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중앙박물관(3)
가야를 더한 4국 시대의 생활이 궁금하였다. 신라(국립 경주박물관), 백제(한성 백제박물관, 국립 공주박물관, 국립 부여박물관), 가야(고령 대가야박물관, 창녕 박물관-비화가야)를 탐방했었다.
고구려의 유적지가 있는 아차산 탐방(2024. 10.12, 탐방 기록 https://brunch.co.kr/@jylee2020/197) 한 후, 고구려 유물이 더욱 궁금하였다. 고구려 유물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2024.11.16, 토, 비)하였다. 그날은 선사시대~고구려관이 리모델링 중이어서 관람하지 못했다. 드디어, 전에 관람하지 못했던 선사시대~고구려관을 볼 기회(2025.02.22 토, 맑음)를 잡았다.
잠깐, 알려드립니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의 선사시대, 고조선,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 대한제국까지 한민족 역사 전체를 브런치북에 담았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국립중앙박물관 입문서"입니다.
전회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의 선사 시대와 고조선 낙랑 부여 옥저 동예 삼한에 이어, 금회 고구려의 유물에 대하여 보고 드린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태어난 주몽(고구려 1대)이 기원전 37년에 세웠다.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초기 성읍국가로 출발하여 주변의 예·맥족은 물론 옥저·동예·부여·고조선 등 여러 종족들을 융합하여 강대한 국가로 발전했다. 최대영역은 북으로 중국 랴오닝성과 지린성 일부, 남으로는 한반도 중부까지 지배했다. 주변 나라들과 접촉이 많아 독자적이면서도 국제적 문화를 성취했다. 힘차며 활발하였으며, 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많았다. 다양한 문화는 백제, 신라, 왜, 발해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후기에 성립한 귀족연립정권의 내부분열로 국력이 약화되어,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의 공격으로 기원후 668년 멸망했다.(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400년 고도, 국내성
졸본성에서 나라를 세운 고구려는 유리왕(고구려 2대) 때 국내성(중국 시안)으로 수도를 옮겼다. 기원후 427년 장수왕(고구려 20대)의 평양 천도까지 400여 년간 18명의 왕이 다스렸다. 국내성과 환도산성을 비롯, 수천 기의 돌무지무덤과 압록강 근처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영토를 넓힌 광개토대왕을 위한 비
아들 장수왕이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중국 시안)에 414년 세웠다. 높이 약 6.39m의 돌에 1,775자를 새겼다. 비의 내용은 고구려 건국 설화와 광개토대왕(고구려 19대)의 즉위와 왕릉관리제도(수묘제)에 관한 것이었다. 1877년 그 존재가 알려졌고 탁본과 함께 연구가 시작되었다. 4~5세기 격동의 동북아시아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일제 강점기의 고구려 기록
일본 학자 도리이 류조(1870~1953)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일대를 조사하면서 기록을 남겼다. 지안일대 고구려 유적 세부 실측도 및 광개토대왕릉비와 장군총, 오회분 및 산성 일대 고분군을 그린 채색 삽화와 실측 도면을 남겼다. 식민지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조사였으나, 고구려 유적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돌을 쌓아 만든 무덤
돌무지무덤은 땅 위에 돌을 깔고 그 위에 죽은 사람을 모신 다음 다시 돌을 덮어서 무덤을 만들었다. 고구려 전반기에 많이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강돌과 막돌을 이용하여 쌓았지만, 점차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다. 마치 피라미드와 닮은 계단식 형태다.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이 대표적이다.
천추총
무덤에서 '천추만세영고'글자가 나와서 천추총이라고 이름 지었다. 주변에서 담장과 배수구 팔각주출돌이 확인되었다.
태왕릉
'원태왕릉 안여산고여악' 글자가 있는 벽돌이 나와서 태왕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광개토대왕 또는 그의 아버지 고국양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장군총
7단의 초대형(높이 13m, 가로길이 31m) 돌무지무덤으로 고구려 대형분 중에서 가장 완성된 형태다.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각 변에 돌기둥을 세 개씩 두었다. 꼭대기에는 제사를 지냈던 기와로 만든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칠성산 고분군
국내성을 마주 보고 있다. 칠성산 기슭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우산하고분군
국내성 주변에서 규모가 제일 크다. 장군총 태왕릉 사신총 오회분 무용총 각저총 수렵총등이 있다.
소수림왕(17대, 372년)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었다. 왕권 강화와 사회 통합에 큰 역할을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평양에 9개의 절을 세웠다고 한다.
427년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다. 평양 일대는 15대 미천왕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다시 찾은 고조선 옛땅이다. 16대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죽은 곳이다. 전략적으로 중요하고, 비옥한 땅이었다. 국내성 귀족세력의 힘을 견제하는 의미도 있었다. 평양성과 산성 벽화는 고려의 힘과 위엄을 보여 준다.
고구려의 철로 만든 부뚜막
길이가 68cm로 실제 사용했다. 아궁이와 굴뚝이 약간 거리를 두고 있다.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시기에 국가를 안정시키고 강한 왕권과 군사력을 갖추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5만의 군대를 지원하였다. 장수왕은 475년 백제 수도 위례성(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점령하였다. 충청도까지 세력을 뻗쳤다. 한강 임진강 충청까지 진출하였으며, 고구려 유물이 확인되었다.
호로고루와 유적
경기도 파주에서 한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흐르는 임진강은 중요한 요충지였다. 4세기말에는 임진강으로 진출하여 백제를 압박했다. 그러나 신라 백제 연합의 힘에 밀려 한강유역을 포기했다. 고구려는 임진강과 한강일대에 군의 주둔을 위하여 성과 보루를 설치하였다. 연천 호로고루 주변에는 칠충성, 은대리성, 무등리 태봉산 보루등의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상고(相鼓) 명 토기
상고(相鼓) 명문이 새겨진 토기 편이다. 북을 의미하는 고(鼓)라는 글자가 있고,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뚫려 있는 흙으로 만든 북이다. 안악 3호 분 대행렬도중 말 탄 병사가 치고 있는 것이 상고(相鼓) 다. 군사훈련이나 신호용으로 사용되었다.
안악 3호 분에서 대행렬도 중 북 치는 사람의 벽화가 출토되었다.
비늘 갑옷
연천 호로고루 근처 무덤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비늘 갑옷이다.
쌍영총에서 고구려 기마인물도가 출토되었다.
백제를 몰아내고 한강 북쪽 아차산과 용마산 일대 주요 봉우리에 보루를 축조했다. 초소와 같은 군사시설이다.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거대한 전선망을 구축했다. 아차산 훈련봉 1보루에는 지역민 다스리는 행정관청이 설치되었다. 551년 신라와 백제 연합군에 의해 뺏길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운영했다.
구의동 유적지
한강유역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보루다. 4개의 치, 온돌, 배수로, 저수조 시설이 있었다. 551년 신라 백제 연합군 공격으로 화제가 났으며, 빼앗겼다.
몽촌토성과 고구려
위례성(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475년 장수왕에 의해 함락되었고 백제 개로왕은 살해당했다. 100여 년 전 평양성전투에서 고국원왕이 목숨을 잃은 것을 되갚아준 셈이었다. 몽촌토성에서 수천 점의 백제토기와 함께 고구려 유물이 확인되었다. 상당기간 고구려가 군사기지로 활용한 증거다.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불상 중 제작연대가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1963년 경남 의령에서 발견되었다. 불꽃무늬 광배가 독특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고구려 귀걸이와 장신구
고구려 사람들도 화려한 옷을 입고 장신구로 몸을 꾸몄다. 고구려 유적들은 한반도중남부에서 대부분 군사시설만 발굴되었는데, 국내성 평양성 등에서는 섬세하고 세련된 귀걸이와 은제 장신구를 착용하였다.
호우명 그릇
신라 경주 돌무지덧널무덤에서 나왔다. 바닥에는 '광개토대왕을 기억하며 만든 열 번째 호우'라는 글자가 있다. 전체작인 모양은 동그랗고 뚜껑에는 꼭지가 달려 있다. 5~6세기 한 때 신라를 지원하고 보호해 줬던 고구려의 위상을 잘 보여 준다.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 돌무지무덤대신 돌방무덤을 주로 사용했다. 돌로 방을 만들고 그위를 흙으로 덮은 형태다. 신라와 백제에서도 사용한 형태다. 고구려는 무덤방안에 벽화를 그렸다. 일상을 담은 생활풍속도, 연꽃무늬, 구름무늬, 동서남북의 수호신인 사신도 등의 벽화를 그렸다.
평남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 강서대묘는 1개씩의 무덤방과 무덤길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벽화의 주제는 사신이다. 북벽 현무는 높은 회화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6세기말 축조되었다. 모사도는 1930년 일인 오바 츠네키치가 제작했다.
천장(중앙)
천정에는 황룡과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무덤의 주인이 왕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처음 조사했을 때 세 조각으로 깨져 있었다.
동쪽(좌)
청룡은 동쪽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용은 물을 다스리고 생명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한다. 무덤방 입구를 향해 왼발을 뻗고 있는 모습으로, 벽화의 표현이 힘차고 자연스럽다. 몸의 여러 부분에 세밀하고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서쪽(우측)
백호는 서쪽을 지키며 청룡과 짝을 이루어 나쁜 기운을 쫓아낸다. 몸통은 커다란데, 4개의 다리는 가늘다. 청룡보다는 표현이 단순하다.
남쪽
암컷과 수컷 한 쌍이 그려져 있다. 활짝 핀 날개와 세갈에 꽁지깃이 주작의 힘을 보여 준다. 주작 주변에는 넝쿨무늬가 있고, 다리 발톱 아래에는 산이 그려져 있다.
북쪽
현무. 남쪽 주작과 함께 음양을 조화롭게 다스린다. 뱀이 거북을 감고 있는 모습이 힘차 보인다. 뱀과 거북의 입에서 불꽃같은 기운이 나온다.
충주는 고구려 국원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경상도를 잇는 조령과 죽령을 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으로 삼국시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중원경의 본래 고구려 땅이었는데, 신라가 이를 평정했다.
<참고 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팸플릿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www.museum.go.kr)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 별별 한국사(최태성 저)
글이 길어져 백제, 신라는 다음 편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