벽 축성 공사 현장 모형 (출처 : 한성 백제 박물관 1층)
풍납토성 성벽 단면 (출처 : 한성 백제 박물관 1층)

왕권 강화

마한의 여러 나라 중 하나였던 백제는 3세기 이후 중앙 행정 조직을 정비하고 관료 제도를 마련하여 점차 왕을 중심으로 한 체계적인 통치 체제를 갖춰 갔다.

풍납토성(한성 위례성, 내성)

법령을 정비하고 도성을 비롯한 성곽을 축조해 가는 과정은 백제가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몽촌토성(한성 위례성, 외성)

백제의 도성이나 왕궁은 서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공주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과 관북리 유적,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확인된다.

공산성(공주) / 무령왕 동상 (공주 공산성 앞)

백제는 왕권을 강화하며 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주변으로 영향력을 키워 갔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다양한 철제 무기는 백제의 강력한 군사력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부여 관북리 유적지(부여)
석양의 낙화암과 백마강 / 부소산성 안내표시(부여)
삼천궁녀(낙화암 고란사 벽면 그림) / 궁녀사 / 궁녀제 현수막 : 부소산성

건축 문화

백제의 뛰어난 건축 기술은 도성과 사찰에서 잘 드러난다. 한성 시기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의 성벽은 진흙과 모래 등을 번갈아 다져 가며 쌓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이 기술은 백제의 성곽이나 독립의 기단, 둑 등을 쌓는데 폭넓게 이용되었다.

부여의 나성

사비도성은 도읍을 옮기기 전부터 사잔에 도시 계획을 수립하여 방어를 위한 나성을 비롯해 왕궁 관청등을 만들었다. 특히 물길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만든 체계적인 수도 시설은 당시 건축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 준다.

정림사지 오 층 석탑(국보 제9호)
부여 왕흥사지 발굴 조사중(출처: 국가유산청) / 익산 미륵사탑 (출처 : 국가유산청)

백제를 대표하는 사찰에는 정림사 5층 석탑과 부여 왕흥사, 익산 미륵사 등이 있다. 이 사찰들은 백제의 우수한 건축 기술과 독창적인 건물 배치 방식을 보여 준다. 백제의 건축 기술은 왜의 건축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정림사 5층 석탑에는 백제가 멸망한 기원후 660년, 오만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백제를 평정하였다고 탑신 1층 4면에 낙서(대당평백제국비명, 大唐平百濟國碑銘, 2,126자)를 해 놓고 갔다. 한동안 정림사 5층 석탑을 평제탑이라고 잘못 부르기도 했었다. 깊이 세겨야할 우리의 아픈 역사다.


치미

기와 건물 지붕의 용마루 양 끝에 자리한 쿤장식 기와를 말한다.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것을 의미하는 왕흥사 치미가 각각 한 점씩 출토되었다. 전체를 한 몸으로 제작해 위아래로 잘라 구워냈다. 백제 기와 장인의 혼을 담은 예술품이다.

부여 왕흥사 치미
치미 제작 방법과 부위별 기와 종류
그릇 받침 / 벽돌, 수막새 / 흙으로 만든 굴뚝
그릇 받침 / 벽돌, 수막새 / 흙으로 만든 굴뚝


종교와 사상

백제는 고대 국가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국가를 통합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필요했다. 건국 초기에는 시조가 되는 조상신과 하늘에 있는 천신, 땅에 있는 지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나 점차 종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을 강화하는 기반으로 삼았다.

목간 / 무늬 벽돌(도교의 신선 사상)

불교는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크게 흥성했다. 국가 주도로 많은 사찰과 의식 출구들이 만들어졌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도교는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신선사상과 결합하여 귀족 사회에서 환영받았다. 금동대향로, 산수무늬 벽돌등에서 도교가 성행했음을 엿볼 수 있다.


무늬 벽돌

부여 외리 절터에서 발견된 산수풍경, 산수봉황, 연꽃 도깨비, 용, 봉황, 연꽃, 연꽃구름의 무늬로 구성되어 있다. 크기가 일정하고, 네 귀의 측면에 홈이 파여 있어서 서로 연결하여 고정시킬 수 있다. 도교적 이상형과 상서로운 동물,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의미의 무늬로, 백제 미술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금귀걸이, 유리목걸이, 반지, 팔찌, 목걸이, 항아리, 귀 달린 항아리, 넓은 입 항아리

지방 운영

삼국의 대치 속에서 지방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국가의 생존과 발전에 중요한 문제였다. 한성 시대에는 지역 세력가에게 금동관이나 신발, 중국제 자기와 같은 귀한 물품을 희사함으로써 영향력을 과시했다. 사비 시기에 은으로 만든 물품을 제공했다.


4세기 후반에 통합한 나주 영산강 유역에서는 죽은 사람을 항아리에 넣어 묻는 매장 문화가 이어졌다. 6세기 중엽 이후 돌로 방을 만들고 흙을 쌓아 묻는 돌방무덤으로 바뀌었다.

검은간토기, 나주 복합리 3호 무덤 신발 관 꾸미개, 남해 남지리 허리띠, 갈고리창, 양갈래, 항아리, 귀 달린 항아리, 넓은 입 항아리
청자 뚜껑 항아리 , 닭모양 항아리, 청자잔 / 새고리장식 큰칼
갈고리창, 양갈래창(부여 부소산성)
곱은 입 짧은 목 항아리, 벼루, 돌추, 목간, 구구단 목간(풍납토성)
굽다리 접시 / 세발접시, 호자, 장군

여러 나라와 문화교류

백제는 주변 여러 나라와 교류를 했다. 동진을 비롯 남조로부터 도자기와 벽돌무덤 같은 양식을 받아들였다. 이웃 신라와 가야, 왜와도 교류를 하였다. 특히 왜에 불교를 전하고 학자와 기술자등을 파견하는 등 고대 왜 아스카 문화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호자, 청자 벼루, 청동도장, 청동 자루솥, 뚜껑접시

호자

전시실에는 재미있는 모양의 그릇도 보인다. 남성이 사용한 요강이다. 호랑이 모습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남성과 여성 요강의 형태가 다르다. 기발하면서도 여유가 있다.

청자 호자, 청자 벼루, 중국도자기, 청자사발 / 호자(남성용, 여성용, 국립 부여박물관)

청동 자루솥

양직공도, 청동 도장, 청동자루솥
백제 토기

목간

나무에 기록된 백제문화를 볼 수 있다. 구구단 남근형 신세한탄 망부가등 다양한 내용이다. 그 가운데 특이한 것은 구구단 목간이다. 예를 들면, 7*9= 63, 6*8=48등이다.


빌려준 곡물과 돌려받은 곡물 입출 현황을 기록한 장부로 추정한다. 이목 간은 국법의 공식을 차례대로 적은 이른바 구구단 목간이다. 첫째 줄에는 상하 방향으로 제곱 갓이 적혀 있다. 곱셈이 필요할 때 어디서든 손에 쥐고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삼국시대 ㄱ구단 홀용을 할 알 려주는 실물자료이며, 구구단이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음을 알려준다.

구구단 목간
구구단 목간
백제의 무덤

백제의 무덤

돌무지무덤(석촌 고분군 2호)

돌무지무덤

돌을 쌓아 만든 무덤으로 주로 한강 유역에서 확인된다. 서울 석촌동 무덤이 대표적이며 백제 초기 지배층의 무덤이다.

무령왕릉 목관과 진묘수

벽돌무덤

벽돌을 쌓아 만든 긴 네모 모양의 터널식 천정인 널방무덤으로 중국 남조로부터 받아들인 무덤 방식이다 공주 송산리 6호 무덤과 무령왕릉이 대표적이다.

돌방무덤(부여 왕릉원 동하총 1호)

돌방무덤

네모모양의 돌방 한쪽에 출입 시설을 만든 무덤으로 추가 매장이 가능하다. 사비 시기에는 평평한 천장이 유행하는데, 벽면에 사신도가 그려진 무덤도 등장한다.

독널무덤 (나주 영산강 유역)

독널무덤

거대한 독널을 만들어 매장한 무덤이다. 나주 영산강 유역 주변에서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유행했으며, 나주 반남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국립 부여 박물관 / 최초 발견 당시 모습(부여 능산리 사찰 공방터)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동양 최고의 금속공예품인 백제금동대향로다. 높이 61.8cm, 무게 11.85kg이다. 1993년 부여 능산리 사찰의 공방터에서 발견되었다. 금동대향로는 향을 피울 때 쓰는 향로로,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되었다. 향로를 떠받치고 있는 용, 연꽃잎으로 장식된 몸통, 산봉우리와 봉황이 있는 뚜껑 등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뚜껑에는 봉황이 정상에 앉아 있다. 다섯 방향으로 쌓아 올린 봉우리에는 다섯 악사들과 현실 세계 동식물, 상상의 동물등이 묘사되어 있다. 연주하는 악사들과 호랑이 멧돼지 원숭이와 같은 동물들도 함께 묘사했다. 신선들이 사는 도교의 이상세계를 표현한 걸작이다. 뚜껑에 묘사된 산은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으로, 나무 바위 폭포 등이 표현되어 있다. 산 사이사이에서 향의 연기가 올라오게 만들었다. 향로 몸체는 연꽃 봉오리처럼 표현하고 3단으로 되어 있다. 받침은 용이 위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나타냈다.

백제금동대향로 제작 과정(국립 부여 박물관)

<참고 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팸플릿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www.museum.go.kr)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 별별 한국사(최태성 저)


글이 길어져 가야, 신라는 다음 편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keyword
이전 03화강한 나라, 고구려 (高句麗), 국립중앙박물관 입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