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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백자(白磁)의 나라,국립중앙박물관 입문서

국립중앙박물관(9)

by 애바다
국립중앙박물관
동국대지도(1)

동국대지도

18세기 중엽의 동국대지도에 따르면, 조선의 국경은 백두산 너머의 간도 지방까지 확장되었다. 현재의 독도인 우산도,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등도 포함되어 있다.

동국대지도(2)

잠깐, 알려드립니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의 선사시대, 고조선,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 대한제국까지 한민족 역사 전체를 브런치북에 모두 담았습니다.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 입문서입니다.



조선(朝鮮)

조선은 '동쪽 끝에 해가 뜨는 땅'이란 의미를 가졌다. 고조선(古朝鮮)의 계승자로 약 518년간(1392~ 1910년) 한반도에 존재한 왕조 국가다. 국왕의 밑에 양반관료들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어 정치를 했다. 농업경제를 중심으로, 양반 중심 세습신분제 사회였다. 유교 문화의 위세가 강했다. 대쪽 같은 선비의 나라였다.


(전문 지식이 부족하여, 아래 글의 대부분의 설명은 국립중앙박물관(2024.11.16 및 2025.02.22 방문) 내의 설명판에서 인용하였음을 미리 밝힌다. 역사책에서 보지 못한 유물들도 많았고,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들도 많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처음 방문하실 예정인 분들에게는, 미리 예습하시는 입장에서 읽어 주시면 좋겠다. 특히 사진을 많이 첨부한 이유는 아직 한글을 떼지 못한 귀염둥이 손주 녀석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다. 훗날 국립중앙박물관에 데리고 갈 때를 대비, 참고서를 미리 엮었다.)


전쟁의 상처는 언제나 깊고 가슴 쓰리다. 병자호란 삼학사 홍익한 선생의 딸 묘지명 이야기와 삼학사 오달제 선생의 시는 조선시대 백성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 준다.


삼학사 홍익한 선생(1586~1637)의 딸 묘지명

병자년(1636) 아버지(홍익한 선생)는 평안도 수령이 되었다. 정축년(1637)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어머니(허 씨)는 절개를 세우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홍익한 선생)는 오랑캐 조정에 끌려갔다. 나(딸)는 고아가 되어 친척집에서 길러졌다. 베를 짜고 스스로 양식을 구했다. 할머니(홍익한 선생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네 아비가 비록 죽었지만, 오히려 살아 있는 듯하다"하였다.


삼학사 오달제 선생이 아내에게 보낸 시

부부 은정 중하기도 한데

만난 지 두 돌도 못 되었네 그려

이제는 만 리 밖에 이별하여

백년가약이 헛되구려

길이 멀어 편지도 못 부치고

산이 길어 꿈조차 더디 넘네

나의 살 길은 기약할 수 없으니

배 속의 아이나 잘 보살펴주오


*오달제 선생(1609~1637)

홍문관 수찬 벼슬로 29세에 청에 끌려가 처형되었다. 가족묘와 가묘(시신이 없고, 혁대와 주머니로 만든 무덤)가 경기 용인군 모현면 오산리에 있다. 국가가 힘이 없으면 백성의 삶은 비참하다. 효창공원에 모셔진 안중근 의사의 묘(가묘, 시신을 찾지 못함)를 생각나게 한다.


백자예찬

좋은 것을 사게되면 머리맡에 놓고 자다가

한밤중에 일어나 불빛에 비추어 보곤 했는데

보통 한 보름 가량은 흥분 때문에

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다.

백자 예찬

조선의 국호

동쪽 끝에 해가 뜨는 나라다. (동국여지승람)

조선의 국호(동방의 해가 뜨는 나라) / 태조 이성계 어진

경복궁

조선의 으뜸이 되는 법궁이다. 중심전각은 근정전으로 높은 2층 기단 위에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서 빈터로 방치되다가, 1867년에 중건되었다.

한성 /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의 중심인 정전이다. 왕 즉위식, 조회,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다. 좌우측에 품계석이 있어 직위에 따라 도열한다.

경복궁과 근정전 /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진하도

1887년 1월 고종이 대왕대비 신전왕후의 팔순을 기념하여 존호를 올린 행사 때의 그림이다.

경복궁 근정전 진하도

근정전 어좌

어좌 뒤에는 일월오봉(해 달 다섯 봉우리) 병풍을 설치했다. 천정은 용문양으로 장식했다. 용은 왕을 상징한다.

근정전 어좌

동궐(창덕궁과 창경궁)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 동궐이라고 했다. 경복궁이 불탄 후 복원되기까지 약 270년간의 왕궁이었다. 바로 남쪽에 조선 왕들 제사를 지내는 장소인 종묘가 있다.

동궐도(창덕궁과 창경궁) / 종묘
조선의 왕 / 조선 연표

15세기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연산군)

통치 체제의 정비 시기였다. 창업 후 100여 년간 건국 정당성과 왕권 정통성 확보하고, 성리학 이념에 따라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행정 의례 군사권력을 중앙에 집중시켰다. 법전 의례서 지리서 역사서등을 편찬하였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조선의 위상을 드러내는 세계 지도다. 동아시아에서 전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양촌선생(권근) 문집

권근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자 학자다. 명나라와의 외교를 잘 처리하였고, 정종대에는 사병을 혁파를 건의하였다. 정치 외교 사상적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닦는데 기여하였다.

양촌선생 문집(1)

권근의 입학도설 서문

전북 익산(옛 지명, 금마군)에 유배되어 있을 때, 제자들 교육 경험을 살려 주자의 태극도를 기본으로 하고, 장구의 설을 참고하여 그림을 그려 보이고, 선현들의 격언을 바탕으로 썼다.


법전 편찬

정도전의 조선경국전과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을 기본으로, 1485년 경국대전을 완성했다.


국가의례 정비

다섯 가지 국가 의례인 국조오례는 왕을 중심으로 차등적 질서 체계를 보여주고, 왕의 권위를 의례라는 법적 장치로 구현하였다.


지리지 편찬

통치의 기본은 지리, 인구, 물산을 잘 파악하는 것이다. 호구 군정 주세 항목을 담은 지리지 를 편찬하였다. 성종대의 동국여지승람은 지리지에 시문을 결합한 구성으로 지역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여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다.

법전편찬 / 국가 의례 정비 / 지리지 편찬

신증동국여지승람

각 도의 지리와 풍속 등을 기록한 인문 지리지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은 전국을 양경 8도로 나누고 각 도의 역사 지리 풍속 물산 인물 정보애 문사들의 시문을 첨가한 인문지리서다. 그 후 새로 증보된 내용을 추가하여 신증이라고 밝히며 덧붙였다.


동국통감

성종 때 고대부터 고려까지 역사를 기록한 최초의 통사다. 1458년 시작하여 1485년 완성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동국통감

동물모양 제기

제사 때 술이나 물을 담았던 제기다. 코끼리(상준)와 소(희준) 문양이 있는 그릇 형태다.

동물모양 제기 (상준-코끼리, 희준-소)

통치 체제 기반 마련(경국대전)

세조(1455~1468)가 시작하여 성종(1469~1494) 때 완성된 법전이다.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여러 분야의 법규를 수록했다. 의정부와 6조가 중심이 되고 전국 8도에 수령을 파견하는 통치 체제와 성리학적 질서 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다섯 가지 국가 의례의 절차를 규정한 것이다. 시행에 필요한 사항을 정리하여 도판도 수록하였다.

국조오례의서례

세종의 민본정치

훈민정음 창제, 측우기 물시계 해시계 고안, 조세정책, 역법서 만들어 농업 장려,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 신하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했다. '임금의 직위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세종실록). 또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부지런히 돌보는 것이라고 했다(용비어천가).

세종의 민본정치

천상열차 분야지도

14세기말 조선에서 관측한 별자리 자료를 보완하여 제작했다. 세상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준 하늘의 천문을 이해하고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권력의 상징이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별자리 지도)

한글 창제

세종은 1443년(세종 25) 한글을 창제하였다. 획기적 발명품이며, 만든 사람과 반포시기 창제 원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글자다. 백성을 위해 글자를 만들었다. 자음인 'ㄱ ㄴ ㅁ ㅅ ㅇ'은 혀 입술 치아 목구멍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기본모음인 '. ㅡ ㅣ'는 각각 '하늘 땅 사람' 모양을 기반으로 만들었다.


용비어천가

총 12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조의 4대조와 태조, 태종까지 6대의 행적과 조선 건국 과정 및 설화를 담은 장편서사시다. 한글의 본문 뒤에, 한문으로 주석을 달았다.

한글 창제의 원리 / 용비어천가

국조보감에 수록된 훈민정음 관련 기록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다. 1443년에 만들어 1446년에 반포하였다. 불교와 유교 서적의 번역, 농사직설 같은 실용서, 내훈 같은 교화서등의 편찬에 활용되다.


한글 금속활자로 간행한 불경언해

세조가 번역하고 1461년 간경도감에서 간행했다. 을해자로 찍었다.

국조보감(훈민정음 창제를 기록함) / 능엄경언해(한글 금속활자인 을해자로 찍은 불경언해)

편경

편경은 돌로 만든 악기로 온도에 따라 형태가 변하지 않으므로 음의 기준이 된다. 1430년(세종 12) 경기 남양(현 화성 남양동)에서 발견된 경석으로 만들었다.

악학궤범에 수록된 편경-궁중 음악 아악의 기준음) / 편경(편)의 실재 모습

앙부일구

1434년(세종 16) 10월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한양 종로의 혜정교(현 광화문 우체국 부근)와 종묘의 남쪽 거리에 설치하였다. 솥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앙부일구라 했다. 원내부 가로선은 24 절기를, 세로선은 시간을 표시한 것이다. 휴대용 앙부일구도 있다.

앙부일구(백성이 함께 사용하는 해시계)

조선통보

건국 초에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지폐를 사용하였다. 조선통보는 동전모양으로, 10푼의 무게는 1냥(약 40g)이다.


저울추

1427년(세종 9) 공조에서 제작, 저울추에 근과 냥이라는 무게 단위가 표시되어 있다. 1근(약 641g)은 16냥이다.


삼총통

탄환이 아니라 화살촉을 발사했는데, 약 960m 날아갔다. 4군 6진에 배치했다.

조선통보(조선 최초의 동전) / 저울추(1근=641g) / 삼총통 (화살을 장착함)

조세 정책

조 용 조가 세제의 기본이다. 조는 토지에 부과하여 쌀과 콩을 거두는 방식, 용은 성인 남자의 노동력 징발, 조는 고을의 특산물 거두는 제도다. 세종은 1430년 5개월 동안 전인구의 1/4인 17만 2,806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찬성이 57%였다. 좀 더 가다듬어 1444년 토지 비옥도에 따른 전분 6등제, 흉년과 풍년에 따른 연분 9등제를 시행하였다.


15세기 공납용 분청사기

지역의 특산물을 왕실과 관청에 납부하였다. 분청사기가 그 예다. 제작 지역으로는 경주, 군위 영천 밀양등 경상도였다. 제작 관청으로는 장흥고와 인수부가 많았다. 이름을 새긴 이유는 빌려주고 나서 회수할 때 편리하였다.

조선 전기 조세 정책(전분 6등제, 연분 9등제) / 분청사기(장흥고, 인수부 글자가 있음-15세기 공납용 자기)

삼강행실도

충신 효자 열녀의 바른 행실을 모은 책이다. 1434년(세종 16)에 편찬하였다. 지속적으로 보급되어 유교윤리 전파에 활용하였다.

삼강행실도

가례

송나라 성리학자 주희(1130~1200)가 지은 가정의례 서적이다. 의례와 규범을 그림을 넣어서 이해하기 쉽다. 유교적 예의범절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가례

소학

윤리 교과서다. 1187년 주희의 제자 유자징에 의해 편찬되었다. 어린 학동이 성리학의 기초를 배울 수 있는 교과서다. 예의범절, 격언, 충신 효자이야기를 담았다. 김굉필(소학동자), 조광조(1482~1519), 김안국(1478~1543)등이 중요시했다.

소학

국조보감

1849년(헌종 15) 역대 왕의 본받을 만한 업적을 모았다. 세종대왕의 성품과 업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훈민정음,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발명과 국토 확장, 백성 교화에 관심을 가졌다.

국조보감(역대 왕의 본받을 업적을 모아 편찬한 책)

세종대왕

경복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국조보감 권 5, 세종조) 태종이 "충녕은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정치의 대체를 통달하였으니, 세자로 삼고자 한다"

국조보감 권 5 (세종조)

성리학

12세기 남송의 주희(1130~1200)가 집대성한 유학이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도덕적 본성과, 기라는 욕심에 이끌리는 마음이 있다. 수신을 하여 이상적인 성리학적 인간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오륜중에서 부모에 대한 효가 근본이다.

성리학(이기론, 사람에게는이라는 도덕적인 본성과 기라는 욕심이 있어, 수신하여야 이상적인 인간이 된다)

제안대군 이연 묘지(1521년)

묘지는 묘 주인의 삶에 대해 돌이나 도자기에 기록하여 무덤 주변에 묻었다. 제안대군은 예종의 둘째 아들로 이연이다. 모친 안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무덤옆에 초가를 짓고 3년 여묘살이를 했다.

제안대군 이연의 묘지

면천군 부인 능성 구 씨 묘지

성종의 셋째 아들 안양군의 부인 능성 구 씨의 묘지다. 안양군은 1504년 연산군에 의해 사사되었다. 구 씨는 위험을 무릅쓰고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죽을 때까지 제사를 모셨다.

면천군 부인 능성 구 씨 묘지

명기

사후에도 현세와 같은 생활을 계속한다는 믿음에서 무덤에 묻었던 기물이다. 생활용기, 인물과 동물형상을 묻었다. 일부 왕실과 지배층에서는 순백자 명기를 사용하였다.

명기(조선의 소형 부장품)

퇴계선생 문집

퇴계 이황과 그의 제자 고봉 기대승이 7년에 걸쳐 논쟁을 벌였다.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인 '이'와 실제 인간의 마음은 만물의 현실적인 상태인 '기'를 분리하는 이황의 학설을 '이기이원론'이라고 한다.


반면 기대승은 머릿속으로는 이와 기를 구분할 수 있을지 모르나, 모든 것에는 이와 기가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다. 기대승의 반론은 이이가 계승해 '이기일원론'을 이루게 된다.


이황은 이상적인 상태를 향해 끊임없이 수양할 것을 강조하고, 기대승과 이이는 옳고 그른 것이 뒤섞여 있는 현실에 뛰어들어 이를 바로잡는 실천을 강조한다.

퇴계 선생 문집
기대승과 퇴계 이황의 사단 칠정 논쟁

16세기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선조)

15세기말 세조 때 공을 세운 훈구세력이 득세했다. 성종 때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성리학과 윤리규범을 중시한 사람을 등용했다. 주로 언론직을 맡았던 사림 세력은 중종 때 조광조를 중심으로, 사회 전반에 변화를 일으켰다. 군주도 신하처럼 치인과 수기에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갑자사화로 기세가 한때 꺾였다. 선조 이후 사림들은 학문과 견해에 따라 무리를 짓는 붕당정치가 전개되었다.


임진왜란

왜는 1592년 (선조 25) 4월 침략했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가 명을 치기 위해 길을 빌려 달라는 정명가도를 국서로 보냈다. 조선은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는 밀렸으나, 의병, 이순신장군의 수군이 저지하고, 명군이 합세하면서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1596년 강화협상이 결렬되면서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과 조선 명 연합군의 협공 및 노량진전투로 왜군은 패주 했다. 전쟁결과 인구가 감소하고, 조선은 국가적 위기를 겼었다.

임진왜란(1592~1598)
임진왜란 (발발~종전)
임진왜란 주요 대첩(1)
임진왜란 주요 대첩(2)

군사력 비교 (개전 후)

-. 조선 : 175,000명, 명군 : 55,000명, 합 : 230,000명

-. 왜 : 140,000


왜군에게 잡힌 조선인 포로

-. 약 100,000명

(조선으로 돌아온 포로 : 5,667명)


교토 코무덤에 묻힌 코 개수

-. 214,752 개


농지 감소 : (1 결=쌀 2.8 ton 생산)

-. 전전 : 1,700,000 결

-. 전후 : 550,000 결

임진왜란 군사력 비교 및 피해 현황


병자호란(1636~1637)

명의 요동 지역 통제가 약화되자 여진족이 힘을 키워 청나라를 세웠다. 청은 황제국이라 칭하며,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조선은 묵살했다. 1636년(인조 14) 12월 청 태종이 12만 대군으로 쳐들어 왔다. 인조(1623~1649)는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었다. 주화파와 척화파로 나누어 논쟁했으나, 결국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조선은 사대의 대상을 명에서 청으로 바꾸어야 했다.

병자호란 전황
병자호란 전투도
병자호란 략사

청군이 한성 도착에 걸린 시간 : 10일

-. 1636년 12월 9일 압록강 도강, 12월 14일 한성 근접


군사력 비교

-. 청 : 128,000 명

-. 조선 : 70,000 명


청으로 끌러간 포로

-. 500,000 명


속환가

-. 최대 : 은 1500냥 (현재 약 6억 원)


조선후기 순절. 척화신 사우건립

-. 221 개 (인조. 현종 52개, 숙종 143개, 경종 5개, 영조 16개, 정조 5개)

병자호란 전황(청군 한성도착 10일, 군사력 비교, 속환가, 포로, 순절. 척화신 사우건립)

전쟁의 무기

활이 주력무기였던 조선군에 비해 왜군은 조총으로 무장하여 침략하여, 초기 조선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조선군은 화약무기로 반격했다. 살상력이 높은 대형화약 무기를 판옥선이나 거북선에 실어 왜선을 공격하였다. 특히 독창적인 화약무기인 비격진천뢰도 활용하였다. 조총을 노획하여 제조기술을 확보하고, 명나라 무기를 수용하여, 삼안총과 불랑기등을 개발하였다. 무기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

임진왜란 주요 무기들(1 조총, 2비격진철뢰, 3 삼한총, 4 승자총통, 5 현자총통, 6 화살

조총 (왜군)

포르투갈인들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조총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주력 화기다. 새도 맞힐 수 있다고 하여 조총이라고 이름 지었다. 조선도 제조기술을 확보하여 주력무기화 하였다. 유성룡(1542~1607) 서애집에서 조총은 총알이 수백 보까지 미치고, 마치 우박과 같아, 활과 화살은 비교할 수도 없었다고 했다.


비격진천뢰(조선군 무기)

대량 살상 무기. 화포장이었던 이장손의 발명품이다. 폭발할 때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난다고 부쳐진 이름이다. 폭탄 안에 뇌관에 해당하는 목곡을 넣어 화약을 터뜨려 안에 있돈 쇳조각이 사방으로 날아가게 하는 원리다. 목록에 갈는 도화선의 길이에 따라 폭파시간 조절이 가능한 시한폭탄이다. 1592년 9월 경주읍성 탈환에 처음 사용되었다.

1 조총, 2비격진철뢰
2비격진철뢰, 3 삼안총, 4 승자총통, 5 현자총통

승자총통(조선)

1583년 김지가 개발한 소형화기다. 총구에서 화약과 실탄을 장전하고 손으로 약선에 불씨를 점화하여 발사한다. 철환 15개를 발사할 수 있고, 사거리는 약 600보다.


현자총통(조선)

장거리 화포다. 화약 양, 발사 거리에 따라 천자, 지자, 현자, 황자 총통으로 나눈다. 현자총통은 세 번째 거리다. 최대사거리 1,500보(2.3km)다. 임란 이후 19세기까지 수군의 주력 화포였다.

4 승자총통, 5 현자총통

한민족은 원래 활을 잘 쐈다. 왜군이 긴 창과 짧은 칼을 사용하여 공격하면, 조선군은 활과 화살로 먼 거리에서 제압하였다.

6 화살

삼안총

총구가 세 개여서 연달아 발 수 할 수 있다. 명을 통해 도입했고, 조선에서 개량하였다. 제작연대와 제작 장인의 이름이 세겨져 있다.

3 삼안총

전쟁의 기록

전쟁을 사전에 방지 못한 위정자들은 통렬한 자기반성 기록을 했다. 도망간 관군을 대신하여 의병장이 지켰다. 삶의 터전이 무너지고 가족과 헤어졌다.


징비록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은 시경에 "나는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후환을 조심한다."라고 징비록을 지은 이유를 밝혔다.


망우당집

망우당 곽재우의 시문을 모은 책이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낙동강 일대를 막아 왜군 보급로를 차단하여 전쟁초기의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였다. 1592년 의병을 일으키며 '창의시자명소'와 의병 일으킨 내력을 기록한 용사별록에 기록되어 있다.


삼학사 홍익한의 딸 묘지명

병자년(1636) 아버지(홍익한)는 평안도 수령이 되었다. 정축년(1637)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어머니(허 씨)는 절개를 세우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홍익한)는 오랑캐 조정에 끌려갔다. 딸은 고아가 되어 친척집에서 길러졌다. 베를 짜고 스스로 양식을 구했다. 할머니(홍익한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네 아비가 비록 죽었지만, 오히려 살아 있는 듯하다"하였다.


무덤으로부터 온 편지, 묘지명

생년, 가족관계, 행적 등을 도자기에 새겨 무덤에 함께 묻었다. 홍익한의 딸(1626~1683, 남양 홍 씨)의 묘지명이다. 어린 시절 병자호란으로 눈앞에서 가족을 잃는 비극을 겪고도 아버지의 뜻을 기리며 꿋꿋하게 살아간 삶이 기록되어 있다.


전쟁의 기억

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을 공신으로 책봉하였다. 민간에서는 장수, 의병장, 순절자의 이야기를 소설과 전기로 만들었다.


전쟁문학

임진록

필자미상. 이순신, 곽재우, 사명당, 김웅서, 강홍립 등 영웅들이 도술을 부려, 왜적을 굴복시킨다는 내용의 고전소설이다.


유충렬전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영웅소설이다.


위성공신박진교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신하, 박진에게 내린 문서다.

삼학사전

우암 송시열이 지은 삼학사의 전기다.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보인 불굴의 저항 정신과 비극적 최후가 묘사되어 있다.


오달제가 아내에게 보낸 시

부부 은정 중하기도한데

만난 지 두 돌도 못 되었네 그려

이제는 만 리 밖에 이별하여

백년가약이 헛되구나

길이 멀어 편지도 못 부치고

산이 길어 꿈조차 더디 넘네

나의 살 길은 기약할 수 없으니

배 속의 아이나 잘 보살펴주오


*오달제(1609~1637)

홍문관 수찬 벼슬로 29세에 청에 끌려가 처형되었다. 가족묘와 가묘(시신이 없고, 혁대와 주머니로 만든 무덤)가 경기 용인군 모현면 오산리에 있다. 국가가 힘이 없으면 백성의 삶은 비참하다.


청의 연호 대신 명 연호를 사용한 태합

출산 후 태를 넣어 묻은 태합이다. 병자호란 이후 공식적 문서에는 청의 연호를 써야 했지만, 민간에서는 청에 대한 반감으로 명의 연호를 계속 썼다.


명과 청과 왜와의 외교

명나라 사행

1392년(태조 원년)~1494년(성종 25)까지 평균 6~7차례 사행을 갔다. 정사 부사 서정관 역관 의원 화원 등 약 30명과 개인수행원 70~250명 규모였다.


청나라 사행

정식 인원 30~40명을 포함 200~300명 규모였다.

명과 왜와의 외교(전체)
중국과의 외교
청나라 사행
사행과 통신사 루트


일본과의 외교

조선은 일본, 류큐 등과의 외교를 교린이라고 했다.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행했다. 일본에 있던 조선 포로를 데려오고, 기유약조를 통해 국교를 재개했다. 일본 요청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문화교류를 이어갔다.

일본과의 외교(통신사 위상)


사행과 통신사 루트

다이묘 도쿠가와 쓰나에다가 조태억에게 보낸 편지 (일동 시문에 수록)

조선은 예로부터 예의의 나라이고 문물이 성대한 곳이라, 본디 멀고 가까운 나라들이 흠모하던 곳이다. 정사(조태억)께서는 빼어난 기운을 받아 문장과 경륜으로 명망이 높다.

다이묘 도쿠가와 쓰나에다(1656~1718)가 조태억(통신사 정사)에게 보낸 편지(일동시문에 수록)

일동시문

1711년 통신사 조태억이 정사로 일본에 머물 때 일본 관료 문사로부터 받은 시와 편지를 편집하여 첩으로 만들었다. 총 8 첩이 남아 있다.

아라이 하쿠세키(1657~1725)의 필담 (일동시문에 수록)

계사갱준

계사년에 (1773년, 영조 49년)에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개천 바닥을 다시 팠다.

측우기와 계사갱준

측우기

공주 충청감영의 측우기(국보)와 측우대다. 세종대왕은 빗물이 이처럼 부족하니, 농사를 망칠까 염려된다며, 각도의 관찰사들에게 가뭄에 철저히 대비하라고 했다.

측우기

달 항아리

조선의 대표적인 백자 항아리. 둥근달을 연상시키며, 높이 40cm 넘는다. 커다란 대접 두 개를 이어 만들었다. 살짝 이지러져 실제의 달과 같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달항아리(조선의 대표적 백자 항아리)

산수 유람 문화

송도 지리산 금강산 관동 사군(재천 단양 청풍 영춘현) 지역이 대표적 유람지였다. 성리학 확산으로 유람공간 은거지로서 심성을 기르고 학문과 생활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산수 유람 문화

한벽루 시

청풍부 관아에 있던 누각으로 남한강과 금병산을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인 한벽루에서 시를 지었다.


단산별곡

신광수가 영월부사 재임시절 단양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지은 작품이다.

산수를 유람하는 것은 미인을 보는 것과 같다

사산금표도

서울 안팎에서 무덤의 조성이나 벌채를 금지하는 경계를 표시한 지도다.

사산금표도

지도 제작

지도 제작 기술의 발전으로 국가와 민간에서 지도를 제작하였다. 전국 지도와 도별 지도, 한양과 지방 지도, 세계 지도와 외국지도, 군사 지도와 여행지도 등 다양한 지도를 만들었다.

지도 제작

대동여지도 속 한성 지도

경조오부도와 도성도가 있다. 경조는 한양을 뜻한다. 도성도는 성곽과 관청등 중요 시설과 도성 내부 시가지를 그린 지도다.


대동여지도 목판

김정호는 1861년 지도를 제작하고, 모두 60여 개의 목판 양면에 각종 지리 정보를 새긴 뒤 인쇄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목판 크기는 가로 43cm, 세로 32cm 정도다. 수령 100년 정도의 피나무로 만들었다. 목판하나는 남북 120리, 동서 160리 정보가 담겨있다.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 표제와 지도표
대동여지도 목판
대동여지도

빈곤한 삶

가혹한 세금과 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노비가 되는 사람이 많았다.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한양으로 몰려들어 임노동자가 되었다.

빈곤한 삶(소반. 그릇, 거창가, 자매명문-자신을 노비로 팔다)

풍요로운 삶

부유층은 바둑 장기 투호 활쏘기로 심신을 단련하였고,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고 서화를 즐기거나 문방구 골동품 서책 분재 수석을 수집하고 감상했다. 화려한 문방구를 선호했다.

풍요로운 삶(투각문 필통, 연적. 묵호)

도박과 단속

조선후기에는 도박이 성행했다. 사기도박이나 고리의 이자놀이, 자릿세를 뜯는 자도 나타났다. 도박을 금지하였으나, 거리 점포에서 도박도구가 일상용품으로 팔렸다.

대명률에는 "재물로 도박하는 자는 장 80에 처하고 판 위에 흩어진 재물은 관청에 들이며, 도박판을 열어 장소를 제공한 사람도 같은 죄로 하되 현장에서 발각된 자만 검거하고, 관직이 있는 자는 한 등급을 더하여 처벌한다."라고 적혀 있다.

도박과 단속 (담뱃대 걸이, 담뱃대, 골패와 골패보)

조선 후기 풍요와 빈곤

18~19세기 한양은 상업도시 면모를 갖추었다. 극소수에게만 부가 집중되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도박이 성행했다.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궁핍해졌다.

조선후기 사회와 빈곤(도박 경계한 정약용, 도박으로 재산탕진한 이춘풍)

열쇠패

상평통보로 기하학적 무늬나 동식물, 소망 글귀를 새겨 기념품처럼 보관했다. 신부의 혼수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상평통보로 꾸민 열쇠패(신부의 혼수품, 부정 불길 막는 벽사의 의미)

소금가마 매매 문서

소금을 만드는 가마를 매매했다. 큰 가마 3좌를 40냥에 거래했다. 염세를 부과했는데, 1좌에 소금 4석(화폐로 1냥, 면포로 대납 시 1필반)이 매겨졌다.

소금가마 매매 문서(큰 가마 3좌 40냥, 세율은 염분 1좌에 소금 4석)

17세기 사회 변화

전후 물품과 화폐가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생산력의 증가에 따라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물과 면포로 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하게 되었다. 화폐경제가 발달하였다. 대외적으로 조선 상인이 일본 상인에게서 은화를 받고, 중국의 비단을 파는 중개무역이 이루어졌다. 은화는 고액 화폐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17세기 사회 경제 변화(물품화폐 쌀. 면포)와 은의 유통(중국 은화와 일본 은화)

활자

실록자

실록 간행을 위해 만든 활자다.

실록자(실록을 만들기 위해 만든 활자)

한구자

명필 한구(1636~?)의 글씨체로 만든 활자다. 1782년(정조 6) 8만여 자를 다시 만들었다.

한구자(명필 한구의 글씨체로 만든 활자)

교서관인서체자

인서체(각진 글자체)를 본떠 교서관에서 만들었다. 문집 간행에 사용되었다.

교서관인 서체자(문집 간행에 널리 사용된 명조체 활자)

금속활자 제작과 서적 간행

유교적 통치에 필요한 서적을 간행하는 데 활용했다.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1403년, 태종 3)를 만들었다. 전란 후 재정비를 위하여 필요한 서적을 간행하기 위하여 17세기중밥부터 다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금속활자 제작과 서적 간행

임진자

1772년 임진년에 다시 만들었다.

임진자 (갑인자의 글씨체로 임진년에 다시 만든 활자)

정리자

정조가 계획하여 개량한 활자다.

정리자(정조가 계획하여 개량한 활자)

한글 활자

왕세자나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 만든 활자다.

한글 활자(세자와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활자)

지방 통치 제도

조선 초 전국을 8도로 나누고, 지방은 부. 목. 군. 현으로 구분하였다. 전국 약 330개의 군현 아래에 면. 리. 통이라는 하의 단위를 만들었다. 각 도에는 관찰사는 군사와 민사를 지휘했고, 병마절도사를 겸하여 지방병권까지 장악하였다. 지방관서의 서리와 향리는 수령의 행정 실무를 보좌했다.


암행어사

지방 통치를 정비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왕의 특명 사신을 군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지방관을 감찰했다. 역참에서 말을 갈아탈 수 있는 마패, 공평함을 상징하는 자, 명령서를 소지하였다.

암행어사

마패

출장 가는 관원에게 준 역마 사용 허가 패다. 상서원에서 발급하였으며 지급 말의 수가 그려져 있다. 마패에 따라 1 필에서 5 필까지 이용할 수 있다.

마패(1 마패~5 마패)
암행어사 마패

암행어사 구폐절목

함경도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작성한 문서다. 지역 주민 생활의 어려움을 조사하고,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마패

암행어사의 휴대용품

휴대용품 (묵통.묵호.붓, 나침반 선추, 십장생 무늬 나침반)/ 휴대용 그릇(표주박, 찬합)

진유척

네 개의 중국 척이 새겨진 놋쇠로 만든 자다. 네 면에 각각 건초책, 주척, 영조척, 포백척이 새겨져 있다. 조선은 황종척을 단위의 기본으로 하였다. 주척으로 척도의 체계를 세웠다. 영조척은 목공과 건축, 포백척은 직물의 길이를 재는 데 사용하였다.

진유척(네 개의 중국척이 새겨진 자)

지례현 읍지

지금의 경북 김천시 지레면 관련 내용을 정리하였다.

지례현 읍지

산수 유람

시산금표도

1766년 제작되었다. 한성부 및 성저십리 내에서 소나무 벌채를 금지하고, 묘지를 만들지 못하게 금표를 세운 경계를 나타낸 지도다.


한벽루 시

산수유람은 미인을 보는 것과 같다

활자 보관장

금속활자인 정리자를 보관한 장이다.

활자보관장
활자 보관장
활자보관장

장자 상속

종가의 제사를 이을 수 있도록 입양을 승인한 문서다. 조선 전기에는 재산 상속의 권리와 제사의 의무는 균등하게 주어졌으나, 성리학이 정착되면서 종손에게 상속이 집중되고 적서의 구별이 엄격하게 되었더,

장자상속(예조계후입 안)

족보 산행

계보를 정리하는 일은 고려에도 있었으마, 조선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족보가 간행되었다.


청품 김 씨 가계도

17세기 대동법 시행과 화폐 주조를 건의한 김육의 가계도다.

족보간행(가문 기록, 청송 김 씨 가계도)

예의 정치학

붕당정치의 계보는 학설, 예론, 정치, 사회정책에 따라 나누어졌다.

예의 정치학 (예가 삶을 지배한다, 붕당정치 계보)

제사

전란 후 부계 중심의 결집이 강화되었다. 조상 제사를 함께 지내면서 결속을 다졌다. 문중이 위세와 권위를 높였다.

제사와 제기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이다. 특산물 대신 쌀, 옷감, 화폐로 세금을 내면, 공인이라는 상인이 공가를 받고 국가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 각 기관에 공급하는 세금 제도다. 국가 제정이 계량화되고 화폐와 상품이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마을단위가 아닌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여 땅이 없는 백성들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지주층이 반발하여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원익, 김육 등의 노력으로 시행될 수 있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의지와 노력의 결과물이다.

대동법
국조보감, 전제후록, 경비

영조가 육조에 내린 글(속대전)

-.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평하게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고르라.(이조)

-.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절약하고 힘을 축적하라(호조)

-. 오례를 닦고 따르며 옛 전례를 실추시키지 말라(예조)

-. 무사를 아끼고 보살펴 입직과 숙위를 엄히 하라.(병조)

-. 매우 공평하고 신중하며 법을 힘써 지켜라.(형조)

-. 맡은 임무를 부지런히 하여 온갖 장인의 모범이 돼라. (공조)

영조가 6조에 내린 글(1)

시전과 난전

시전

국가에서 영업허가한 시전이 종로에 설치되었다. 왕실과 관청의 수요품을 다루었다.


난전

임란 후 유통경제가 발달하자, 허가받지 않은 난전이 등장하였다. 도성 안에 두 곳이 있었다. 이현(현 광장시장 근처)에서는 채소를, 칠패(현 서울역 뒤)에서는 한강포구의 어물과 소금이 거래되었다. 시전 상인이 난전을 규제하고자 하였으나, 정조 때 시전의 특권을 금지시켰다. 상업이 더욱 발달하였다.

시전과 난전

상평통보

1678년 상평통보를 발행하여, 본격적으로 화폐 유통 시대를 열었다.

한강변 포구 상업 발달

충주의 부재지주

이중환(1690~1752)은 택리지에서 충주는 토질이 좋아 부자가 많다고 했다. 한양과 가까워 한양 사대부들이 충주에 정자와 토지를 많이 소유했다고 한다. 충주 풍속은 한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충주(부재지주)

이조백자

통일신라 말기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초기 유교 이념을 표현하는 도자기로서, 나라에서 운영하는 사옹원의 분원이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백자를 제작했다. 백색이 맑고 투명하며 기품이 있다. (다음 백과)


용무늬 항아리

용은 신성하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동물이다. 제왕의 권력, 권위, 위엄을 상징한다. 조선 전기간 동안 꾸준히 제작했다.

용무늬 항아리

18세기 후반 동물무늬 청화백자

정조 때 새와 동물 문양의 청화 백자가 생산되었다. 호랑이는 탐관오리를, 까치는 민초를 상징하는 풍자적 의미를 담고 있다. 호랑이는 힘이 있는 동물로, 사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나무 호랑이 까치무늬 항아리

산수 인물무늬 항아리

18세기 후반 산수 인물무늬 청화백자다.


난초무늬 항아리

18세기 사군자 문양 청화백자다.

산수인물무늬 항아리 / 난초무늬 항아리

보상화 넝쿨무늬 접시

운현궁에서 사용한 청화백자다. 접시 안쪽에는 복자가, 뒷면에는 운현이라는 글자가 있다.


보상화 무늬 합

황실용 청화백자다.

'운현' 글자가 있는 보상화 넝쿨무늬 접시, 보상화 무늬 합, 수복무늬 발

거북 등 껍질무늬 타구 접시, 구름무늬 병. 접시. 합, 꽃무늬 대접

접시, '거북 등 껍질무늬 타구. 접시, '구름무늬 병. 접시. 합, 꽃무늬 대접

척화비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운현궁 화포

운현궁에서 만든 서구식 화포다. 1874년 근대적인 소포와 포구에서 포미까지 점차 부피를 두껍게 만들었다.

척화비와 운현궁 화포
척화비 / 운현궁 화포

천주교 수용과 박해

마테오리치(1552~1610)의 천주실의등 천주교 서적이 들어오면서 점차 신앙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ㅈ선왕조는 무부무군의 사악한 종교로 낙인찍었다. 1784년(정조 8) 이승훈(1756~1801)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았다. 돌아와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1866년(고종 3) 병인박해 이후 프랑스와 조약을 맺으며 종교의 자유가 생겼다.


성경직해

한글로 번역한 성경 해설서다. 성인의 말과 행동이 기록되었으며, 명언을 묵상하고 익혀 진리를 익히기 위한 책이다.


척사윤음

천주교를 배척하라는 임금 헌종의 명령이다. 기해박해 당시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했다. 실재로는 풍양조 씨가 안동 김 씨 가문의 세도를 견제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다.

천주교 수용과 박해 (새로운 종교 박해)

경복궁 재건

흥선대원군은 왕실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경복궁을 다시 세웠다. 군사력도 강화했다. 1866년 11월부터 6개월 동안 당백전을 발행했다. 당백전은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를 지니도록 계획했다.


당백전은 약 1천6백만 냥 주조했다. 공사 경비를 지출할 때 당백전 2/3, 상평통보 1/3 비율로 지급했다. 미곡 1 섬 가격이 7~8냥이던 것이 1~2년 사이 약 6배로 물가가 뛰었다.


원납전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을 거두어들이며 공사를 무리하게 강행했다. 백성들의 고통을 경복궁 타령으로 들을 수 있다.

흥선대원군(개혁으로 부국강병)

고종

개화정책으로 부국강병을 시도했다. 1873년 (고종 10)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이 개화를 추진했다. 중국으로 유학생을 보내 무기제조법을 배우게 하고, 일본에는 시찰단을 보냈다. 미국에 파견한 보빙사는 신식우편 제도를 도입, 근대교육기관 설립, 농업 기술 연구에 기여하였다.


전환국에서 근대 동전을 발행했다. 고종은 최초의 서양식 동전인 대동전을 발행했으나, 준비부족으로 유통되지 못했다.

고종(개화정책으로 부국강병)

개항

서양이 아시아 여러 지역을 침략했다. 1842년에는 중국, 1854년에는 일본, 1862년 베트남, 이 각각 영국 미국 프랑스와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은 1876년 미국에 의해 개항된 일본과 조일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약장합편

조선이 각국과 체결한 조약들을 수록하였다.

조선평화 담판도(제물포 조약, 조선:일본)

조선평화담판도

임오군란 때 일본인 1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보상을 요구하는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다.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 군대의 주둔이 인정되어, 한일병합의 시발점이 되었다.


진신편람

조선 궁내부 산하 각 관서 관리 및 직원들 이름을 기록한 책이다.

진신편람

동학

동학 민이 일어났다. 인내천, 사람이 하늘이다. 평등하며 차별이 없다. 귀천을 나누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다.


용담유사

동학의 기본 경전이다. 최재우가 지은 동학의 포교가사칩이다.

동학(용담유사, 동학군 토벌 명령 문서)

소학교령

1895년 초등교육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만 8세부터 15세까지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소학교령

독립신문

1896년 4월 7일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최초의 한글신문이다. 서재필은 전국 국민을 위한 대변자가 되고 정부가 하는 일을 백셩들에게 전하고 고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독립신문

병인양요

1866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의 정족산성을 공격했다.

강화성 점령 (1866년 병인양요 프랑스 군대의 강화 정족산성 공격 장면)


조선왕조의 기록문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의궤등 기록물을 국가 조도로 편찬했다. 조선왕조 실록은 태조부터 철종종까지 각 왕의 역사 기록을 연도, 월, 날자별로 정리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긴 기간 동안 작성된 단일 왕조 역사다. 승정원일기는 비서기관으로서 업무일기이며, 실록편찬의 기본 자료였다. 일성록은 18세기 이후 왕의 입장에서 작성한 일기체 형식 기록물이다. 의궤는 왕실의 주요 의례난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종합보고서다. 네 건의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편찬

조선왕조 실록(1)

광해군일기

폐위된 광해군의 기록은 실록이라고 불리지 못했다.

조선왕조 실록(2)

숙종(1674~1720)

사회 제도를 재정비하여 문화 발전의 기반을 마련했다. 견제하는 집단을 급격히 바꾸는 환국을 활용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앙법을 보급하고,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했다. 상평통보를 유통시켰다. 오가작통법과 호패로 향촌사회를 통제했다. 마무리 못한 정책은 영조와 정조대에 결실을 맺었다.

숙종

숙종대왕 계시

관원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한 숙종의 당부의 말. 재등용된 우의정 허목에게 당부를 한 말이다.


이정보의 신분에 따른 호패의 변화

나무호패(벼슬을 하지 않았을 때)에서 상아호패(2품 관리)로 바뀌었다.

숙종대왕의 계시 / 이정보의 나무 호패 (신분에 따라 재질이 다른 호패)

사도세자묘지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묘지다. 영조가 직접 지었다. 원인이 세도세자의 그릇된 행동이라고 적혀있다. 슬픔을 잊지 못하고 늘 생각에 잠긴다라고 하였다.


진명(목숨을 바침)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10세 무렵 쓴 글씨다. 총명함에 영조가 만족하여 이를 모사하여 첩으로 만들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때는 그도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다.

사도 세자 묘지
진명(목숨을 바침) / 영조 아들 사도세자의 10세 무렵 글씨, 어린 시절 총명했던 사도세자의 글씨를 모사하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영조(재위 1724~1776)

정치 세력 간 균형을 유지하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국정을 안정시켰고, 왕도정치를 펼치기 위해 왕실 교육에 썼다. 군대와 관련된 양역의 개혁안인 균역법을 실시했다. 잔인한 형벌 제도를 개선했다. 하천 바닥을 깊이 파는 준천사업을 실시하여 홍수피해를 줄였다. 역대 왕들의 선정을 기록한 국조보감에 영조의 치적이 기록되어 있다.

영조 (어제대훈)


국조상례보편

홍계희 등이 영조의 명으로 국조오례의의 상례에 관한 부분을 보충하여 간행한 책이다.

국조상례보편

영조실록

공적인 일에 힘쓰고 사사로움을 버려 탕평을 이루라.


어제대훈

경종의 왕통에 대한 문제 제기로 발생한 사화의 주동자들을 처벌한 후, 신하들을 가르치고 타이르기 위하여 직접 쓴 글이다.

영조실록 (어제대훈) / 영조 어진

영조 어진

51세 때의 초상화다.


조선왕조실록의 보존과 관리

건국 초부터 사고를 지어 실록을 보관했다. 한양의 춘추관, 충주,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지어 한 부 씩 보관했다. 전후에는 강화도,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등 4개 사고가 운영되었다.

조선실록 보존과 관리 (실록 상자) / 측면

정조 (재위 1776~1800)

제왕학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왕이다. 규장각에서 인재를 육성하고 지방인재를 선발하고 실력 있는 서얼을 등용하여 권력이 일부 세력에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의 묘를 이장하고 계획도시 화성을 세웠다. 동서양의 축성법과 과학기술을 응용했다. 화성행차에는 금난전권 폐지로 활동공간이 넓어진 경강상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아쉽게도 그의 개혁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미완으로 남았다.

정조

정조가 신하들에게 내려 준 자

정조의 시가 적혀 있는 자다. 당나라 덕종 정원 연간에는 음력 2월 초하루인 중화절마다 대신과 종친들에게 공평함을 의미하는 자를 내려주고, 관료 백관들은 농서를 올려 농사에 힘쓰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조도 매년 2월 1일을 중화절로 삼고 신하들에게 자를 내려 주었다. 모두 다섯 개의 눈금을 새겼는데, 한 눈금 길이는 약 5cm다.

중화척 (정조가 신하에게 준 자로, 은으로 시가 적혀 있음)

화성 성역의궤

공사일지, 동원된 장인의 명단, 사용된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 화성 건축과 관련된 종합보고서다. 수원 화성은 주거와 군사 기능을 모두 갖추었다. 정약용이 도르래 원리를 이용 개발한 거중기 등을 활용하여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였다.

화성 성역 의궤 (장안문, 팔달문)


화성성역의궤 / 화성에 실제 사용된 금액
수원화성도

오륜행실도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윤리를 그림과 함께 엮은 책이다. 효자와 충신 열녀 믿음을 지킨 벗 등 150명 이야기가 있다. 대부분 중국인이고, 우리나라 사람도 17명이 등장한다. 판화와 함께 한글풀이를 넣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오륜: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오륜행실도

어제윤음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정조의 가르침이다. 윤음은 국왕이 백성들에게 내리는 가르침이다. 노인을 ㅇ양하고 농사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과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소학, 오륜행실도, 향약에 관한 책을 간행하고 반포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글로 번역한 윤음을 뒤에 덧붙였다.

어제윤음(정조의 가르침)

정조신한

정조가 당대 노론의 대표였던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이다. 정치적 현안들을 용의주도하게 조정하여 정국을 이끌었다. 인사문제, 세간의 풍문, 주요 인물과 집안에 관한 정보, 민심 동태, 형벌문제등 국정 전반에 대해 구체적인 행동을 지시하고 있다.

정조신한(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는 즉시 찢어라')

이 편지는 즉시 찢어라 (정조신한에 수록)

(1798년 정조 22 6월 5일 저녁)

~안부는 생략한다. ~ 즉시 거행하기에는 경들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길이 없으므로, 우선 논의를 통하여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어떠한가? 이 편지는 즉시 찢어라. (그러나 노론 벽파 영수이며 좌의정이었던 심환지는 찢어 없애지 않았다. 이 300여통의 편지들을 후손들에게 남겨서 물려 주었다. )

정조신한(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 '이 편지는 즉시 찢어라'

경화세족과 북학파

한양에 대대로 거주한 양반인 경화세족은 최고권력자였지만, 세속을 벗어난 고아한 삶을 추구하였다. 책, 서화, 골동품을 수집 감상하고 그 감정을 문학과 예술 작품에 남겼다. 종종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중국과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외국의 발전된 학문과 기술을 수용하여 이용후생의 도구로 삼자는 북학을 주장했다.

경화세족과 북학파

열하일기

박지원(1735~1805)이 그의 종형제인 사신 박명원을 따라 북경에 갔다.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 축하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건륭제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북중국과 남만주 일대를 둘러본 후문인 명사들과 교유한 이야기를 기록한 여행기다. 문화의 차이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다.

열하일기(박지원)

김광수묘지(1696~1770)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벼슬보다는 골동품 수집에 취미를 가졌고, 그림 글씨와 옛 물건에 젖어 자기만의 멋을 가지고 살았다. 묘지명을 자신이 기록하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 글씨를 쓰게 했다.

김광수묘지(스스로 자신의 삶을 기록한 묘지)

18~19세기 조선 지식인

발달된 기술과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을 백과사전, 총서, 개인 저술에서 드러냈다. 개인의 내면과 일상을 소재로 한 소설과 소품문도 유행했다. 18세기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은 청나라 문인들과 교유했다. 19세기에는 역사와 문화 풍속 학술에까지 관심분야가 확장되었다.

18~19세기 조선 지식인 (벼루, 연적, 묵호)

김수향 김창협 간찰(대를 이은 두 가문의 우정)

김수향과 그의 아들 김창협이 유창과 그의 아들 유득일 가문과의 대를 이어 교유한 기록물이다. 김창협이 유득일이 보낸 먹과 붓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있다.

한객건연집

청나라까지 알려진 시집이다. 유금이 네 명(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의 시 작품을 약 100수씩 엮은 시집이다. 유금이 1776년 사신을 따라 청에 갔는데, 청의 문인들에게 서문과 평어를 받았다. 청의 문인들과 교류가 있었다.

한객건연집

철옹간찰

청의 학자들이 조선 문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간찰첩이다. 일상 등 안부와 시화금석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아래 편지는 철옹 오숭량이 김정희와 김명희에게 보낸 것이다.

철옹간찰

<참고 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팸플릿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www.museum.go.kr)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 나무 위키, 위키백과, 다음 백과

-. 별별 한국사(최태성 저)


글이 길어져 대한제국은 다음 편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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