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10)
조선비망록(샌즈 지음, 미국인, 한국명 山島)
"나는 지도자에 대한 조선 국민들의 엄격한 감시와 국민들에 대한 관대하며 일관된 정직한 통치가 지도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더라면 조선 사람들은 훌륭한 민족으로 육성되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샌즈는 1898년 1월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한국에 부임하였다. 궁내부와 외부 고문관으로 지냈다.
잠깐, 알려드립니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의 선사시대, 고조선,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 대한제국까지 우리 민족 역사를 브런치북에 모두 담았습니다.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 입문서입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3일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대한은 삼한(三韓)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1899년에는 헌법인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를 만들었다. 9월 17일 백악산의 남쪽에서 하늘과 땅에 고유제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임오군란(1882) 이래 조선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청국이, 청일전쟁(1894~95)에서 패배하여 조선반도에서 물러났다. 일본은 요동반도를 일시적으로 획득했다. 그러나 3국(러시아·프랑스·독일)의 간섭을 받아 요동반도를 청국에 다시 반환했다(1895. 5) 일본의 지원하에 개혁(갑오·을미개혁)을 추진해 오던 온건개화파 내각대신에, 왕비 민 씨의 지지를 받는 보수파 인물들이 입각함으로써 정부는 배일·친러적 경향을 띠어갔다.
위험을 감지한 일본이 발악적으로 1895년(고종 32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이후 고종은 일본과 친일내각이 장악한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하였다. 현재 덕수궁 담을 공유하고 있는 영국대사관 근처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는 길을 "고종의 길"이라고 명명하고 관리하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과 중명전, 고종의 길" 참조 요망, https://brunch.co.kr/@jylee2020/101)
아관파천이다. 친러내각을 수립한 뒤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여 황제에 오르고 대한제국을 건국하였다.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 고종이 칭제건원하여 황제를 선포하고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변경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수교국들의 공식 승인을 받았으며 이전 조선의 영문 국호이던 Korea에서 따 와 국제적으로 Empire of Korea로 불렸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경찰권을 일본에 강탈당했다. 이를 시작으로 군대를 해산하였다. 1904년 7월 20일에 군사경찰훈령을 만들어 치안권을 빼앗았다. 8월 22일에는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로 재정권을 빼앗았다.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1910년 8월 22일에 한일병합조약이 강제체결되고, 8월 29일에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로 멸망하였다.
1882.06.09 : 임오군란
1894.07.25~1895.04.17 : 청일전쟁(청국 패전)
1895. 04.23~04.29 : 3국 (러시아·프랑스·독일)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일본이 청에 다시 반환
1895.10.08 :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1896.02.11 : 아관파천
1897.10.12 : 고종 칭제건원, 황제를 선포하고 국호 변경(대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1904.02.08~1905.09.05 : 러일전쟁(러시아 패전)
1905.11.17 : 을사늑약
1910.08.29 : 대한제국 멸망(경술국치)
환구단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면서 환구단에서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 지긋지긋한 중국과의 사대관계가 비로소 끝났다. 경운궁 옆에 있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환구단을 지었다. 황제국의 황제로서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몇 백 년간 유지하던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마침내 청산하고, 중국과 대등한 지위를 천명한 것이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국가 평안을 기원하는 신성한 장소였다. 대한제국은 동지(冬至)와 새해 첫날에 제천(祭天) 의식을 거행하였다.
자주독립과 근대화
황제국 위상에 맞게 의례를 정비하여 고종 어진 제작, 황제 인장인 칙명지보, 제고지보를 만들었다. 원수부를 창설하여 황제권을 강화하고, 궁내부를 중심으로 근대화 사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국제기구에 가입하고, 한국소개 책자를 발간하였다.
궁내부 현판
대한제국은 궁내부를 중심으로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궁내부 산하에는 통신사. 철도원. 서북철도국. 예식원. 박문원. 수륜원 등을 두어 1903년 정원 520여 명의 거대한 관부가 되었다.
관인
대한제국 관부에서 사용한 도장이다. 갑오개혁 때 국가 행정과 왕실 행정을 분리하여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고 1895년 의정부를 내각으로, 각 아문을 부로 개칭하여 외부. 내부. 탁지부. 군부. 법부. 학부. 농상공부의 7부를 두었다.
기념장
국가와 황실 기념일에 행사를 열고, 참가한 사람들에게 기념장을 나누어 주었다.
금책
황태자를 책봉하면서 금으로 만든 책봉문이다. 대한제국이 황제국 체제가 되면서 금책이 등장하였다. 왕세자 척을 황태자로 책봉하면서 만든 금책이다.
황제의 조칙에 사용한 도장
소자를 새긴 칙명지보이다. 칙명지보는 글자를 크게 새긴 대자와 작게 새긴 소자 두 점이 제작되었다.
대원수보
고종이 대원수로서 군령을 낼 때 사용한 국새이다.
고종 황제 옥보
옥보는 옥을 깎아 사각형으로 만들고 손잡이를 용모양으로 장식하였다.
훈장
서양을 모방한 훈장제도를 정하여 공이 있는 자에게는 훈장을 수여하였다. 훈동은 대훈 위. 훈. 공 등 세 종류로 구분하고, 훈과 공은 각기 8등급으로 나누었다. 훈장은 금척대훈장. 서성대훈장. 이화대훈장. 태극장. 팔괘장. 자응장으로 구분하였다. 1
예검
문관이 착용한 의례용 칼이다. 일반적으로 대례복에 국가 상징 문양을 넣어 자주국가임을 나타내었으며, 대한제국은 상징 문양으로 무궁화 문양을 채택하였다.
한성부 지도
궁궐과 산수를 전통적인 기법으로 표현하고, 지명에 한문과 한글을 사용하였다. 경운궁을 중심으로 영국,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공사관이 표기되어 있어 열강의 각축장이 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전환기의 조선(저자, 게일)
캐나다 선교사로 1888년 한국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했다. 그가 경험한 일을 기록하였는데, 지리, 역사, 문화, 종교, 신앙 풍습 선교에 대한 내용을 기록했다.
상투 튼 사람과 함께 15년
제중원 부인과 의사이자 명성왕후의 주치의였던 언더우드 여사의 체험을 기록한 여행서적이다. 명성 황후에 대한 기억을 상술하였다.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
군악대장 독일인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가 고종 50세 생일에 처음 연주되었다. 1902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조선비망록(저자, 샌즈)
지도자에 대한 조선 국민들의 엄격한 감시와 국민들에 대한 관대하며 일관된 정직한 통치가 지도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더라면 조선 사람들은 훌륭한 민족으로 육성되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확신한다. 샌즈는 1898년 1월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한국에 부임하였다. 궁내부와 외부 고문관으로 지냈다.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저자, 비숍)
영국인 비숍의 조선 방문기다. 1894년~1897년 사이에 네 차례 방문하였다. 조선의 부패한 관료들을 비판하면서 가난, 여성들의 삶,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소금장수
프랑스 화가 폴자쿨레가 그렸다. 1930~40년대에 한국과 중국 등을 수차례 방문하였고 이때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다색판화로 담아냈다. 커다란 짐을 지고 돌에 걸터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이다. 저물어 가는, 기울어 가는 안타까운 조선의 모습이다.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국권을 회복하려는 항쟁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 무효와 매국노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와 자결, 침략 원흉을 응징하려는 의병활동이 거국적으로 일어났다. 힘과 실력을 양성하자는 계몽운동도 일어났다.
황성신문
을사늑약 체결에 대하여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 날 목놓아 우노라)을 썼다.
민영환 자결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2천만 동포들에게 죽음을 고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파견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알리려고 했다.
의병의 항거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들고일어났다.
근대 문물의 도입
도심에 전등이 켜지고, 전자 운행, 전화설치되면서 한성은 근대 도시 모습을 갖추어 갔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사진기 축음기 자동차등 문명의 이기가 보급되었다. 교과서 신문 잡지 학보 신서적 등이 발간되어 의식을 깨우고 여론을 형성하였다.
전보
대한제국 전보사에서 취급한 전보이다. 전보용지와 봉투가 한 세트를 이루고 있다.
화폐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 체결로 대한 제국 경제를 일제에 예속시키는 일련의 정책이 추진되었다. 대한제국이 전환국을 폐쇄하고 화폐정리 사업을 시행하였다.
우표
모두 실제 사용한 우표들이다. 1895년 서울과 지방의 우체사를 설치하였고, 1900년에는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여 외국과의 우편업무를 시작하였다.
상무총보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전문 신문이다. 상업 관련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인 상무사가 발행한 1899년 5월 2일 자 상무 총보이다. 상무총보는 1899년 4월 창간되었다. 격일로 발행되었고 한글만 사용한 신문이었다. 구독 대상은 보부상이다.
대한매일신보 발행
당시 발간되던 신문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일본을 비판한 신문이다. 발행인이 영국인 베델이어서 함부로 하지 못했다.
물리학 초보
물리학에 관한 기초적인 내용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이다. 한글과 한문이 섞인 국한문혼용체로 적혀 있으며, 실험하는 장면이나 물리현상을 그림으로 그려 이해하기 쉽게 편집하였다.
산술신서
서양산법을 조선의 학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여 산학에 정통한 이상설에게 부탁하여 이 책을 간행하였다고 한다.
언문
국어를 올바르게 적는 방법을 수립하고 효율적으로 한자를 학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편찬되었다고 한다
축음기
원반을 통해 소리를 재생하고 나팔 모양의 혼이 소리를 크게 해 준다. 축음기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기계 안에 사람이 있거나, 귀신이 내는 소리라고 생각하여 가까이하지 않았다.
전화기
최초의 전화 통화는 1896년 궁내부에서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3월에 한성과 인천 사이의 공중용 시외전화가 개통되었고 6월에 한성 시내에 교환전화가 개시되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내가 원하는 나라 (백범일지, 1947)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오직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우리 자신이 행복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참고 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팸플릿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www.museum.go.kr)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 나무 위키, 위키백과, 다음 백과
-. 별별 한국사(최태성 저)
이 글로써 국립중앙박물관 1층에 위치한 "선사시대 관부터 대한제국 관"까지의 보고를 끝 마치겠습니다. 2층과 3층 유물은 차후 나중에 별도 기회가 있으면 보고 드리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