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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 통일신라(남)와 발해(북)

국립중앙 박물관(7)

by 애바다
20241116_105323.jpg 국립중앙박물관
img1.daumcdn.png 통일신라(111) 및 발해(112)

통일신라(統一新羅, 676~935년)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고,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를 통합한 이후의 신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주로 남북국 시대의 신라를 말한다. 신라 유물들은 '수원화성과 경주의 품격' (https://brunch.co.kr/brunchbook/jylee2030)과 국립 경주박물관( https://brunch.co.kr/@jylee2020/150, 2023.12.24 탐방)을 통하여 이미 보고 드렸다.



잠깐, 알려드립니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의 선사시대, 고조선,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 대한제국까지 한민족 역사 전체를 브런치북에 모두 담았습니다.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 입문서입니다.



발해(渤海, 698~926년)는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하였으며, 일본은 국서에 발해를 고구려라고 칭했다. 따라서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탐방기는 남쪽의 통일신라와 북쪽의 발해를 한 묶음으로 말씀드린다. 더구나, 국립중앙박물관내에 발해관이 통일신라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남북국 시대(南北國時代, 698년 - 926년)

신라의 삼국통일과 발해의 건국부터 후삼국 시대 이전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한국사의 시대구분이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관계

신라와 발해의 관계는 이전 삼국시대처럼 서로 적극적으로 무력분쟁이 일어나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대체로 대립적이었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뒤, 신라 측에선 대조영에게 대아찬이란 벼슬을 줬다. 발해의 2대 무왕 때 영토를 확장하면서 발해는 당나라와 전쟁을 치렀다. 733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공략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했다. 발해의 10대 선왕 때 요동 수복 등 영토확장이 일어나자, 신라 측은 대동강 이북에 장성을 세워 발해를 경계했다.


그러나 두 국가의 관계가 항상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통일신라와 발해는 문왕 때부터 신라도를 통해 교역이 이뤄졌다. 8세기 전반에 발해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와 남경 남해부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 이르는 신라도가 개설되었다. 발해와 신라가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증거다. 일본이 발해에게 신라를 공격하자고 제안했지만, 발해가 거절했다.


정부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신라인과 발해인들은 서로 적지 않은 경쟁의식을 가졌던 것이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북쪽나라(발해)가 (신라보다)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당이) 허락하지 않음에 감사드리는 글, 즉 당나라와 외국 사신이 만나는 자리에서 신라 사신보다 발해 사신이 높은 자리에 서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당나라는 발해보다 신라와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거절한 것에 대해 신라에서 감사표시함) 등에서 드러나고 있다. 926년에 발해가 요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수많은 발해유민들이 고려로 이주하였다. 신라 역시 935년에 고려에 합병되었다. 발해부흥운동(渤海復興運動, 926년 ~ 1116년)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나무 위키, 위키백과) 만약 성공했었다면, 동북아 지형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1) 신라 진흥왕의 영토확장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

2) 나 당 전쟁과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삼국통일 과정에서 한때 전쟁을 벌였던 신라와 당은 우호 관계를 회복했고, 두 나라의 상인, 승려, 유학생들은 활발히 왕래했다. 무역도 활발해져서 신라는 당에 금·은 세공품, 인삼 등을 수출하고, 서적, 도자기, 비단, 옷, 공예품 등을 수입했다. 또한 비단길과 해상을 통해 서역의 문물과 상인들이 신라에 오기도 했다.

나 당 전쟁 / 통일신라 지도 (9주 5소경)

3) 남북국 시대

남북국 시대 지도
통일신라 관(111 관), 발해 관(112 관)

통일신라(統一新羅)

7세기 중엽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당 전쟁 결과, 대동강~원산만 이남의 통일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했다. 당을 중심으로 통일신라와 발해, 일본이 공존하는 안정된 정세가 계속되었다. 통일 신라는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제도를 정비했다. 관료제를 정비하여 왕경인과 지방인을 차별하지 않고, 관등을 주는 방식을 택했다. 율령에 입각한 강력한 왕권 중심 국가를 수립했다. 행정구역은 지방을 9주로 나누고, 5 소경을 설치하였다.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의 틀을 완성하였다.

통일신라 연표
삼한위일가, 백성무이심 (김유신)

불국토(佛國土)

'寺寺星張 塔塔雁行' 절들이 별처럼 많았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 (삼국유사 권제 3 흥법 제3) 통일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를 받아들여 다양하고 폭넓은 불교 사상을 만들었다. 불교 토착화를 위해 본래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었다는 설은 이후 본격적인 불국토설(佛國土說)로 불교가 국교가 되고 대중적인 종교가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을 포용하고 융화하는데 활용하였다. 통일 후는 화엄종과 법상종이 유행하였다. 하대에는 선종과 구산선문이 형성되는 등 선종 불교가 주요 이념이 되었다.

통일신라 정책 / 불국토

사천왕

고대 인도에서 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경주 사천왕사에서 발견된 녹유신장상은 탑의 기단을 장식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이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는 형태다.

사천왕
부처상(철불)

석굴암

경주 토함산 동쪽에 있는 사찰로 창건당시 이름은 석불사였다. 751년(경덕왕 10)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다. 산자락을 잘라낸 후 다시 인공으로 석굴을 만든 특수한 구조이다. 석굴 내부는 돔 형식으로 둥글고, 주실의 본존불을 포함한 38구의 조각이 안치되어 있다. 전실의 좌우 벽면에는 각각 4수씩 팔중이, 주실 입 입구 좌우에는 금강역사가 조각되어 있다. 전실과 주실을 연결하는 통로 좌우에는 각각 2 귀씩 4수의 사천왕상이 있다. 주실 주위에는 범천과 제석천을 비롯하여 불법 수호 천부상이 배치되어 있다. 불교 조각의 정수를 알려주는 세계역사에 남을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석굴암(https://brunch.co.kr/@@8pxb/146, 2023.12.24)은 이미 탐방하여, 보고를 드렸다.

석굴암
석굴암
석굴암 조립 과정(1)
석굴암 조립 과정(2)

팔부중

불법을 수호하고 대중을 교화하는 신을 팔부중(八部神衆)이라고 한다.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가 있다. 전시된 신은 아수라와 건달바이다. 석탑의 상층 기단부 면석에 새겨진 것이다. 아수라는 원래 싸움의 신이었으나 부처님의 감화로 불법을 지키는 신이 되었다. 얼굴은 셋, 손과 팔은 여덟 개 혹은 여섯 개다. 건달바는 사자의 머리가죽 같은 것을 쓰고 있다.

아수라 / 건달바

국가 권력과 의례

통일 신라는 의례를 통해 국가 권력 정당성과 왕권의 위엄을 과시했다. 도성에서 행한 국가 의례는 왕경인과 지방인들에게 왕에 대한 충성심과 복속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사찰 역시 국가와 왕권의 위엄을 알리는 공간이었다. 경주 사방입구에 성전사원이라는 사찰을 건립하여 천하의 중심과 북국토의 중심을 연출하였다.


월지(안압지)는 신라 문무왕 14년(674년)에 궁궐 안에 만든 연회시설이다. 삼국사기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연회를 위한 건물, 종교시설이 이었다. 연못에서 불상을 비롯한 불교용품이 많이 발굴되었다. 아울러 납으로 만든 가위나 손칼같은 비실용적인 물건도 있었다. 불교의식과 무속행위도 행하여졌다. 월지(안압지)는 이미 탐방하여 보고 드렸다. (https://brunch.co.kr/@jylee2020/149, 2023.12.24 탐방)

월지(안압지) 출토 의례 유물, 십이지상, 명 금고, 촛대
월지(안압지) 출토 의례 유물 (가위, 손칼, 둥근판) / 십이지상, 함통육년(865) 명 금고, 촛대
수막새, 접시, 전돌, 항아리

통일 신라 유적에서 발견되는 도자기는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대부분 중국 저장성 월요에서 제작된 것이 많다. 품질이 뛰어나며, 최고 경지의 비색자 청자다.

수막새, 접시 , 항아리
발걸이 겉과 속 (황해도 평산)
정병(충남 부여)

왕경 세력

통일신라 운영의 주도세력은 왕경(경주)의 진골 귀족이었다. 왕경에는 17만 8,936호가 살았다. 금입택(금을 입힌 저택)이 30여 채 있었다. 금입택 주인은 왕권에 비견될 정도의 유력한 진골 귀족이었다. 왕경 유적과 월지에서 나온 유물들은 진골 귀족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 준다. 특히 금과 은으로 장식한 생활용품과 녹유 기와는 당시 진골 귀족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보여준다.


통일신라 말의 지방 세력

통일신라 말 지방에는 독자적인 세력들이 등장하였다. 주로 변경의 군진이나 상업과 대외교역이 발달한 곳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대표적으로 장보고가 활동한 남해의 청해진 지역과 당과의 교역지였던 북방의 황해도 평산이다.

세 발 항아리, 짐승얼굴 무늬 기와, 연적, 벼루, 인형, 연꽃무늬 꾸미개 / 사냥 무늬 전돌

통일신라의 지방사회

9주 5 소경의 새로운 제도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와 토착 촌주의 협력으로 시행되었다. 문자의 활용과 도로와 역의 정비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왕경의 문화가 지방에 까지 그대로 이식되었고, 일부 지방 유력자는 왕경 귀족과 비슷한 문화를 누리게 되었다.

발걸이, 칼, 재갈, 자물쇠 / 풍탁, 오각형 꾸미개, 자물쇠, 손잡이 향로
향피우는 도구 / 접시, 병, 재갈
용 머리 꾸미개

뼈단지

불교식 장례방식인 화장이 유행하였다. 화장 후 유골을 뼈단지에 담았다. 땅에 묻은 튼튼한 보관함에 넣어 장례를 치렀다. 8세기의 고급스러운 뼈단지는 화려한 도장무늬를 새기거나, 녹유 청유 삼채 같은 유약을 발랐다. 국력이 쇠퇴하는 9세기 이후 뼈단지는 꾸밈을 없앤 소박한 형태로 바뀌었다.

뼈 단지 / 세발 뼈 항아리, 뼈 항아리
수막새, 당초 무늬 수막새, 보상화 무늬 전돌, 보상화 무늬 수막새, 청자 완, 녹유 굽다리 항아리 / 후삼국 분열

후삼국의 분열

왕권의 안정화로 중대의 전성기를 지나, 혜공왕 (765~780) 때 96 각간의 난을 거쳐 하대로 접어든다. 하대는 진골 귀족 간의 권력 다툼과 왕위 쟁탈전으로 혼란이 거듭된 시기다. 견훤과 궁예가 각각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워, 결국 후삼국이 정립되었다. 궁예의 뒤를 이은 왕건이 고려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통일 신라는 스스로 왕건에게 항복하였고, 935년 멸망하였다.


발해(渤海)

발해 관

고구려 출신의 대조영과 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발해는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통일 신라와 공존하며 남북국 시대를 열었다. 발해는 중앙 조직을 3성 6부로 완비하고,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나누었다.

유교 정치이념을 수용하고, 불교를 통하여 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며 황제국을 표방하였다.


발해 지배층은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내세웠다. 주변 나라들 역시 발해를 고구려 부흥국가 또는 후계 국가로 인식했다. 발해는 옛 고구려 영토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러시아 연해주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당, 일본과도 교류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해동성국으로 불리며 융성했다.

남북국(통일신라와 발해) 시대 지도
발해 연표 / 발해 략사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발해 2대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는 발해가 스스로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부여의 전통을 계승한 나라"(속일본기 10권)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은 발해를 고구려 후계 국가로 가장 강하게 인식했다. 발해 멸망 후 건국된 정안국 관련 기록을 통해서는 당시 발해인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발해 중대성에서 일본 태정관에게 보낸 문서(中臺省牒) 사본

발해와 일본은 727년 교섭을 시작한 이후 발해가 멸망하는 926년까지, 발해 내 일본도(日本道)라는 길이 있을 만큼 교류가 잦았다. 발해가 일본에 가져간 물품은 주로 담비·호랑이·곰·표범 등의 가죽류와 인삼·산꿀 등이었다. 또 향(香)과 같이 당이나 서역에서 넘어온 물건의 중개무역도 했다. 또한 일본에서 발해로 간 물품도 있는데, 대부분이 물품 구매 대금으로 사용한 고급 비단·실(絹, 綿, 絲, 絁, 綵帛) 등의 방직품과 금·은, 그리고 칠기·구슬·빈랑선(檳榔扇) 같은 수공예품이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견고려사 목간

이 목간은 고대 일본의 궁성이었던 헤이조 궁터에서 출토되었다. 길이 24cm, 너비 2cm, 두께 0.4cm인 목간에 모두 22자가 적혀 있다. 여기서 고려는 발해를 말한다. 가장 오래된 사료다.

견고려사 목간
연꽃 무늬 수막새
용 머리상

해동성국 발해와 주변 세계

발해는 건국 이후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당, 통일신라,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주변 나라들과 관계를 맺었다. 국제 교류를 위해 동경, 남경, 서경과 같은 거점 도시를 설치하고 신라도, 일본도, 거란도, 영주도, 조공도라는 교통로를 열었다. 중앙아시아, 당, 말갈 등 주변국의 모든 문화가 응축되어 있다. 그 결과 해동성국이라고 불리는 수준 높은 문화를 꽃피웠다.

해동성국과 주변 세계

해동성국과 주변 세계

이 교통로는 외교뿐만 아니라 당시 아시아 물류 유통의 핵심이었다. 발해는 주변 세계와 교류하며 새로운 정치제도, 유학, 예술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발해의 문화에는 중앙아시아뿐만 아니라 당이나 말갈등 주변국의 문화가 녹아 있다. 그 결과 주변 나라에서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연꽃 무늬 벽돌, 녹유 주춧돌 장식 / 발해의 불교 신앙

발해의 불교 신앙

불교는 왕권 정당성 강화의 이념적 도구였다. 발해 불교 원류는 고구려에 있으며 9세기에 크게 융성하게 된다. 상경 지역은 관음상으로 대표되는 관음 신앙이, 동경 지역은 아불병좌상으로 대표되는 법화사상이 유행했다. 발해 문자 기와 중에는 불자의 고자가 새겨진 것이 있다. 이시야마 사 다라니경은 발해 사신이 일본에 전해준 것이다.

연꽃 무늬 벽돌 , 녹유 주춧돌 장식

상경성 출토 유물 (용머리상)

머리 윗부분에 납작하게 붙은 귀와 짙은 눈썹, 툭 튀어나온 커다란 눈과 코, 귀밑까지 찢어진 큰 입, 그 사이 굵은 이와 날카로운 송곳니는 사나운 용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상경성 궁전지에서 모두 일곱 개가 나왔는데 원래 궁전 기단부의 석축 사이에 끼워 석축을 튼튼히 하는 쇄기 역할을 했다.

용 머리상

수도 왕권 통치

발해 5경은 상경 용천부, 중경 현덕부, 동경 용원부, 남경 남해부, 서경 압록부로 구성되어 있다. 발해 초기의 수도는 동모산으로 현재 중국 길림성 돈화시 성산자산성이다. 그 뒤 문왕(737~793)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 용원부로 이전하였으나, 성왕(793~794) 대에 다시 상경 용천부가 발해의 수도가 되었다. 상경 용천부는 당시 동아시아 왕조의 도시처럼 계획되었다.


발해 멸망

926년 거란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당시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느라 발해를 돕지 못했다. 고려는 발해부흥운동에 대한 성급한 군사적 지원을 지양하는 대신 망명해 오는 발해 왕족이나 귀족을 비롯한 유민들을 받아주면서 고려에서 왕실 제사를 지내게 해 주거나, 왕 씨 성을 하사하여 안정적인 생계유지 및 정착을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다.


발해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고 요나라와 금나라에 병합되었다. 발해부흥운동을 성공시켰더라면 천리장성 혹은 청천강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발해 후계국이, 남쪽에는 고려가 위치하여 흡사 남북국시대의 연장이 되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일이다.


<참고 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팸플릿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www.museum.go.kr)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 나무 위키, 위키백과

-. 별별 한국사(최태성 저)


글이 길어져 '고려'는 다음 편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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