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道峰山)을 오르면 큰 봉우리와 푸른 소나무 그리고 김수영 시인의 풀을 만날 수 있다.
서울 본토박이 오랜 선배의 안내로 오늘(2020.12.12.)은 도봉산을 난생처음으로 올랐다. 산행 중에 선배는 옛날 오래전에 돌아가신 선친과 함께 자주 올랐던 도봉산 추억을 이야기해 주었다. 선배의 성장기에는 등산 동무로, 그리고 은퇴 후에는 손주들 뒷바라지로 성실한 삶을 사셨다.
도봉산역에서 09:00경 만났다. 혼잡한 역 구내에는 가족 친구 동호회 회원들이 다른 일행을 기다리며 북새통을 이루었다. 도봉산의 인기를 실감했다. 년간 1,000만 명이 찾는다. 등산코스는 (도봉산역 1번 출구-> 굴다리->)김수영 시인 시비/도봉서원-> 도봉탐방지원센터-> 천축사-> 마당바위->(선인봉, 만장봉, 자운봉 : 등산로 주변 봉우리들)->신선대였다.
하산길에는 올라가면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풀의 시인 김수영 시비를 만났다. 고인의 유골이 시비 밑에 묻혀 있다. 시비가 곧 무덤이다. 그야말로 우연히 길가다가 발견한 보석이었다. 아직도 그 여운이 남아있다.
‘풀‘은 오랜 역사 동안 권력자에게 억압받으면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맞서 싸워 온 민중, 民草를 뜻한다. ’ 바람‘은 민중을 억압하는 사회적 힘, 독재 권력과 외세를 의미한다.(출처 : 다음 백과사전)
김수영 시비와 무덤
풀
(김수영 시인)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도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도봉산 안내도
1. 도봉산
북한산 국립공원은 도봉산과 북한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봉산 면적은 24km 2로 북한산의 55km 2에 비해 등산길이 더 조밀하다. 도봉산을 “푸른 하늘을 깎아 세운 만 길 봉우리”라고 한다. 길(道)이 바위 봉우리(峰)로 이루어졌다는 의미라고 한다. 지질학적으로는 고생대부터 화강암의 지반이 융기 및 침식되어 형성되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2억만 년 전 한반도의 지각변동 사상 가장 격렬했던 중생대 쥐라기 중엽의 대보 조산 운동(大寶造山運動)에 의해 형성된 대보 화강암의 돔(dome) 형태의 암벽과 암릉이다.(참조 : 도봉구청 문화관광)
서울 도봉구와 경기 양주시, 의정부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는 740.2m(자운봉)이다.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절리(節理)와 풍화작용으로 벗겨진 봉우리들이 연이어 솟아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다.
주봉인 자운봉(紫雲峰)에서 남쪽으로 만장봉(萬丈峰)·선인봉(仙人峰)이 있고, 서쪽으로 오봉(五峰)이 있으며, 우이령(牛耳嶺)을 경계로 북한산과 접하고 있다. 도봉동 계곡·송추계곡(松楸溪谷)·망월사 계곡(望月寺溪谷)을 비롯하여 천축사(天竺寺)·원통사(圓通寺)·망월사(望月寺)·관음암(觀音庵)·쌍룡사(雙龍寺)·회룡사(回龍寺) 등 많은 사찰이 있다. 그밖에 조선 선조(宣祖)가 조광조(趙光祖)를 위하여 세웠다는 도봉서원(道峯書院)이 있다.(참조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 도봉산역
09:00경 친구를 만났다. 동호회 회원, 단체 등산객들의 약속 장소인 대기실 로비가 북새통을 이루었다. 잠시 후 다들 서로 짝을 만나 떠나고 나니 로비가 휑하니 빈다. 1번 출구로 나와 굴다리에서 등산 백을 짊어진 앞사람을 따라만 가면 된다. 겨울철인데도 등산객이 많았다.
2) 진입로
도봉산 진입하기 전에 음식점과 등산복 매장이 즐비하다. 내려올 때 막걸리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김밥, 막걸리, 파전 등의 식당 매점이 즐비하다. 하산길에 멋진 카페에서 친구와 옛 추억을 나누었다. 각종 유명 등산용품 매장이 있다. 빈손으로 가도 용품을 사서 바로 등산할 수 있다.
3) 김수영(金洙暎) 시비 / 도봉서원(道峯書院)
김수영 시비가 등산로 옆에 있다. 구체적 내용은 아래 참고하시기 바란다. 바로 뒤편에 도봉서원 터가 있다.
도봉서원은 서울에 소재한 현존하는 유일한 서원으로 옛 영국사 터에 위치해 있다. 1573년(선조 6) 조광조(趙光祖)의 학문적 사상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패를 모신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유적의 대부분이 멸실되었으나 서울시는 각석 군(刻石群)이 서원 터 앞 계곡에 대부분 원형대로 남아 있어 일대를 보존 논의가 있다. (참조 : 위키 백과)
4) 도봉탐방지원센터
북한산 국립공원이라고 새겨진 안내판 앞에서 두 갈래 갈림길이 나온다. 친구가 워낙 오랜 전에 이곳을 등산한지라 방향이 헷갈린다고 했다. 우측 길을 택했다. 그 선택이 옳았다. 계곡 바위 돌밭길을 한참 걸어 올라갔다.
때마침 지원센터 문이 열렸다. 훤칠한 키와 건강미 넘치는 미녀 구조대원이 휴대폰을 들고 나타났다. 긴급한 상황 파악 중인 듯 얼굴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얼마나 재빠른지. 잠깐 발밑의 돌을 피하고 다음 걸음을 옮겨 놓고 머리를 들어보니 어느새 바위틈새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바위 투성이 산이라 조심해야 할 것 같다. 2020년 한 해에만 6명이 죽는 사망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등산사고가 많아서인지 헬리콥터가 자주 날아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퇴전 불굴의 의지의 한국인‘에게 가장 적합한 운동이 등산 등반이 아닐까?
5) 천축사(天竺寺)
북한산 및 도봉산 지역의 60여 개 사찰 중 제일 오래된 건축물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673년(문무왕 13)에 의상(義湘)이 만장봉 동북쪽 기슭에 있는 의상대(義湘臺)에서 수도할 때 현재의 위치에 절을 창건하고 옥천암(玉泉庵)이라고 하였다.
그 뒤 고려 명종 때는 영국사(寧國寺)를 창건한 뒤 이 절을 부속 암자로 삼았으며, 1398년(태조 7) 함흥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태조가 옛날 이곳에서 백일기도하던 것을 상기하여 절을 중창하고 천축사라는 사액(寺額)을 내렸다. 절 이름을 천축사라고 한 것은 고려 때 인도 승 지공(指空)이 나옹화상(懶翁和尙)에게 이곳의 경관이 천축국의 영축산과 비슷하다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참고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6) 마당바위 (448m)
마당바위는 큰 바위로 한 개의 덩어리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고양이가 점심식사를 함께하자고 다가왔다. 터줏대감에게 잘 보여야 한다. 마당바위에서 신선대를 가는 길은 경사가 심한 편이라 이때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특히 미끄러지지 않게 발바닥을 조심해야 한다. 겨울철에는 눈이 온 후 등산로 바위는 빙판이 된다. 여름에는 비 온 후 혹은 우중에 미끄러져 낙상사고가 잦다. 통으로 된 화강암 바위산이다.
선인봉 등반루트
7) 선인봉(仙人峰)
암벽 등반코스로는 박쥐 코스 등 37개 코스가 개척되어 있다. 암벽등반인이 보이지 않았지만 쳐다만 봐도 오금이 저린다. 고소공포증이 있는지라, 저런 산을 등반하는 강심장의 등반인들이 존경스럽다.
만장봉 자운봉
8) 만장봉(萬丈峰) 자운봉(紫雲峰)
만장봉의 실제 높이는 718m이나 옛날 어르신들이 보기에는 만장이나 되어 보인다 하여 만장봉(萬丈峰)이라 이름 지었다. 야설로는 만장봉 꼭대기에 자일이나 로프도 없이 태조 이성계가 올랐다는 전설이 있다.
주변이 온통 기암절벽 갖가지 화강암 봉우리라 어느 봉우리가 만장봉인지 자운봉인이 구분이 어렵다. 목표가 신선대라 경사가 심한 곳을 계속 오를 수밖에 없다. 피할 길이 없다. 기를 쓰고, 용을 쓰고 올랐다. 이렇게 위험한 등산은 처음이다. 발밑이 천 길 낭떠러지라 발을 잘못 디디거나 삐끗하면 일간 신문에 내 이름이 날 수 있다. 오를수록 개미 줄 같은 긴 대기줄이 저절로 형성되었다. 그런데 더 어려운 건 그 길을 내려오는 하산길이었다.
신선대 정상
10) 신선대(神仙臺, 726m)
계단, 돌계단, 고무 계단으로 이동하고, 쇠줄(체인), 철제 가드레일에 몸을 의지하여 오르고 또 올랐다. 정상까지 절벽이 곳곳에 있어 위험하다. 어떤 지점은 등산 스틱을 등산 백에 집어넣고 두 손으로 쇠줄을 잡고 바위 틈새를 오르내려야 한다.
소나무와 화강암이 조화를 잘 이룬다. 애국가의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위 틈새에 뿌리를 박고 소나무가 굳건하게 자생하고 있다. 가장 한민족다운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철제 난관을 움켜잡고 올라가야 된다. 내려올 때도 쇠줄 혹은 난간을 잡고 뒷걸음치며 내려와야 된다. 신선대 정상은 좁은데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마침내 정상 표지목(726m)을 부여잡고 의미가 있는 인생 증명샷을 찍었다. 아주 어려운 등산이었다. 그만큼 추억에 남는다.
2. 김수영 시인 시비
풀의 시인 김수영(金洙暎, 1921년 ~ 1968년) 시비가 등산로 바로 옆에 있다.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병약했으며, 선린고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의 도쿄대학 상과에 입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 학병 징집을 피해 대학교 중퇴 후 만주의 길림성으로 이주했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하였다. 또 연희전문학교에서 잠시 수학했으나, 졸업하지 못한 채 중퇴했으며, 1947년 예술 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후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표하였다.
625 한국 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에 징집되어 참전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김수영 시인은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통역 일과 잡지사, 신문사를 전전하며 시작과 번역에 전념하였다.
1957년 제1회 시인협회상을 받았다. 바로 살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 사이의 갈등과 슬픔의 극복이 중심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다. 1968년 6월 15일 밤 술자리가 끝나고 귀가하던 길에 서울 마포구 구수동에서 인도로 뛰어든 좌석버스에 치여 병원으로 옮겨진 뒤 다음날 새벽에 4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한국의 대표적 참여 시인으로 평가받는 김수영은 초기에는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하는 시를 주로 쓰다가 4.19 혁명을 기점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탄압과 압제에 맞서 적극적으로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정신을 강조하는 시를 썼다. 그는 이렇게 썼다. "4.19 때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소....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니까!"
그의 사후 민음사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하여 1981년 이후 매년 수여하고 있다고 한다. 생전에도 문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는데(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여 침을 뱉어라의 작품 해설), 지금도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 사이에서 김수영 시인을 연구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김수영 시인 외의 문학을 연구하는 것은 금지한다는 의미로 "수영 금지"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1930년대 이후 서정주·박목월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재래적 서정의 틀과 김춘수 등에서 보이던 내면의식 추구의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게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공로자"라고 평가한다. (참조 : 위키백과)
1950년대 말, 명동의 술자리에서 김수영 시인은 영구 집권을 획책하던 이승만 독재정권을 향해 갖은 욕설을 하고 있었다. 동석한 작가들이 이를 제지하자 “민주주의 국가에서 욕도 제대로 못 하느냐?”라고 했다. 오히려 “네 작품이 예술지상주의 냄새가 나는 건 그 지나친 조심성 때문이다”라고 비난했다. 그는 치열한 저항정신과 전에 없던 새로운 형식으로 자유와 삶을 노래한 시인이었다.
사람들은 4.19 혁명을 통해 김수영은 비로소 시인이 됐다고 말한다. 김수영은 4.19 혁명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고 벅차오르는 자유에 대한 느낌을 가누지 못해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에 깨어나서는 말짱한 정신으로 시와 산문을 미친 듯이 썼다고 한다. 그러한 그의 정신은 우리에게 익숙한 <풀> <눈>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폭포>와 같은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종로구와 도봉구에 있는 2개의 비석이 있다. 2개의 비석 중 하나는 종로구 관철동에 있는 ‘김수영 선생 집터’라고 소개한 비석이다. 또 다른 하나는 도봉구 도봉서원 앞에 있는 그의 시비(詩碑)다.
그리고 김수영 문학관이 있다. 2013년 그가 생전에 거주했던 서울시 도봉구에서 김수영 시인을 기리고 그의 시문 및 시학의 업적을 기리는 김수영 문학관을 방학3동에 설립하였다. 쌍문역에서 내려 마을버스 06번을 타면 김수영 문학관 정류장에서 내린다. 시인의 육필 원고, 저서, 김수영론 관련 자료, 시인의 애장도서와 애장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참조 : 덕성여대 신문, 2013.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