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淸溪山)은 고려 충신 조견과 조선 성리학자 정여창 등 선비들의 한 맺힌 산이다. 이름 그대로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깨끗한 산이다.
오늘(2020.11.14. 토요일)은 청계산(淸溪山)을 올랐다. 아침 09:30분경에 청계산 입구역에서 오랜 선배를 만나 출발했다.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청계산 등산은 처음이었다.
등산에 취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십여 년 전이다. 언젠가 이야기했지만, 군생활을 강원도 1,500m GOP 고지에서 했다. 눈만 뜨면 매일이 등산이었다. 산이라면 정말 지긋지긋했다. 세월은 흘러 족저근막염 오십견이 오고, 체력이 달려 운동의 필요성을 스스로 자각하게 되었다. 일본 체류 때 이야기다. 결정적인 계기는 등산 마니아 한 친구가 주말에 도쿄 근처에 멋진 등산 코스(기억을 더듬어 보았더니 출발점에서 한참을 등산해서 타카오산으로 넘어왔다)가 있다고 지도를 펼쳐 놓고 몇 번이고 유혹했다. 넘어갔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산을 몇 개나 넘는 험난한 코스에서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코스였다. 그동안 건강관리를 등한시한 내 탓이 컸다. 덕분에 그날이 인생 후반기 공식적인 등산 입문 첫날이 되었다.
마침 오랜 선배가 해외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하였다. 둘이 만나자마자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쏟아 냈다. 이야기에 열중하다 보니 등산로를 엉뚱한 방향으로 진입하여 되돌아 나오기도 하였다. 남자들도 때로는 수다를 떤다. 오래간만에 다시 만났고 공통의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특히 주말에 요코하마 야마테 성당 미사, 도보여행, 등산 등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혈맹관계였다.
청계산(淸溪山)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아 '청계(淸溪)'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서울 서초구와 경기도 과천시, 성남시, 의왕시의 경계에 걸쳐 있는 산이다. 정상에 서면 북서쪽 계곡 아래 과천시와 동물원, 식물원이 있는 서울대공원, 각종 놀이기구가 있는 서울랜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경마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주봉인 망경대(望景臺) 주위에 청계봉·이수봉(二壽峯)이 모여 있다. 숲이 울창하고 계곡은 깊고 아늑하여 찾는 등산객이 많다. 더구나 산속 흙길이 많아 도시생활에 찌든 마음을 정화시켜 줄 수 있다.
특히 이수봉은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된 정여창 선생이 이곳에 숨어 위기를 두 번이나 모면하였다고 지어진 이름으로 봉은 높지 않지만 남북으로 흐르는 능선을 중심으로 산세가 수려하게 펼쳐져 있다.
서쪽에 위치한 관악산(冠岳山, 629m)과 더불어 서울의 남쪽 지역의 쌍벽을 이루는 산이다. 망경대는 고려가 망하자 충신이었던 조윤(趙胤, 후일 이름을 조견 趙狷으로 개명) 선생이 이름까지 바꾸어 세상과 절연했던 곳이다.
청계산 골짜기에는 신라시대 창건한 청계사가 있다. 고려가 망하자 고려의 충신들이 청계사를 중심으로 은거하며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지명과 인물 중심으로 살펴본다.
혈읍재 금정수 설명판
1) 혈읍재 (血泣)
연산군 시절 사림파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년)의 이야기다. 스승 김종직이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당했다는 소식에 청계산으로 피신하고 금정수(金井水, 만경대 아래 석기봉 옆)로 가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넘었다는 고개이다.
정여창 선생(출처 나무 위키)
김굉필 선생과 함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제자가 되어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연산군의 스승이 되었다.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 검열·세자시강원 설서·안음 현감 등을 역임했다.
돌문 바위
1498년(연산군 4) 스승 김종직 선생의 조의제문과 관련된 무오사화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1504년(연산군 10) 생을 마감했다. 유배지에서 돌아가시자 문인들과 유림 동료 친지들은 함경도 종성에 가 두 달에 걸쳐 그의 시신을 고향 경남 함양군까지 옮겨와 장사 지냈다.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그의 생가는 중요 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되었다.
남계서원 (출처 함양군청)
그 뒤 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되었다. 1517년(중종 12)에 복권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1610년(광해 2년) 정몽주,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와 더불어 동방 5현으로 문묘에 종사하였다.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등에 배향되었다.
이노정(제일강산정, 대구 달성)
벗 김굉필 선생과 함께 친분을 나눈 대구 달성에 소재해 있는 이노정(二老亭)이 유명하다. 조선 성종 때 대유학자인 김굉필과 정여창이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제일강산정(第一江山亭)이라고도 한다. 이노정(二老亭)이라는 이름은 후학들이 선비 김굉필, 정여창을 두 늙은이라 애칭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함양의 일두 정여창은 달성의 한훤당 김굉필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노정으로 왔다. 이노정 바로 옆에 낙동강이 흐른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 사회, 즉 인정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개혁을 꿈꿨으나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에 의하여 미완의 개혁 끝에 죽음을 당하였다.
2) 이수봉 (二壽峰)
청계산 제6구간 길
정여창 선생은 스승 점필제 김종직과 벗 김굉필이 연루된 무오사화(戊午士禍) 당시 변고를 예견하고 청계산에 은거하며 생명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다고 하여 후학인 ‘정구’가 명명한 산 봉우리 이름이다.
3) 망경대(望京臺, 원래 이름은 萬景臺)
망경대는 고려가 망하자 충신이었던 조윤(趙胤, 후일 이름을 조견 趙狷으로 바꿈)이 청계산 정상에서 북쪽 고려의 수도인 송도를 바라보며 세월의 허망함을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松山 조견(1351~1425)은 고려말 조선초 문신으로 조선 개국 공신 조준의 아우다. 고려가 망하자 두류산(지리산)에 들어갔다. 태조 이성계가 관직을 주려 했으나 거절하고 청계산에 은거, 상봉인 망경대에 올라 송도(개성)를 바라보고 슬퍼하며 마왕굴에 머물렀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천도 후 조준을 대동하고 청계사로 찾아가 함께 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대신 청계산 일대를 봉지로 내렸으나 거절하고 당시 수락산 기슭(현 의정부 송산마을)에 은거하다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고려 충신 송산 조견 선생 묘소 앞(성남시 향토유적 제3호)
조견 선생의 묘소는 경기 성남시(향토유적 제3호)에 있다.
송산 조견 선생 묘소
고려말 조선초의 묘 형태(묘표, 문인석, 석등 등)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송산 조견 선생 유사
안내판에 상기에서 언급한 그의 행적이 자세히 적혀 있다.
4) 청계사
고려의 충신 조견 선생이 머무셨던 곳이라고 한다. 청계산 남서쪽 중턱에 위치하는 청계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고려 1284년(충렬왕 10) 조인규선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쇠붙이 공출로 수탈될 뻔했으나 봉은사에 감추어 두었다가 다시 찾았다는 동종이 있다.
5) 옥녀봉
추사 김정희는 청계산 옥녀봉 북쪽 자락에 초당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대쪽 같은 선비들의 기개를 품고 있는 청계산을 닮은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저 산 저 물
(김용택 시인)
산도 한 30년쯤 바라보아야 산이다 물도 한 30년쯤 바라보아야 물이다 내가 누우면 산도 따라 나처럼 눕고 내가 걸어가면 물도 나처럼 흐른다 내가 잠이 들면 산도 자고 내가 깨어나면 물도 깨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