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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청자(靑磁)의 나라 탐방

국립 중앙박물관(8)

by 애바다 Mar 25. 2025
국립중앙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바라본 남산과 북한산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바라본 남산과 북한산
고려(918~1392) 관고려(918~1392) 관

고려(高麗)

   고려 918년부터 1392년까지 474여 년간 한반도에서 불교를 국교로 삼은 전제군주 국가다. 후백제, 신라로 나뉘어 대치하던 후삼국시대는 936년에 끝나고, 총 34명의 군주가 고려를 통치했다. 고려는 한반도의 두 번째 통일 왕조다. 송악(개성) 출신의 왕건이 지방호족세력을 규합하여 성립한 고려는 고대 국가와는 구별되는 중세 국가다. 유물들이 더욱 세련되고 화려해지고 품격이 높아지고 있다. 백성에 대한 과도한 수 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전시과 제도를 만들었다. 지방관을 지속적으로 파견하였으며, 과거제를 도입하여 유교적인 소양을 갖춘 관료층을 확보하였다.


고려 말의 북쪽 경계(최대 영토) : 초록색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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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영토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고려'(Goryeo)라는 나라 이름이 세계에 알려졌다. Korea의 어원아라비아 상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고려'(Goryeo)라는 나라 이름이 세계에 알려졌다. Korea의 어원

(전문 지식이 부족하여, 아래 고려 유물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은 국립중앙박물관내의 설명판에서 인용하였음을 미리 밝힌다. 처음 본 문화재와 유물들도 많았고, 여성의 지위에 대하여 굉장히 진취적인 이해를 한 고려 시대 상황에 놀랐다. 특히 원나라 조정에서 왕실의 여자를 바치라는 요구에, 자신의 외동딸이 공녀에 뽑혀, 다시는 못 볼 먼 타국으로 보내야만 했던 한 많은 어머니(수령옹주)의 묘지명에 충격을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처음 방문하실 예정인 분들에게는 미리 예습하시는 입장에서 읽어 주시면 좋겠다.)


고려 연표고려 연표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나 도교 도참사상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민족에게는 개방적이었으며, 개경의 문벌 귀족문화와 지방의 독특한 문화가 공존하였다. 다원적인 사회를 만들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환구단에 제사를 올리는 천자국이었다.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는 동시에 발해 유민을 흡수하면서 적극적인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송, 거란(요), 여진(금)과 실리 위주의 외교를 펼쳤다.     

고려 왕 계보고려 왕 계보

고려의 도읍지, 개경

   개경은 태조 왕건의 본거지로, 왕건이 즉위한 이듬해(919) 고려의 수도가 되었다. 광종은 개경을 황도라고 칭하며 황제의 나라로서 체제를 갖추어 갔다. 개경에는 궁궐과 관청, 태묘와 사직단, 사찰등을 세웠다, 남대가와 십자가를 중심으로 도로를 만들고, 5부 35방 344리의 행정 구역이 편재되었다.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후 궁성과 황성을 둘러싼 나성의 축조(1029)를 하여 개경은 수도로서 위상을 가졌다.


   만월대라고 부르는 곳에는 현재 궁궐터만 남아 있다. 송의 사신 서긍은 궁전 중심 건물인 회경전에 대하여 '동서 양쪽의 섬돌은 붉게 칠하고 난간은 구리로 만든 꽃무늬로 장식하여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칭송하였다. 만월대에는 33단으로 된 4개의 돌계단 위에 자리했던 회경전 터를 비롯 신봉문, 창합문, 건덕진, 장화진 등의 옛 터에 주춧돌만 남았다.

고려의 도읍지, 개경(1)고려의 도읍지, 개경(1)
고려의 도읍지, 개경(2) 출토 유물고려의 도읍지, 개경(2) 출토 유물

천자라고 불린 고려의 왕

   통일 후 사회통합차원에서 일통(一統) 의식을 바탕으로 왕의 권위를 내세우며 천자의 나라를 자처했다. 중국과 조공 책봉관계를 유지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천자 황제라고 칭했다. 고려 군주를 폐하라고 부르거나, 황제국에 걸맞은 정치제도와 용어를 사용하였다. 수도 개경을 황도, 왕을 황제라고 불렀다.


  고려사에는 '남쪽과 북쪽 오랑캐들이 스스로 찾아와 우리 천자를 뵙고 백가지 보물을 우리 천자의 섬돌 위에 바쳤다'라고 기록했다.(고려사 권 71)


인종 시책

   고려 17대 인종의 아들인 의종이 인종의 시호를 공효대왕으로 지어 올리며, 인종의 성품과 업적 덕행을 돌에 새겨 만든 유물이다. 신장상을 새긴 판 2점과 글이 새겨진 판 41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종의 능인 장릉에서 출토되었다.

천자라고 불린 고려의 왕, 왕건천자라고 불린 고려의 왕, 왕건
해동천자와 다원적 천하관(1)해동천자와 다원적 천하관(1)

 제왕운기(帝王韻紀)

   고려 후기 문신 이승휴가 1287년 지은 역사 시집이다. 상하 2권인데, 상권에는 원대까지의 중국 역사를, 하권에는 우리나라 지리와 단군조선이래 고려 충렬왕대까지 역사를 읊었다. 단군신화를 수록하여 역사의 유구함과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중국중심의 국제질서와 구분되는 고려중심의 질서, 다원적 천하관을 드러냈다.

제왕운기(고려 중심의 천하관을 담은 역사서)제왕운기(고려 중심의 천하관을 담은 역사서)

해동천자와 다원적 천하관

   10세기초 동아시아에는 송 요 금 같은 중국 왕조 외에 서하 월남등이 천자국을 표방했고, 고려도 스스로를 독자적인 천하의 중심으로 여겼다. 고려의 왕을 바다동쪽의 천자, 즉 해동천자라고 불렀다.


경천사 십 층 석탑 (국보 제86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1층에 고려의 불굴의 기상처럼 우뚝 솟아 있다. 원래는 경기도 개풍군에 있던 대리석 탑이다. 1907년 일본 궁내부 대신 다나카가 일본으로 무단 반출하였으나, 영국과 미국의 언론인 베델과 헐버트의 노력, 우리 국민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1918년 환수되었다.


    1348년에 고려 전통과 당시 원나라 유행 양식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목조 건축 장식을 세하게 표현했다. 탑아래 3단의 기단부에는 당나라 현장법사와 손오공이 인도에서 경전을 구해오는 험난한 여정을 중심으로 나한과 사자를 새겼다. 탑신에는 여러 장면의 법회와 법회 이름을 새긴 현판을 달았다(1~4층). 탑꼭대기까지는 다섯 부처 또는 세부처를 조각하였다(5~10층)


   그 탑 옆에서 문화해설사 선생님과 바닥에 앉아 뭔가 진지하게 설명을 듣고 있는 초동들 모습이 너무 예뻐서 사진에 담아 보았다. 대한민국의 미래 꿈나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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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경천사 10층 석탑 옆의 대한민국 꿈나무들 / 고려 경천사 10층 석탑 설명판

고려청자(高麗靑瓷)

   고려관 탐방을 통하여 얻은 제일 큰 수확은 많은 고려청자를 마음껏 볼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문외한이 봐도 그 아름다움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청자(주전자, 물고기 무늬 완, 모란과 국화를 새긴 청자 정병, 국화 넝쿨무늬 병)고려청자(주전자, 물고기 무늬 완, 모란과 국화를 새긴 청자 정병, 국화 넝쿨무늬 병)
고려청자(국화 넝쿨무늬 병, 청자 원앙 모양 향로,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고려청자(국화 넝쿨무늬 병, 청자 원앙 모양 향로,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
고려청자(파도 물고기무늬 완, 넝쿨무늬 주전자, 구름 용무늬 합)고려청자(파도 물고기무늬 완, 넝쿨무늬 주전자, 구름 용무늬 합)
고려청자(번개무늬 새겨진 배모양 그릇, 투각 칠보무늬 향로, 원앙 모양 향로)고려청자(번개무늬 새겨진 배모양 그릇, 투각 칠보무늬 향로, 원앙 모양 향로)
모란과 국화를 새긴 정병(고려청자)모란과 국화를 새긴 정병(고려청자)
같은 모양 다른 재질의 그릇(도기 정병, 물가 풍경 무늬가 새겨진 청자 정병, 청동 정병) / 연꽃무늬가 새겨진 청자 매병, 도기 참외모양 매병)같은 모양 다른 재질의 그릇(도기 정병, 물가 풍경 무늬가 새겨진 청자 정병, 청동 정병) / 연꽃무늬가 새겨진 청자 매병, 도기 참외모양 매병)
도기 참외 매병, 연꽃무늬가 새겨진 청자 매병 / 같은 모양 다른 재질도기 참외 매병, 연꽃무늬가 새겨진 청자 매병 / 같은 모양 다른 재질
화성 문천리 고려 무덤 출토품화성 문천리 고려 무덤 출토품
고려 무덤 출토품(청동거울, 송나라 동전) / 화성 분천리 고려 무덤 출토품고려 무덤 출토품(청동거울, 송나라 동전) / 화성 분천리 고려 무덤 출토품

송나라 금나라 거란에서 유입된 유물

송나라에서 만든 백자송나라에서 만든 백자
고려 사람들이 사용했던 외국 물건(백자 잔과 잔받침, 검은 유약을 입힌 주전자, 시가 새겨진 청자 완, 모란 무늬 백자 접시)고려 사람들이 사용했던 외국 물건(백자 잔과 잔받침, 검은 유약을 입힌 주전자, 시가 새겨진 청자 완, 모란 무늬 백자 접시)
거란 글자가 있는 거울, 거란 글자가 있는 팔각 거울거란 글자가 있는 거울, 거란 글자가 있는 팔각 거울

당당한 고려 여성의 삶

   고려시대는 아들과 딸을 구분하지 않고 태어난 순서대로 호적에 올렸다. 자녀들이 번갈아가며 부모를 봉양하거나 제사를 지냈다. 재산 또한 균등히 분배하였고 딸이 결혼하더라도 자신이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은 남편의 재산과 구분하여 따로 관리하였다. 이혼과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워,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다.


   남녀 사회 경제적 처우는 크게 르지 않았다. 활동 영역은 여성은 집안일과 자녀 양육하고 평소에는 길쌈과 바느질을 하면서 살림을 꾸렸다. 고려 후기 재상의 부인은 "문서 관련일은 남자의 일이고, 길쌈과 바느질은 부인의 일"이라고 하였다.

당당한 고려 여성의 삶당당한 고려 여성의 삶
짐승 모양 다리가 달린 청동화로, 석탄, 창동 다리미짐승 모양 다리가 달린 청동화로, 석탄, 창동 다리미

개경 여성의 화장대

   아름다움을 가꾸고 드러내는 일은 동서고금 막론 여성들의 일상이다. 고려 귀족 여성들은 청자 유병에 기름을 담고, 큰 합 속에 여러 작은 합이 들어 있는 모자합을 애용했다. 모자합속에는 다양한 화장품이 들어 있었다. 큰 합의 뚜껑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다양한 형태와 무늬의 청동 거울로 예쁘게 치장하고 은입사로 장식한 거울걸이를 사용하였다. 귀이개 족집게 비녀등의 일상 용품에 고려 여인들의 아름다움이 투사되어 있다.  

고려청자(받침 딸린 기름병, 기름병, 화장품 담는 합), 꽃나무무늬 거울, 화장 도구(나무빗, 은에 금을 입힌 합, 작은 청자 병, 작은 청자 주전자)고려청자(받침 딸린 기름병, 기름병, 화장품 담는 합), 꽃나무무늬 거울, 화장 도구(나무빗, 은에 금을 입힌 합, 작은 청자 병, 작은 청자 주전자)

고려의 관료

   고려 성종대에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의 2성 6부 체제와 관직제도가 성립되어, 관료층이 확립되었다. 관료는 왕족을 제외한 최고의 신분으로 양반, 즉 문반과 무반으로 구분된다. 전시나 녹봉으로 생활이 보장되었다. 관리가 되는 길은 과거와 음서다. 정1품에서 종 9품까지 18 품계가 있었다. 고려사 백관지에는 문반 532명, 무반 3,867명 총 4,399명의 관직이 기록되어 있었다. 등급에 따라 다른 색의 관복을 입었으며, 모자와 허리띠도 구별이 있었다.


예제의 정비와 국가 의례

   성종은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채택하였다. 중국예제를 도입하여 환구제와 태묘 사직 문묘 제사를 시행하였다. 제기는 중국에서 수입하거나 송의 예서를 참고하여 직접 만들었다. 왕실 국가 의례, 연등회 팔관회등 불교의례에 이러한 제기들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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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된 아름다움, 장신구와 금속공예

   상류계층은 금 은 옥 유리 보석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장신구를 사용했다. 금 은 옥으로 만든 소형 장신구가 발달했다. 의복에 부착하는 장신구나 단추, 호신 의미의 부적등으로 활용했다. 정교한 타출 기법이 사용된 향합과 캅집, 입사기법을 활용한 향완과 정병 등이 나타나는데, 한국 금속공예의 백미다.

장신구와 금속 공예(2)장신구와 금속 공예(2)
장신구와 금속공예(3)장신구와 금속공예(3)

관리들의 더위 쫓는 방법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밝힌 고려 관리들의 피서법이다. 정사와 부사는 한가할 때 상절관 등과 향림정에서 차를 마시고 바둑을 두며 종일 담소한다. 마음을 즐겁게 하고 더위를 쫓는 방법이다.

청자청자
청자(잔과 받침, 주전자, 바둑판과 바둑알, 국화넝쿨무늬 잔)청자(잔과 받침, 주전자, 바둑판과 바둑알, 국화넝쿨무늬 잔)


고려시대 유적지 발굴 현황

   1990년대부터 개발에 앞서 유적 조사를 하는 법이 정착되었다. 2000년대 개성공단, 강화, 고려 왕릉, 개성 만월대 등에서 다양한 유구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NEWS국립중앙박물관 NEWS

고려인의 식생활

   고려 전기에는 불교적 행사와 의식의 성행으로 떡과 차를 즐겼다. 도축 금지령으로 육식을 절제했다. 그러나 후기에는 원의 영향으로 육식이 유행하고 밥과 국(탕)이란 한국적 식단이 기본이 되었다. 주곡은 쌀과 보리 조였으며, 특히 채소요리가 발달하였다. 채소로 장아찌를 만들어 먹었다. 원의 영향으로 증류식 소주가 도입되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 나오는 상화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팥소를 넣고 만든 찐빵이다. 고려 시대 밀가루는 중국에서 들여왔기 때문에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고려인의 식생활고려인의 식생활

고려시대 숟가락과 젓가락

   고려시대 숟가락의 큰 특징은 측면이 S자로 굴곡져 있다. 숟가락면(술잎)은 타원형과 버들잎 모양의 유엽형으로 구분한다. 손잡이 모양에 따라 제비꼬리 모양의 연미형 연봉형 약시형 능형 등으로 나눈다. 숟가락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요 금 원 등 북방의 영향으로 육류 섭취가 늘어나고, 국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고려시대 숟가락과 젓가락고려시대 숟가락과 젓가락
2 약숟가락 모양 숟가락 / 3 제비꼬리모양 숟가락2 약숟가락 모양 숟가락 / 3 제비꼬리모양 숟가락
1 큰 밥그릇 / 2 메밀과 볍씨 / 3 은으로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1 큰 밥그릇 / 2 메밀과 볍씨 / 3 은으로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

고려인의 삶을 엿보는 청동 거울

   순수 고려산 '고려국조'를 새긴 거울, 황비창천을 새긴 거울, 용 나무 전각무늬 거울 등이 있다. 무덤에서 나온 거울에는 중국 지명인 호주 항주 소주를 새긴 거울이 많다. 직접 수입한 것도 있고, 원본을 바탕으로 고려에서 다시 찍어 낸 것이 있다. 일반인들도 사용했다. 새겨진 무늬는 커다란 배를 타고 먼바다를 항해하는 사람, 팔작지붕의 전각, 여인 모습, 씨름 장면, 다리를 건너는 인물등 다양하다.

고려인의 삶을 엿보는 청동 거울고려인의 삶을 엿보는 청동 거울

지방 제도와 향촌 사회

   지방통제의 수단으로 거주지를 중심으로 성씨를 부여하는 본관제를 시행하였다. 성종과 현종대에 5도와 양계의 지방 행정조직을 정비하였다. 지방관의 파견 여부에 따라 주현과 속현으로 구분하고, 향 소 부곡 등 특수 행정 단위를 두었다. 지방에는 실질적이 지배자로서 우두머리인 호장은 읍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여 고을 업무를 총괄하고 지역민을 동원하여 사찰, 불상 건립을 하였다.

지방제도와 향촌 사회지방제도와 향촌 사회

고려 특수 지방행정 단위 향 소 부곡

   군현의 통제를 받고 군현의 주민과 같이 각종 세금을 부담하였지만, 차별대우를 받았다. 향과 부곡 주민은 대부분 농경에 종사하였다. 소의 주민은 국가에서 특정하는 물품을 생산 공급하였다. 소는 원료고급에 유리한 지역에 형성되었다. 도자기를 만드는 자기소, 먹을 만드는 묵소, 금을 생산하는 금소, 철을 생산하는 철소등이 있었다. 이외에 왕실과 사원에 귀속된 토지를 경작하는 지역인 장, 처 등도 있었다.

고려의 특수 지방 행정 단 향 소 부곡고려의 특수 지방 행정 단 향 소 부곡
사리합과 탑지, 돌벼루, 풍자 모양 흙벼루사리합과 탑지, 돌벼루, 풍자 모양 흙벼루
지방 제도와 향촌 사회지방 제도와 향촌 사회
자물쇠, 질그릇 병, 질그릇 단지자물쇠, 질그릇 병, 질그릇 단지

투박하고 소박한 일상 용기

   지방세력가들은 개경 귀족들을 모방하여 청동 그릇이나 청자를 사용하였다. 세숫대야 주전자 화로 대접 등 다양한 청동 용기를 사용하였다. 녹이거나 공정의 어려움 때문에 비교적 단순한 모양이었다. 다양한 모양의 청자가 많이 생산되었다.


   도기는 질그릇 옹기 토기와 같이 흙으로 빚어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구웠다. 유약을 발라 구운 적갈색 도기도 사용하였다. 청자 는 달리 도기는 각지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하여 지역 특성이 드러났다. 계층에 상관없이 대용량 저장용기나 일상생활 용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청동 병, 청동 접시, 청동으로 만든 팽이 모양 잔, 청동 잔 / 납석으로 만든 주전자, 청동으로 만든 주전자, 자물쇠 문고리  청동 병, 청동 접시, 청동으로 만든 팽이 모양 잔, 청동 잔 / 납석으로 만든 주전자, 청동으로 만든 주전자, 자물쇠 문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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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의 귀족 문화

   여러대에 걸쳐 5품 이상 문신 배출한 문벌 가문이 생겼다. 경원 이 씨 해주 최 씨 등은 폐쇄적인 통혼으로 인척 관계가 복잡하게 얽혔다. 고급 청자 금속장신구 나전칠기의 주요 수요층이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 공예의 기술이 매우 뛰어났다"라고 했다. 세련되고 화려한 고려 문화 전성기를 이루었다.

개경 귀족의 문화개경 귀족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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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정치 이념

   고려 성종은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채택하였다. 중국 예제를 도입, 환구제와 태묘, 사직, 문묘 제사 등 유교적 예제를 시행했다. 1113년(예종 8)에는 예의상정소를 설치하였고, 의종대에 상정예문을 완성하여 유교적 국가 의례체제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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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상, 성리학 도입

   몽고 침략과 원 간섭기를 거치며 농민들의 항쟁과 유랑은 질서를 위태롭게 했고, 정신적 위안을 주었던 모순과 폐단속에 빠졌다. 혼란을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사상이 원을 왕래하던 안향과 백이정 등에 의해 도입되었다. 공민왕의 개혁으로 성균관이 중흥되고, 성리학풍이 일어났다. 과거시험에도 중시되어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

새로운 사상, 성리학의 도입 / 역사의 갈림길에 선 정몽주와 정도전새로운 사상, 성리학의 도입 / 역사의 갈림길에 선 정몽주와 정도전


고려 왕조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 초상화/돌에 새긴 정몽주의 절의고려 왕조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 초상화/돌에 새긴 정몽주의 절의
돌에 새긴 정몽주의 절의돌에 새긴 정몽주의 절의
정몽주와 김경조를 기리는 비 (탁본, 김경조는 개성 선죽교에서 정몽주와 함께 절명)정몽주와 김경조를 기리는 비 (탁본, 김경조는 개성 선죽교에서 정몽주와 함께 절명)
유학자 이색이 발문을 쓴 불교 서적유학자 이색이 발문을 쓴 불교 서적
고려 최초 성리학자 안향에 관한 기록고려 최초 성리학자 안향에 관한 기록
이색 초상화이색 초상화

무신정권과 강화 천도

   12세기 귀족문화를 꽃피우던 시기에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운동이 일어났다. 문신의 차별대우와 의종의 사치 생활과 실정으로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으로 이어졌고 1196년(명종 26)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최우 최항 최의의 4대 최 씨 정권이 성립되었다. 1231년(고종 18) 몽골이 침입하자, 1232년 최이는 항쟁을 결의하며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강화 산성과 강화역사박물관 탐방에 대하여 이미 보고를 드렸다. (https://brunch.co.kr/@jylee2020/161 및 https://brunch.co.kr/@jylee2020/162, 2024.04.06 탐방)

무신정권 때 문신 양택춘의 묘지명 / 최충헌이 승인한 과거 합격증 / 청자 (항아리, 완)무신정권 때 문신 양택춘의 묘지명 / 최충헌이 승인한 과거 합격증 / 청자 (항아리, 완)

삼별초와 대몽 항쟁

   몽골군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나 고려 정부는 몽골군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회피하였다. 결국 1258년 (고종 45)에 최 씨 정권이 무너졌다. 1259년 몽골과 강화가 이루어졌다. 1270년 (원종 11)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여 항몽 정권을 수립하고, 진도의 요장산성, 제주도의 항파두리성으로 옮겨 대몽 항쟁을 하였다. 그러나 1273년(원종 14) 고려와 원의 연합군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되어, 40여 년간의 대몽항쟁이 끝났다.

삼별초와 대몽 항쟁 / 진도 용장산성 출토물삼별초와 대몽 항쟁 / 진도 용장산성 출토물

진도 용장산성

   전남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있는 산성이다. 삼별초는 진도로 들어가 기존의 사찰 건물을 개조하여 궁궐로 삼고, 그 주위에 산성을 쌓아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20여 채의 건물이 치밀하게 배치되었다. 진도로 옮기기 전에 미리 궁궐과 산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한다. 1270년  8월부터 약 9개월 주둔하였다.

진도 용장산성 출토품 (수막새, 사도 四道를 새긴 기와, 대장혜를 새긴 기와, 청자 상감 국화문 잔, 흙으로 만든 말, 철로 만든 말)진도 용장산성 출토품 (수막새, 사도 四道를 새긴 기와, 대장혜를 새긴 기와, 청자 상감 국화문 잔, 흙으로 만든 말, 철로 만든 말)

항파두리성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와 상귀리일대의 삼별초의 최후의 거점이다. 토성의 흔적과 대궐터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를 비롯하여 17개소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현재도 존재하는 '고내촌'을 새긴 기와, 철제 갑옷 편, 고급 청자류, 막새기와, 숟가락, 중국 동전 등이 출토되었다. 유물성격이 강화 및 진도에서 나온 삼별초의 것과 비슷하다. 제주에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약 3년간 주둔하였다.

제주 항두리성(삼별초 최후 거점) 출토품(청자 작은 병, 청자 투각 돈 조각, '고내촌' '만' 새긴 기와, 송나라 동전, 청동 숟가락제주 항두리성(삼별초 최후 거점) 출토품(청자 작은 병, 청자 투각 돈 조각, '고내촌' '만' 새긴 기와, 송나라 동전, 청동 숟가락
원나라 관료가 사용하던 인장, 권문세족이 발원한 암막새 / 청자 연꽃무늬 완원나라 관료가 사용하던 인장, 권문세족이 발원한 암막새 / 청자 연꽃무늬 완

고려, 원 연합군의 일본 원정

여몽 연합군과 일본군의 전투도여몽 연합군과 일본군의 전투도

원의 간섭과 몽골풍의 유행

   1259년(고종 46) 몽골과의 강화가 이루어진 후 1356년(공민왕 5)의 반원 정책이 성공할 때까지 원의 간섭이 지속되었다. 고려 왕은 원의 부마(사위)가 됨에 따라 용어와 관직 등을 원에 비해 낮추어 사용하였다. 충자가 포함된 묘호를 원으로부터 받았다. 두 차례 일본 원정에  필요한 군량과 선박 군사를 조달했다. 원으로 보내는 공물과 공녀 출은 백성들 생활을 고달프게 했다. 몽고풍이 유행하고, 몽골어를 사용하였다. 원에서도 고려양이라고 하는 고려식이 유행하였다.

원나라  관료가 사용하던 인장 / 권문세족 출신이 발원한 암막새원나라  관료가 사용하던 인장 / 권문세족 출신이 발원한 암막새

딸을 원의 공녀로 보낸 왕족 부인(수령옹주)의 묘지명

   고려 왕족 예성부원대군 왕온의 아내 김 씨의 묘지명(수령옹주 김 씨 묘지명)이다. 김 씨는 경순왕 후손 김경손의 손녀다.  김 씨는 29세에 남편을 여의고 혼자 3남 1녀를 키웠는데, 원에서 왕실의 여자를 바치라는 명령이 내려와, 김 씨의 외동딸이 뽑혀 가게 되었다. 그녀는 딸을 보내고 슬퍼한 나머지 1335년에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원 간섭기 고려의 공녀문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수령옹주 묘지명의 내용

   "... 수령옹주는 14살에 왕 씨 온과 결혼하였다. 원나라 황제의 명이 있어, 그 딸이 뽑혀 들어가니... 이에 매우 귀여워하던 딸이 멀리 가게 되자, 옹주가 근심하고 번민하다가 병이 생겼다.... 세상을 떠나니, 나이 55세였다. 동방의 자녀들이 뽑혀서 서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건너뛰는 해가 없었다. 비록 왕실친족으로 귀한 집안이라도 숨기지 못하고, 어머니와 딸이 한 번 이별하면 아득하게 만날 기약이 없었다. 슬픔이 골수에 사무쳐 병이 들고, 세상을 떠나는 자도 한 두 명에 그치지 않았으니, 천하에 지극히 원통한 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어디에 있으랴...."

딸을 공녀로 보낸 왕족 부인의 묘지명딸을 공녀로 보낸 왕족 부인의 묘지명

고려의 불교문화

   고려 태조는 훈요십조를 통하여 불교국가 방향을 제시하였다. 개경에 법왕사등 10대 사찰이 세워졌다. 사원은 면세 특권으로 대지주가 되었다. 숙박시설인 원을 경영하거나 팔관보나 광학보를 통해 일종의 대부업을 하기도 하였다. 광종 때부터 승과제도가 실시되고, 고승을 왕사나 국사로 임명하여 국가적 통합을 상징하는 존재로 삼았다. 연등회 팔관회 등 국가적 행사로 공동체적 인식을 확대했다. 현세행복과 내세의 서방정토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랐다. 불교에 대한 믿음은 고려인들의 일상이 되었다.


고려의 왕사, 국사

보조국사 지눌의 목우지수심결 언해 (마음을 닦는 법)보조국사 지눌의 목우지수심결 언해 (마음을 닦는 법)
신각 왕사 혜근 초상화(새로운 선풍을 일으킴)신각 왕사 혜근 초상화(새로운 선풍을 일으킴)
대각국사 의천(화엄종의 영도자)대각국사 의천(화엄종의 영도자)
공양물(화엄종 사찰 영통사)공양물(화엄종 사찰 영통사)

신앙으로 피어난 불교 미술

   불상과 보살상은 예배의 대상으로 회화나 조각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의식에 필요한 범음구와 의식구 장엄구 호신불 등의 공예품은 불교 미술을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켰다. 불사는 개경과 지방, 왕실과 관료 군인 향리등 폭넓은 계층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청동으로 만든 북청동으로 만든 북
범종(청동)범종(청동)
고려 시대 종(고려 문종 12년-청녕 4년이 세겨짐, 경기 여주)고려 시대 종(고려 문종 12년-청녕 4년이 세겨짐, 경기 여주)
청동 향로 손잡이, 청동 향로 (개성 운봉사 터에서 출토)청동 향로 손잡이, 청동 향로 (개성 운봉사 터에서 출토)
향로(다리가 세 개), 청동 향 완, 은 무늬 향 완향로(다리가 세 개), 청동 향 완, 은 무늬 향 완
고려 태조가 담무갈 보살에게 예배하는 그림고려 태조가 담무갈 보살에게 예배하는 그림
사경변상도(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요약)사경변상도(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요약)
좌상 보살 상좌상 보살 상
청동으로 만든 작은 탑청동으로 만든 작은 탑
비사문천과 관음보살이 함께 새겨진 거울, 부처가 새겨진 거울, 구리에 금을 입힌 경패비사문천과 관음보살이 함께 새겨진 거울, 부처가 새겨진 거울, 구리에 금을 입힌 경패
가사를 고정하는 띠, 승려의 머리카락을 미는 칼가사를 고정하는 띠, 승려의 머리카락을 미는 칼
청동으로 만든 작은 탑청동으로 만든 작은 탑
구리로 만든 조사상(경기 성남 판교)구리로 만든 조사상(경기 성남 판교)


고려의 인쇄 문화

   인쇄 기술은 불교의 융성과 함께 사원의 출판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사원의 출판활동은 종이 수요를 증가시켜 제지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판하기(틀에 주조된 활자 끼워 넣기)조판하기(틀에 주조된 활자 끼워 넣기)
조판된 모습조판된 모습
고려의 인쇄문화고려의 인쇄문화
최초의 인쇄 대장경(초조대장경)최초의 인쇄 대장경(초조대장경)

천년을 지켜온 팔만대장경

   목판 인쇄는 11세기의 초조대장경과 대각국사 의천의 교장, 13세기 전반에 판각한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이 대표적이다. 초대장경은 몽골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어 현재 인쇄본만 전한다.

재조대장경은 몽골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국가적 역량으로 판각하였다고 전해지는 한역 대장경 가운데 가장 정확하고,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남 합천 해인사 경내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

   금속활자를 사용한 것은 1239년(고종 26) 목판으로 펴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 책은 원래 금속 활자본인데 목판으로 다시 인쇄한다는 기록이 있다. 13세기 전반기에 이미 금속활자를 사용하였다. 1377년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

   낱낱의 글자를 만들어 조합해 찍는 활자 인쇄는 정보를 빠르게 전달할 수 있었다. 구리나 납 같은 금속으로 만든 금속활자는 활자 주조 인쇄용 먹물 종이제작처럼 다양한 기술이 필요하였다.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함으로써, 고려의 기술력을 증명하였다. 이 활자는 개성의 고려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금속으로 만든 고려 활자(1)금속으로 만든 고려 활자(1)
금속으로 만든 활자(2)금속으로 만든 활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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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책 (직지)완성된 책 (직지)

공민왕의 개혁정치

   고려 31대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몽골식 변발을 풀고 원나라 옷을 벗어 자주적 의식을 보였다. 원의 세력 기철 노책 권겸 등을 숙청하였다. 원 내정간섭기구인 정동행성이문소를 없애고,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원에 넘어갔던 영흥지역을 회복하였다. 신돈을 등용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불법적인 토지와 노비를 원상회복시켰다. 국학인 성균관을 중건하여 신진사류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원의 간섭과 몽골풍의 유행 / 공민왕의 개혁 정치원의 간섭과 몽골풍의 유행 / 공민왕의 개혁 정치
염제신 초상화(공민왕의 충신)염제신 초상화(공민왕의 충신)

새 왕조의 여명, 고려에서 조선

   이성계는 원의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에서 대대로 천호직을 세습해 온 변방 출신이었다. 아버지 이자춘은 공민왕이 이 지역 수복에 결정적 역할을 하여 고려 벼슬을 받았고, 동북권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성계는 홍건적과 왜구 침입을 물리치고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명이 원을 물리치고 중국을 차지하자 공민왕이 수복했던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고 하였다. 우왕은 최영과 함께 정치적 난국 타개책으로 요동 정벌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 반대파를 숙청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새 왕조의 여명, 고려에서 조선으로새 왕조의 여명,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성계의 외교 조력자, 조반이성계의 외교 조력자, 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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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위치

위화도 표기된 국방 지도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 위화도에서, 1388년 이성계는 군대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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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가 크게 표현된 국경지역 국방 지도 / 왕조 교체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상을 내리는 문서위화도가 크게 표현된 국경지역 국방 지도 / 왕조 교체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상을 내리는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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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고려 왕조가 저무는 과정을 담은 고려사 (최영 열전)고려사(고려 왕조가 저무는 과정을 담은 고려사 (최영 열전)

<참고 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팸플릿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www.museum.go.kr)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 나무 위키, 위키백과

-. 별별 한국사(최태성 저)


글이 길어져  조선은 다음 편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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