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중앙박물관(6)
신라 유물들은 '수원화성과 경주의 품격' (https://brunch.co.kr/brunchbook/jylee2030)과 국립 경주박물관( https://brunch.co.kr/@jylee2020/150, 2023.12.24 탐방)을 통하여 이미 보고 드렸다. 예습이 어느 정도 되어 있어 눈에 익었고, 친구를 만난 것처럼 몹시 반가웠다.
잠깐, 알려드립니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의 선사시대, 고조선,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 대한제국까지 한민족 역사 전체를 브런치북에 담았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국립중앙박물관 입문서"입니다.
신라는 진한 12개 소국중 하나였던 사로국을 모태로, 경주평야에 있던 6개 씨족집단의 연합으로 출발 기원전 57년 건국했다. 법흥왕 때부터 태종무열왕의 즉위 때까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를 완성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내물 마립간은 503년 국호를 신라로 정했으며, 마립간 대신 왕이란 호칭을 사용하였다.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527년)하여 통일을 위한 사상적 토대를 세웠다. 진흥왕(재위 540~576년)은 북으로 함경도, 서로는 한강 유역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통일전쟁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신라는 삼국통일 뒤 한반도의 주인공으로 군림하다가 935년 고려에 스스로 항복했다.
금관과 금허리띠
신라는 금관의 나라다. 금관은 머리띠에 나뭇가지와 사슴뿔 모양을 장식했다. 초기에는 맞가지 세 개를 세웠고, 사슴뿔 모양 장식 두 개가 조합되어 곱은 옥과 달개가 달린 전형적인 신라 금관이 완성되었다.
금관은 통치자이자 제사장인 최고 지배자 마립간과 그 일족의 정체성과 세계관을 나타낸다. 금허리띠는 띠고리, 허리띠 끝에 다는 띠 끝꾸미개, 가죽 또는 비단허리띠의 겉면을 꾸몄던 꾸미개, 허리띠에 매달아 드리웠던 띠드리개로 구성된다. 띠드리개에는 물고기 모양, 손칼, 곱은 옥 등이 매달려있다.
새 모양 주전자
새는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토기는 높은 굴 위에 새 몸체가 달려있는 형태다. 머리에는 닭 벼슬 같은 장식이 달려 있다. 새의 몸통은 비어 있고, 등과 꼬리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장례식 때 술이나 물을 따르는 데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신라의 3~4세기 지배층 무덤에는 새 모양 주전자를 묻는 풍습이 있었다. 장례에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죽은 이가 천상의 세계로 날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물(356~402) 마립간, 황금의 나라 신라를 열다.
내물 마립간은 '이사금'이란 왕호를 '마립간'으로 바꾸었다. 지역 소국 지배자 의미의 간(Khan) 보다 더 높은 지배자를 말한다. 황금 장신구로 복장을 꾸몄다. 황금을 통하여 나라의 위계를 바로 세웠다. 왕족 및 지방 호족은 금동 혹은 은으로 꾸민 복장을 하였다. 재질만 다를 뿐 모양은 마립간의 그것과 같았다.
신라의 황금 문화
일본서기에는 신라가 '눈부신 금은의 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906년 아랍의 지리학자인 알 마크디시는 창세와 역사서에서 '신라에서는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집을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도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라고 적었다. 황금기는 5세기부터 6세기 전반기다. 금관을 비롯 허리띠, 귀걸이 팔찌 반지 목걸이 장식대도에 금을 사용하였다.
신라의 정복한 지역 다스리는 방법
마립간시절, 정복지역을 그지역의 지배층의 후손들이 계속 다스리게 하는 간접 지배방식을 택했다. 피지배지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격식과 질이 약간 떨어졌다. 예를 들면 금관대신에 금동관 혹은 은관이 출토되었다. 대구 경산 의성 창녕 부산 강릉에서는 금동관이 발견된다.
상형 토우
신라는 토우(土偶)의 나라다. 무덤에서 다양한 형태의 토우가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서 '말 탄 사람 토우' 한 쌍은 국보 91호다. 무덤에서 말 오리 같은 동물과 배 수레 뿔잔 집 신발처럼 특정한 물건을 만든 상형토기가 발견됐다. 상형토기는 장례를 치를 때 술 같은 액체를 담아 따르는 데 사용했다. 의식이 끝난 후 사후세계를 위하여 무덤에 넣었다. 굽다리 접시나 긴목 항아리에 동물모양으로 지은 작게 빚은 토우를 붙이거나 무늬를 새겼다.
금령총 토우
1924년 경주 대릉원 북쪽 노동리 고분군에서 휘황찬란한 금관과 금제 허리띠, 귀고리, 금팔찌 금방울 등 금제 장신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금방울이 많이 나왔다 해서 '금령총(金鈴塚)'이라고 이름 지었다.
더불어, 말을 탄 형상의 토기 두 점이 나왔는데,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먼 여행을 하는 형상으로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었다. 잘 갖춰 입은 사람은 어린 왕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보호자 하인으로 추정한다. 즉, 일찍 세상을 떠난 다섯 살 어린 왕자에게 길을 안내하는 보호자를 길동무로 부모가 붙여준 것이다. 어린 왕자는 신라 제21대 소지왕(재위 479~500년)의 동생인 이사지왕의 아들(5세에 요절)로 추정한다고 한다. 이 토기들은 1000℃이상의 고열로 구워낸 경질토기(硬質土器)로 당시의 제철기술이 접목된 결과물이다.
문자 사용 확대
마립간 시기 말부터 일상생활에 문자를 사용했다. 많은 비석이 세워졌다. 포항의 냉수리비, 울진의 봉평리비는 여러 다툼을 조정한 판결문을 적었다. 북한산과 황초령에 세운 진흥왕 순수비는 영토확장 기념비다. 산성과 저수지를 만들거나 수리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도 있다.
돌방무덤 꾸미기
마립간 시기의 돌무지무덤은 규모가 크고 부장품이 화려하였다. 사후에도 현실이 이어진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후 불교의 수용과 돌방무덤의 도입은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을 변화하였다. 무덤 내부로 출입할 수 있는 길과 문을 마련하여 여러 번 장례를 치를 수 있었고, 부장품도 적게 넣었다. 돌을 다듬어 무덤을 만들면서 장식적인 조작 기법이 나타났다.
의례와 제기의 변화
중고기에 변화가 있었다. 장례용 제기는 짧은 굽다리 접시와 긴목 항아리를 세트로 단순한 구성으로 변화하였다. 마립간 시기 후반에는 금속제 그릇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이를 모방한 질그릇이 유행했다.
함안 성산산성의 목간
함안은 아라가야의 탄생지다. 목간에 나오는 감문(김천), 구리벌(옥천), 추문(의성)은 신라에 편입된 지역이다. 함안의 아라가야를 복속시킨 신라는 산성을 쌓으며 여러 지방의 물자와 인력을 동원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
숙종 탕춘대성과 북한산성 행궁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https://brunch.co.kr/@jylee2020/57)를 탐방했었다.(2022.08.27) 북한산 비봉에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발견했다. 훼손 마모 우려로 현장에는 원형을 본뜬 복제물로 대체하였고, 진본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아래 인용글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내용을 대신한다.
비봉(碑峰, 560m)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비봉 정상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555년 혹은 568년경) 세워진 이래 1,200여 년 동안 잊혀오다가 조선 말기의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金正喜)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비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로 옮겨져 보호를 받고 있다. 탁월하신 분임에 틀림없다. 비의 측면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고, 탁본을 남겼기에 지금은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를 후세인들이 그 탁본을 근거로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추사는 북한산성과 인연이 깊다.
물론 순수비 정상 등정은 탕춘대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코스는 아니다. 그러나 순수비를 보기 위하여 가족 혹은 동호회 등산객들이 지지대 철재 난간 하나 없는 ‘추락위험’ 지역으로 줄을 지어 올라가서 인생 샷을 날리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어차피 못 말리는 열혈 등산객들이라면, 당국은 철재 난간, 와이어로프 등을 시설하고, 추가로 경고판을 설치해서 아까운 생명을 살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 올라가다가 도저히 다리가 후덜 거리고 고소공포증이 있는지라 포기하고 내려왔다. 비의 측면에 '김정희'가 세겨져 있다.
<번역 내용>
진흥태왕(眞興太王) 및 중신(衆臣)들이 … 을 순수할 때의 기록이다.
… 언(言) … 령갑병지방(令甲兵之仿) … 패주설(覇主設) … 상(賞) …
지소용고사서(之所用高祀西) … 서로 싸울 때 신라(新羅)의 태왕이 …
… 덕불병고(德不兵故) … 건문(建文) 크게 인민을 얻어 …
이리하여 관경을 순수하면서 민심을 … 하고 노고를 위로하고자 한다.
만일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고 …
상을 더하고 … 한성(漢城)을 지나는 길에 올라 …
도인(道人)이 석굴에 살고 있는 것을 보고 … 돌에 새겨 사(辭)를 기록한다.
척간(尺干), 내부지 일척간(內夫智一尺干), 사훼 모력지 잡간(沙喙另力智迊干)이다.
남천군주(南川軍主)는 사훼(沙喙) … 부지 급간(夫智及干), 부지 대나(夫智大奈) … 사훼 굴정차 나(沙喙屈丁次奈)이다.
… 곡(谷) … 지(指) … 비고 그윽한 즉수(則水) … 겁(劫) 처음에 세워 만든 바는 비(非) …
순수하여 견 … 세기정(歲記井) …
(번역 출처 :나무위키)
<전체 대략 내용>
진흥왕의 행차 사실과, 진흥왕을 보좌한 대신들의 이름과 직책을 열거했다. 주목할 만한 부분으로는 새로 신라로 편입한 지역의 백성들을 교화하는 '도인'에 대한 기록으로, 단순히 진흥왕이 영토를 확보하는 데만 주력한 것이 아니라 정복지의 백성(피정복민)에 대한 교화에도 신경 썼음을 보여준다. 그 외에 왕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지워져서 잘 알 수는 없지만 마운령비 같은 다른 순수비에 남아있는 수행인 명단을 참고하면 여기에도 승려, 약사, 점쟁이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동행시켜 현지인의 민심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끝)
(출처 :나무위키)
지방관과 지방지배
505년 지증왕(500~514)은 지방조직을 정비하였다. 강력한 통치체제다. 다음의 법흥왕(514~549)과 진흥왕(540~576) 대에 영남지방 및 중부지방까지 확대되었다. 새로 신라의 주에 편입되었고, 국가 파견 군주가 그지역을 통치하였다. 특히 553년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로 신주를 설치하여 대외통로를 개척하였다.
한강유역 차지
백제는 고이왕(234~286)과 근초고왕(346~375) 때 번성하였다. 475년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겼다. 551년 백제 성왕(523~554)은 신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몰아내고 다시 백제가 차지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 진흥왕(540~576)은 백제를 공격, 한강 하류를 빼앗고 신라 영토로 삼았다. 이로서 신라는 대중국 교통로와 삼국 통일 교두보를 마련했다.
진흥왕(540~576)
불교의 이상적인 왕인 전륜성왕을 닮기를 원했다. 불과 수년만에 영토를 넓혔다. 스스로 미륵의 화신이 되고자 하는 젊은 화랑들의 역할이 컸다. 568년 태왕을 자부하며 변경까지 수레를 몰아서 순수길에 나섰다. 북한산을 거쳐 568년 8월에는 함경남도 함흥의 황초령에 닿고, 황초령 비문을 남겼다.
사찰 건립과 국력 신장
527년 법흥왕(514~540)은 불교를 공인하였다. 진흥왕 선덕여왕은 왕경안에 큰절을 세웠다. 544년 진흥왕은 최초의 절인 흥륜사를 10년 만에 완공하였다. 553년 황룡사를 세우기 시작하여 566년 완공하였다. 선덕여왕은 황룡사 옆에 향기로운 왕의 절이라는 뜻의 분황사를 지었다. 643년 왕의 위엄과 부처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추진하였다.
불교 공인
불교 공인이전에는 각자 조상신이나 산천신을 숭배했다. 신라 왕실은 귀족과 백성에게 부처의 신앙을 강조하여 사상적인 통일을 이루고, 왕과 왕족을 신격화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귀족들이 반대하였으나, 법흥왕은 이차돈(506~527)의 순교를 계기로 527년 불교를 공인하였다.
왕경의 정비
중앙통치체제를 정비하면서 경주는 왕경의 모습을 갖추었다. 바둑판 모양으로 도로를 건설하고 왕실과 사찰을 지었다. 남산산성, 명활산성등을 쌓고 왕경 외곽에는 그릇과 기와를 생산하는 관영공방을 두었다.
중앙 통치체제 정비
지증 마립간(500~514)은 503년 나라 이름을 신라로 정하였다.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을 아우른다'(덕업일신 망라사방)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왕호 또한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다. 그 뒤 법흥왕은 17 관등제와 공복을 정하고 통치체제를 정비하였다.
중앙집권국가 중고기
법흥왕(514~540)부터 진덕여왕(647~654)에 이르는 140년간을 중고기(中古期)라고 부른다. 왕권 강화와 통치체제 정비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을 하였고,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대가야를 정복한 뒤,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한강유역을 확보하여 통일 기틀을 마련했다.
신라의 말갖춤
마립간시기에 도입된 최초의 말갖춤은 중무장기병과 관련이 있다. 처음 실전 위주의 말갖춤에서 4세기 이후 귀금속 장식이 더해져 지위를 상징하게 되었다. 마립간을 위해 만든 화려한 말갖춤은 왕의 권력을 드러내는 최상의 물품이었다.
신라 삼국 통일의 원천
인재와 지도자가 있었다. 주변 나라와 꾸준히 실리외교를 펼쳤다. 화랑을 양성하여 미래를 준비하였다. 사람과 정책의 조화가 삼국통일의 밑바탕이 되었다. 삼국사기 권 43 영전 3 김유신 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삼한이 한집안이 되고 백성에게 두 마음이 없으니 비록 태평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소강이라고는 할 수 있습니다."
주) 소강 : 유가의 가장 이상적인 대동세계에는 미치지 못하나, 예의로 다스리는 모범적 군주가 사회질서를 바로잡은 이상 사회
<참고 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팸플릿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www.museum.go.kr)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 나무 위키
-. 별별 한국사(최태성 저)
글이 길어져 통일 신라 및 발해는 다음 편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