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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Jul 22. 2022

남한산성     등산(1)

南漢山城 (1)     /     병자호란

  

    남한산성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다. 역사학습의 장이다. 택리지(擇里志)에서 “남한산성은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여서 청이 처음 왔을 때 병기(兵器)라고는 날도 대지 못하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성을 끝내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인조(仁祖)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다만 양식이 적고 강화가 함락된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오늘(2022.07.17 일요일) 아침 7에 일어났다.  일기예보에 오후 2시경부터 비가 올 것이라고 했다. 기온은 24도~30도. 가끔 등산도 하고 가까운 10km 거리에 있다. 비 오기 전에 남한산성을 둘러보기로 했다. 어제 읽은 ‘병자호란 (한명기 저)’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역사의 현장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나의 윗대 삶의 터전을 바꾸었다는 전설이 있다. ‘병자호란’ 인조가 고립된 남한산성에서 학수고대하던 ‘근왕병(勤王兵)‘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연을 정리하여 보면 이렇다. 명절에 큰집에서 제사 지낼 때 집안 어른이 어린아이들을 불러 앉혀 놓고는 친족의 이동 경로를 가끔 말씀하셨다. 세조 찬탈에 반대하여 순천으로 귀양을 갔다.(인터넷 수소문 결과, 그분(임영대군)은 단종이 폐위된 후 한양을 그리워하다 경기도 의왕시 모란산 자락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분 후대에 관직 생활하다가 정치적 이유(패배)로 순천으로 귀양을 갔다고 추정)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근왕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을 향하여 북쪽으로 이동하다가 비슬산과 낙동강 사이에서 항복 소식을 접하고, 상경을 포기하고 그곳에 눌러앉았다.      


   척박한 야산을 개간하여 정착하였다. 물이 귀하여 많은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고 한다. 농사지을 물과 식수가 부족하여 애를 바다같이 태웠다고 지명이 ’ 애바다‘로 불린다. 족보를 펼쳐보면 옆집 앞집 동네 사람들 이름이 줄줄이 나온다. 아버지代에 버스를 대절하여 마을 어른들이 순천에 다녀왔다고 한다. 지금도 순천에 일부 혈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9시경에 남한산성역에서 내렸다. 역내 매점에서 김밥 2개, 물 녹차 각 1병을 샀다. 은행시장 근처 상가의 찐빵 찌는 대형 솥에서 증기가 새어 나오고, 김밥가게, 도로변에 싱싱한 야채가 눈에 띈다. 등산객으로 보이는 두 사람 발걸음이 나보다 더 빠르다. 결국 보행자 신호등에 걸려 두 사람을 놓쳤다. 산성 올라가는 입구에 남한산성공원이 있다. 남문(지화문)에 오르기 전에 사찰이 몇 개 있다.      

약사사 입구

   약사사, 남한산성 탑공원, 영도사, 통일기원탑, 백련사가 있다. 산책로는 산성 오르는 길인 만큼 경사도 20~30도 정도로 올라갈수록 가파르다. 산성으로서 가치가 입증된다. 가파른 길을 뒷걸음치며 체력 단련하는 등산객이 자주 눈에 띈다. 간간히 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며칠 전 비가 내려 개울물 흘러가는 소리가 힘차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한양에서 피란 시 1636년 12월 14일 처음 들어왔던 남문(지화문)이 눈에 보였다. 47일간의 항쟁 후,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서문(우익문)을 통해 삼전도로 내려갔다. 서문에서 롯데타워가 가깝게 보인다. 그 좌측에 삼전도(三田渡) 비가 있다. 오늘은 그날의 굴욕을 곱씹어 본다.      


   남한산성은 본성과 외성으로 나누어진다. 외성은 병자호란 이후 쌓았다고 한다.  내성 전체 한 바퀴 거리는 약 7.7km 3시간 20분 거리(제5 코스, 내성 기준)다. 내성 탐방코스는 총 5개가 있다. 오늘은 제1코스(3.8km, 1시간 20분 거리, 장수의 길, 실재 식사 구경 포함 약 4시간 소요)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탐방코스는 다음과 같다. 남문(지화문)->군포지->제6 암문-> 청량당/수어장대-> 서문(우익 문)->연주봉 옹성-> 북문(전승문)->산성로터리-> 종각-> 남한산성 행궁-> 만해기념관->(이하 복귀 코스) 청량당/수어장대-> 남문(지화문)          

1. 호란 배경

남쪽에서 시작된 임진왜란(1592~1598년)이 끝 난지 약 30년 후에, 이번에는 북쪽에서 또 다른 강력한 침입자가 나타났다.


1) 정묘호란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1623년) 후 집권한 서인 정권은 친명배금 정책을 내세웠다. 후금의 누르하치 뒤를 이은 태종은 1627년(인조 5년) 1월 중순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1월 25일 황주에 이르자 인조를 비롯한 신하들은 강화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했다. 각지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후금군은 후방을 계속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과, 명을 정벌할 군사를 조선에 오랫동안 묶어둘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강화 의사를 표시했다. 1627년 3월 3일 화의가 성립되었다. 형제의 국을 규정하고 후금군은 철수했다. 명과의 외교관계는 그대로 유지했다. (참조 : 다음 사전)     

남문 누각

2) 병자호란(丙子胡亂)

   내몽골을 정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근처까지 나아가 명나라를 위협했다. 후금은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군신의 의’를 요구했다. 조선은 이를 거부했다. 1636년(병자년, 인조 14년) 12월 2일 청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정묘호란 결과의 화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명분이었다. 명(1368~1644년)을 총 공격하기 전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우며 버텼으나 식량마저 끊어졌다.      


   임금의 격서에 강원과 삼남(三南)과 서북의 도처에서 근왕병(勤王兵)들이 일어나 남한산성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은 속오군 형태의 조선군은 실전 경험과 상승세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어떤 근왕병 군대도 청의 포위망을 뚫고 임금이 있는 산성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한반도 전체 상황을 인지하고 있던 청과의 정보전에서도 밀렸다. 청은 명의 해상 지원을 사전에 미리 차단하였다. 강력한 다국적(청, 몽골, 한군) 전문화된 싸움꾼의 속전속결 전략에 속수무책이었다. 더구나 종묘사직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대군들이 가 있던 강화도가 먼저 함락되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항복 의식을 치렀다. 1639년(인조 17)에는 청의 요구로 삼전도에 청 태종 공덕비를 세움으로써 치욕의 역사를 기록했다. 항복 후 수많은 전쟁 포로가 발생,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만약 인조가 오늘날 환생한다면, 그리고 똑같은 민족의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이 온다면, 그의 전략은 어떠할까?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과연 어떤 전략과 선택을 하여 위기를 돌파할까? 더불어, 우리는 최후의 순간 외부 적으로부터 어떻게 방어를 할 수 있을 것인가? 궁금해진다. 다시는 지지 말자.


   급박한 전황은 이렇다. 1636년 12월 1일 청 태종이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다음 날 2일 조선 침입에 나섰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진격했다. 마부태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 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수비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피해 밤낮을 달려 심양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한양(서울)에 육박했다.     

총 포구, 관측 구

   이렇게 빨리 진격해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3일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 다음 14일 개성을 지나갔다.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 씨(姜氏), 원손(元孫), 둘째 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을 강화도로 피난시켰다.      


   인조도 그날 밤 숭례문으로 서울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청국 군이 벌써 영서역(迎曙驛: 지금 서울 은평구 대조동과 불광동 사이)을 통과했으며, 마부태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해, 한 부대를 보내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겼다.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이 홍제원 청군 진영에 나가 술과 고기를 먹이며 출병의 이유를 물으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사이에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 영의정 김류(金瑬) 등은 본 산성이 지리적으로 불리함을 들어 야음을 타서 강화도로 옮겨갈 것을 역설하였다. 다음날 15일 새벽에 인조는 산성을 떠나 강화도로 떠나려 했다. 그러나 마침 눈이 내린 뒤라 산 언덕에 얼음이 얼어서 왕이 탄 말이 미끄러져 왕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갔다. 여러 번 미끄러져 강화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산성으로 돌아왔다.      

남한산성도

2. 남한산성

1) 남한산성 개황

   내외 성포함 둘레가 약 11km, 면적은 약 2.12km 2이다. 청량산(주봉, 해발 497.9m), 북쪽에 연주봉(467.6m), 동쪽에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에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하여 적의 접근은 어렵다.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며 분지형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었다.      


   성벽과 성 안에는 동·서·남·북문과 장대(將臺)·암문·군 포지(초소)·매탄처·매염처·창고·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1963년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2014년 카타르 도하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백제 온조왕 때 도성이었다는 견해도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73년(문무왕 1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혹은 日長城)을 쌓았는데, 성의 둘레는 4,360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하여 항전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후금(後金)의 위협을 받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뒤 2년간(1624~1624)의 공사로 인조 4년에 완성하였다. 산성 내에는 200여 개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며 역사와 설화가 있다. 축성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도 동원하였는데,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현재 남아 있는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곳의 사찰을 새로 건립하였다.

(참조 : 경기도 남한산성 세계 유산 센터,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2) 주요 건물

남문(지화문)

성문 (城門) :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다. 동문(좌익문), 서문(우익 문), 남문(지화문), 북문(전승문)이다.  남문은 가장 크고 웅장하다. 현판에 지화문이라고 새겨져 있다. 인조가 처음 들어온 문이다.

서문 누각

   서문은 인조가 삼전도에 내려갈 때 사용했다. 잠실 석촌호수 서호 입구에 삼전도비가 있다.


   아래 ***~***부분은 20240928 백제 탐방목적으로 한성박물관, 몽촌토성, 풍납토성을 돌아보고 석촌호수 서호에 있는 삼전도비를 보고 남긴 글이다.


***   

삼전도비(1)

인조 삼전도비

   남한산성을 몇 차례 오르고, 글을 브런치에 올렸었지만, 삼전도비는 처음으로 봤다. 롯데호텔 월드에서 송파대로 따라 3분 정도 걸어가면 석촌 호수 서호 바로 입구에 있다. 인조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수성에 실패하고, 서문(우익문)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상세 방법은 글 끝 참조)로 항복하였다. 청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비석을 세워 남길 것을 강요했다. 이것이 삼전도 비다. 높이 395㎝, 너비 140㎝, 이수와 귀부를 갖춘 비이다. 공식 비명은 ‘대청황제공덕비‘다.      

삼전도비(2) / 크기가 작다고 거부되어 버려진 받침돌

   청은 비문 초안을 조선이 직접 작성하도록 했다. 이실직고 자기반성하라는 의미다. 대신들은 모두 비문 초안 작성하기를 극구 회피했다. 지목된 대신중에, 심지어 팔이 마비되었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비의 표면 왼쪽에는 몽골문으로, 오른쪽에는 만주문으로,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새겼다. 비석을 세운 후 청의 사신들은 올 때마다 비석 존재 혹은 훼손여부를 확인하고 탁본을 떠서 기념품으로 가져가서 청 태종에게 보고했다. 우리 민족의 치욕적인 역사기록이다. 비각안에 또 다른 비어있는 받침돌이 하나 있는데, 크기가 작다고 청이 거부하여 버려진 것이다.      

삼전도비(3)

   조선에서도 청일전쟁 후 청의 힘이 약해지자, 땅속에 묻어 잊어버리거나 두 동강내어 폐기처리하기를 원했다. 몇 번이나 땅 속에 묻혔던 비석이 한강 장마에 우연히 드러났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보존 존치여부에 대하여 시민사회 학계 등을 망라하여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이 자리에 다시 세워 보존하게 된 것이다. 그 논리적 근거는 “치욕의 역사를 잊지 말자 “이다.


   일제 강점기 우리의 독립 운동가들을 고문하고 학살했던 동대문 형무소를 현재 보존 개방하였다. 더 나아가 사행 집행 현장, 형집행 밧줄, 발판 그리고 시신 운반 길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 학살 아우슈비츠 수용소 보존이유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삼전도비를 보고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의기소침하지 말자. 힘을 기르고 다시는 지지 않으면 된다. 살아있는 생생한 교육 현장이다.

***


   북문은 이시백이 조선군 300명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청나라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모두 전멸한 일을 기려, 패하지 말고 모두 이기자 해서 북문의 이름이 전승문이 되었다고 한다.  대대적인 보수 공사 진행 중으로 진출입은 물론  외부에서 볼 수가 없었다. 동문은 경기도 광주시로 통하는 도로변의 문이며, 남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문이다.     


서문(인조가 삼전도로 내려감)

성곽(城廓) : 내성

내성

외성이 있다.     

연주봉 옹성

옹성(甕城) :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는 이중의 성벽이다.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      

암문(제6)

암문(暗門): 장정의 키 높이 정도로, 두 사람이 겨우 출입할 수 있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는 전투 시에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암문을 설치하였다. 남한산성에는 총 16개의 암문이 있는데 본성 11개, 봉암성 4개,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수어장대

수어장대(守禦將臺) :서장대로 불리는 수어장대는 총지휘소인 장대로, 성내에 동, 서, 남, 북 4개의 장대와 봉암성과 함께 축조된 외동장대 등 모두 5개의 장대가 있었는데 이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대다. 장수의 지휘와 관측 목적으로 1624년(인조 2년)에 지었다.     

무망루

무망루(無忘樓) : 1757년(영조 27년) 광주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2층의 수어장대 내편에 걸린 현판이다. 병자호란과 효종의 8년 볼모 생활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청량당

청량당(淸凉堂) /매바위 : 청량당은 수어장대 좌측에 있다.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부인 그리고 성벽을 쌓았던 벽암 대사(1575~1660)를 함께 모시고 있다. 이회장군은 공사비 횡령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부인 송 씨도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매바위(상단 부분에 매형상이 보임)

   이회장군은 조선조 인조 2~4년(1624~1626) 사이에 지세가 험악한 산성 동남쪽의 축조 공사를 맡았는데 , 워낙 지형이 험해서 제 날짜에 공사를 마감하지 못하였다.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져서 공금을 탕진해 공기를 맞추지 못하였다고 모함당하였다.


   장군은 '내가 죄가 없으면 죽는 순간에 매 한 마리가 날아오리라'고 했다. 그런데 참형을 당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서장대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아 죽임을 당하는 장군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 바위를 매 바위라고 불렀다. 매바위 상부에 매 형상이 남아있다.

군포지

군포지(軍舖址) : 성을 지키는 초소로서 125개 군포지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다.     

매탄처 (埋炭處) : 숯을 묻어 놓은 곳이다. 전쟁 때 사용하기 위해서 묻었다.     

매염처(埋鹽處) : 군포와 군포 사이에는 90여 군데의 소금을 묻어 둔 매염처가 있었다.     


3) 기타

승군 : 성을 쌓고 관리 보수하여 남한산성을 지켜낸 승려들이 있었다. 산성 내 각 8도의 승군을 대표한 8개의 사찰과 전체를 통괄하는 본영 사찰을 합해서 9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개원사 망월사 장경사 등 세 사찰이 복원되었다.      


현절사 (顯節祠) :  청에 항복하기를 거부하다 중국 선양瀋陽으로 끌려가 처형당한 홍익한洪翼漢(1586~1637), 윤집尹集(1606~1637), 오달제吳達濟(1609~1637) 삼학사三學士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후에 김상헌金尙憲(1570 ~1652), 정온鄭蘊(1569~1641)의 위패도 함께 모셔졌으며, 1693년(숙종 19)에 ‘현절사顯節祠’로 사액되었다     

남한산성 행궁

3. 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行宮

   2007년 사적 제480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행궁지는 약 1만 평 규모이다. 1624년(인조 2) 9월 서장대(西將臺) 아래쪽에 건립되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다른 행궁과 달리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左殿)과 우실(右室)을 갖추었다. 행궁의 규모는 상궐(上闕) 73칸, 하궐(下闕) 154칸으로 모두 227칸의 규모이다.


   상궐은 행궁의 내행전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평면적 180.4㎡(55평)이다. 그중 왕의 침전인 상방이 좌우 각각 2칸씩이고, 중앙의 대청이 6칸, 4면의 퇴칸이 18칸으로 모두 28칸이다.     

한남루(남한산성 행궁 출입문)

   온돌은 상궐 건물지 내 남·북퇴 간 옆 협간에서 각 2개 소씩 모두 4개 소가 발견되었다. 이 온돌시설들은 건물 기단토를 구축한 후 되파기하여 축조하였다. 상궐의 담장지는 건물을 중심으로 내곽과 외곽의 2중으로 구축되었으며, 담장 폭은 1m 내외이다.     

하궐

   하궐은 상궐의 외전인 외행전으로서 상궐 동편 삼문 밖에 있으며, 해발 369m로서 상궐지에 비해 약 6m 낮은 위치에 있다. 하궐은 상궐과 함께 1624년(인조 2) 총융사 이서(李曙)가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시작하여 이듬해에 준공되었다. 서쪽 담의 문으로 일장각(日長閣)과 통하였고, 동쪽의 정문이 한남루이다.     

재덕당

   하궐지의 규모는 동서 30m, 남북 70m, 전체 면적 2,100㎡(635평)으로서 발굴조사 결과 하궐지는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음이 밝혀졌다. 상궐과 하궐을 포함하여 행궁을 구성했던 부속시설로 좌전(左殿), 우실(右室), 재덕당(在德堂), 한남루(漢南樓), 인화관(人和館) 등이 있었다.

행궁 전경

   행궁 및 부속시설은 인조 이후 건립된 것으로 19세기 초까지 계속 증축, 보수되었다. (참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만해 기념관(萬海 記念館)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의 뜻을 기리는 전당이다. 만해기념관 표지석옆의 글을 옮겨 보았다.       


   나라 사랑의 독립정신, 님. 침묵. 사랑의 증도가를 읊은 문학사상과 그의 철학사상을 후세에 전하여 민족자존의 정신을 겨레의 가슴에 심고자 설립하였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일제강점기를 살며 선봉에 서서 3.1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최고형을 선고받았고, 옥중투쟁 3대 원칙(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을 스스로 지킨 강직한 인물이시다. 출옥 후에도 신간회운동, 만당사건, 학병. 징병을 반대하며 끝까지 민족적 지조와 자존을 지키셨다.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반대하며 군국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였으며, 조국 광복을 한 해 앞두고 영양실조로 쓰러져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영면에 드셨다. 조국광복 후, 위당 정인보 선생은 만해 한용운 선생을 풍란화 매운 향내 당신에 견줄쏜가. 이 날에 님계시면 별도 아니 빛날까. 불토가 이외 없으니 혼아 돌아오소서.”라고 선생의  높은 뜻을 기렸다.     


196231일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공로 최고 훈장인 대한민국장(훈기번호 제25호)을 선생께 추서 하였다.     

만해기념관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일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상설종합 전시실과 기획전시실, 교육관, 체험학습실, 그리고 야외 조각공원으로 꾸며져 있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중국 청나라 시대에 황제를 대면할 때 취하는 인사법이다.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방식은 “궤”(跪)의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하고,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선다. 이와 같은 행동을 3회 반복한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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