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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Aug 12. 2022

북한산   백운대   등산과   백운봉  암문

북한산(北漢山) 북한산성(北漢山城) 그리고 탕춘대성(蕩春臺城)

   한강 이남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있다면, 한강 이북에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 있다. 그리고 탕춘대성(蕩春臺城)이 있다.      

만경대 그리고 시내전경

   오늘(2020.12.05.)은 오랜 친구의 추천으로 함께 북한산 백운대를 올랐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멀리서 가끔 보기는 했으나 직접 올라 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군생활을 ‘땅 한 평, 하늘 삼천 평’ 강원도 1,110m 고지 백암산 산악지대에서 하였다. 군 제대 후 산에 오르는 것은 지긋지긋한 중노동이라는 생각을 줄 곧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40대 후반 건강에 적신호가 오기 시작하자 어느 날부터 갑자기 등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취미가 되었다.         

백운봉 암문

   북한산 백운대 정상을 오르기 직전에, 뜻밖에도 성곽의 일부인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작은 출입문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북한산성의 일부인 백운봉 암문(혹은 위문)인 줄 몰랐다. 사전 지식이 없었고, 무지했다. 이런 고산지대에 돌을 깎아 세운 성곽이라니 놀라웠다. 남한산성과 비교가 되었다. 남한산성은 인조 2~4년(1624~1626) 청의 침입에 대비한 급조한 산성(내외 성포함 둘레가 약 11km, 면적은 약 2.12 km2)이다.      


   북한산성은 숙종이 관료들과 오랜 토의 끝에 37년(1711) 장기적인 국가 방어 차원의 전략에서 전폭적으로 축성된 것이었다. 축성에 사용된 돌의 형태가 위급함의 정도를 나타낸다. 남한산성의 축성에 사용된 돌이 각이 없는 자연석에 가깝다면, 북한산성은 대체로 잘 다듬어진 각진 돌이 차곡차곡 쌓여 반듯반듯하다. 축성 기술의 발달로 지형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적절한 효과적인 축조 기법을 보인다. 완전한 성곽 형태의 온축이 있는가 하면 반축 반반 축 어떤 지형에는 이빨 모양으로 배열한 낮은 담장 형태의 여장(女墻)만 있는 곳도 있다.     


   병자호란 결과, 축성 금지 약조(7조)가 있었지만, 청나라 해안에 해적들이 출몰하자, 청은 조선에도 해적 침입 대비할 것을 권장했다. 숙종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축성 시작 6개월 만에 기존의 성곽을 포함 총길이 11.6km(약 5.2 km2, 여의도 2배)의 석성을 완성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718년(숙종 44년)~1753년(영조 29년) 탕춘대성을 구축하여 20만 명 수용 가능한 북한산성을 한양도성과 연결하였다.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으로 한양권(수도권) 입체적 연결 방어 성곽이 완성된 것이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땀 흘려 헌신한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새겨 보았다. 역사 현장은 역시 발로 직접 밟아 보고 확인하는 현지답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요 이동 등산로는 다음과 같다.  

   우이 역 2번 출구-> 우이동 만남의 광장-> 백운탐방지원센터-> 하루재-> 인수암-> 백운산장-> 백운봉 암문(위문)->북한산(백운대 정상 등산, 백운대 주변에 인왕산 만경대 : 3각산)---> 도선사-> 우이역     


1. 북한산(北漢山)

   북한산의 높이는 837m(백운대)다. 전체 면적 중 서울은 약 39㎢, 경기도는 약 41㎢이다. 북한산은 삼각산(三角山), 한산, 화산이라 불렀으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이라고도 하였다. 백운대(白雲臺,837m), 만경대(萬景臺, 800.6m), 인수봉(仁壽峰, 811.1m)의 세 봉우리가 삼각으로 나란히 우뚝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이곳 부아악에 올랐다고 한다. 또한 무학대사(無學大師)는 도읍을 정하기 위하여 백운대를 거처 만경대에 올랐다. 만경대를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한다.  비봉(碑峯)은 진흥왕 순수비가 꼭대기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진흥왕 순수비는 보존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겼고 현재 있는 것은 모조 비석이다.     


   산봉우리들이 거대한 암괴로 된 돔(dome) 형상인데 도상 구릉(島狀丘陵)이라고 한다. 중생대말에 화강암이 지반의 상승과 침식작용으로 지표에 노출된 뒤 절리와 표면의 풍화작용으로 산세가 험준하고 경사가 심한 암벽 봉우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1) 우이동역 2번 출구~하루재

   북한산 우이역 2 출구를 나와 우이동 만남의 광장을 통과했다. 북한산 국립공원 우이분소도 지나고, 백운대탐방지원센터를 경유하여 하루재로 올라갔다.     

인수암

2) 인수암

   조그마한 암자를 거처 갔다.     

백운산장

3) 백운산장

   나무 탁자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4) 백운봉 암문(白雲峰暗門, 일명 위문)

   문의 높이 약 1.7m, 폭 1.9m이다.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상출입구다. 백운봉과 만경봉 사이에 위치해 있다. 문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門扉)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 구멍이 남아있다. 백운봉 암문을 보고 난 후, 아래의 북한산성, 탕춘대성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게 되었다.     

만경대

5) 만경대(萬景臺)

   이곳에 오르면 삼라만상의 온갖 경치를 구경할 수 있으므로, 만경대라고 하였다. 삼각산의 한 봉우리로서, 조선 초에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을 받고 이 봉에 올라서서 나라를 다스릴 도읍터를 바라다보았으므로, 국망봉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인수봉

6) 인수봉(仁壽峰)

   백제 시조인 온조(溫祚) 왕이 형 비류(沸流)와 함께 올라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산 형상이 어린아이를 업은 형상이라 하여 부아산이라고 했다 한다. 옛 동료 중에 매력적으로 튀어나온 앞이마 덕분에 ‘인수봉’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가 있었다. 인수봉의 매력 포인트다. 특별한 사람들, 전문 산악인들만 특수한 장비로 오를 수 있다.     

백운대 정상

7) 백운대(白雲臺)

   태극기가 휘날린다. 인내심이 없으면, 정상 표지석을 잡고 인생 샷을 못 날린다.

백운대 정상

   참을성 없는 나의 경우가 그렇다. 워낙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높이 837m의 봉우리로 북한산 정상이라고 하면 이곳을 지칭한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중생대 쥐라기에 생성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백운대 정상을 올랐다는 기록이 있으나, 일반인들은 중간의 급경사 때문에 접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고정 로프

   장비를 갖추지 않은 일반인들이 백운대 정상을 오르게 된 것은 1908년에 고정 로프가 설치가 된 이후부터이다. 발아래 인수봉이 잘 보인다.     


8) 도선사

   하산길에 잠시 들렀다.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862년(경문왕 2)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북한산성을 쌓을 때는 승병들이 큰 역할을 했다. 남한산성 축성 경우와도 똑같았다. 축성 시 이 절에서 보초 임무인 방번(防番)을 서기도 하였다.  1887년(고종 24)에는 오층탑을 건립하고, 그 속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였다.     

북한산성(경향신문)

2. 北漢山城

   백운봉 암문의 존재를 알게 됨으로써 북한산성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았다. 북한산성에는 총 14개의 문(6개의 대문과 7개 암문 1개 수문)이 설치되었다.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언젠가는 북한산성 전체 성문 14곳을 탐방하고 싶다.     


   백제가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한 뒤 도성을 지키기 위해 132년(개로왕 5)에 축조했다. 백제 근초고왕의 북진정책 하에서 중심 요새지가 되었다.  삼국이 모두 군사요지로 여겨 치열한 쟁탈지가 되었다.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장수왕이 이 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전사시킴으로써 백제는 웅진성(熊津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 뒤 553년(진흥왕 14)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진출하여 북한산성을 차지하고서 진흥왕 순수비를 비봉에 세웠다. 603년(진평왕 25) 고구려군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했으나 곧 격퇴당했다. 또한 661년(무열왕 8) 고구려가 말갈군과 함께 20여 일 동안 포위 공격했을 때 성주가 성 안의 주민과 합심해서 끝까지 성을 지켰다.      


   고려시대에는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고려 태조의 재궁(梓宮 : 임금의 棺)을 옮긴 일이 있는데 이때 성을 증축했으며, 1232년(고종 19) 이곳에서 몽골군과 격전을 벌였다.      


   조선시대에는 양 난을 겪은 뒤 도성 외곽성을 강화하자는 축성론(築城論)이 일어났다. 숙종은 ‘북한산성 축조론자’였다. 숙종은 난리를 맞았다고 백성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했다. 최악의 순간에는 백성들과 함께 북한산성에 들어가 지킬 것(與民入守)이라고 했다. 백성과 함께 지킨다(與民共守)고 했다. 모두 북한산성에 들어가 최후항전을 벌인다는 일종의 청야 전술이었다.      

 

   1711년(숙종 37)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전격 실시했다. 건축물로는 대서문(大西門)·동북문·북문 등 14개의 성문, 동장대·남장대·북장대 등의 장대(將臺), 124칸의 행궁, 140칸의 군창,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한 12개의 사찰, 26개소의 저수지, 99개소의 우물이 있었다. 현재 삼국시대 토성은 약간 남아 있을 뿐이고, 대개는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이 남아 있다.


   병자호란 이후 청과의 약조(7조)로 성곽 하나 마음대로 쌓을 수 없었다. 드디어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 축성의 실마리를 풀었다. 중국 연안에 출몰하던 해적이 점점 강성해지자 청나라 이에 대비할 것을 조선에 요청기 때문이다.


    숙종은 "한양도성은 넓고 커서 수비하기가 어렵고, 남한산성은 한강 나루를 건너가기 어렵다. 강화도는 동절기 얼음이 얼어버리면 배를 운용할 수 없어 무용지물이다. 오직 북한산만은 지극히 가까운 까닭으로 백성과 함께 들어가 지킬 수 있" 판단하였다. 군량 등 물자를 모으는 일도 다른 곳과는 달리 어렵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 일부 관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축성을 결심했다.     


   1711년 4월부터 10월까지 단 6개월 만에 쌓은 비결은 이렇다. 백운대~만경대~용암봉~문수봉~원효봉~영취봉 등 깎아지른 봉우리들을 굽이굽이 연결, 총 둘레 11.6㎞(5.2㎢ 여의도의 2배)의 산성을 완성했다. 평지와 산지, 봉우리에 따라 낮은 계곡부는 온축으로, 그 외 지역은 반축, 반반 축 등으로 쌓았다. 험준한 지점에서는 성벽 없이 여장(女墻)만 조성한 곳도 있다. 참고로 남한산성의 규모는 내외 성포함 둘레가 약 11km이다.      


   임금의 거처인 행궁(1711년 8월~1712년 5월, 124칸)도 건설했다. 수도방위를 담당하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등의 지휘부 3곳이 들어섰다. 참고로 남한산성의 행궁의 규모는 상궐(上闕) 73칸, 하궐(下闕) 154칸으로 모두 227칸의 규모이다.      


   정규군은 성곽의 주요 진출입로와 창고를 방어하고, 승병들은 성곽의 암문 등 허점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산성 밑 평지에 비상시에 대비하여 7만 석 규모의 군량창고인 평창(平倉)을 설치했다.       

북한산성 탕춘대성 한양도성 (경향신문)

3. 탕춘대성(蕩春臺城) 

   탕춘대성은 도성인 한양도성과 산성인 북한산성을 잇는 성곽으로 1718년(숙종 44년)~1753년(영조 29년) 축조됐다. 전란 시 왕실은 물론 도성 사람들이 북한산성으로 피난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연결통로 역할이다. 평상시에는 도성 내부 평창동 일대의 식량과 물자를 보관하는 군수창고를 보호하는 방어시설로서 기능을 했다.     


   한양도성의 홍지문(弘智門)을 통해 탕춘대성과 북한산성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로써 비상사태 시 경복궁을 빠져나오는 국왕과 20만 백성들의 피란길과 장기 항전의 군사도시가 완성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입성한 조선군이 약 1만 2천여 명(수도권 방어 조선의 京軍. 중앙군)이었다. 20만 백성으로 청군의 약 12만 명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방어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만약 청의 침입(병자호란) 전에 한양도성이 탕춘대성과 북한산성이 상호 연결 완성되었었다면, 청군이 과연 겁 없이 파죽지세로 남한산성까지 밀고 내려온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한반도 한민족의 평화 통일과 생존을 위하여 무엇을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까? 자문하여 본다.     


<참고 정보>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2022.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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