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의 탕춘대성과 왕의 거처인 북한산성 행궁지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전번 주에 이어 오늘(2022.08.27. 토요일)도 탕춘대성 탐방이다. 오늘 목표는 홍지문을 출발하여 탕춘대성을 거쳐 북한산성 안의 북한산성 행궁지를 둘러보는 것이다. 새벽에 소나기가 왔다. 다행히 아침에는 개였고, 종일 화창한 날씨였다. 18도~25도로 등산하기에는 좋았다.
탕춘대성이 과연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의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첫 번째 관심사였다. 결론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홍지문에서 탕춘대성암문 청수동암문 북한산성 행궁지 중흥사 북한산성입구 버스정류장까지 약 6시간(오전 11시~오후 5시), 약 3만 5 천보 길, 힘든 행군이었다.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기획 실행한 숙종의 고뇌를 함께 나누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서울시가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을 통합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한다고 한다.
비상시 북한산성 왕의 거처인 행궁지에 도착하는 방법은 크게 대별하면 2가지다. 첫 번째는 고난의 길인 한양도성->탕춘대성->행궁지 길이다. 두 번째는 좀 쉬운 방법이기는 하나 적의 추격에 쉽게 추월당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길이 있다. 서울 은평구 효자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북한산 계곡인 북한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즉, 효자동 행정복지센터->중성문->산영루->중흥사->행궁지 길이다.
일부 붕괴 혹은 멸실된 구간은 체계적인 보수를 하여 안전한 탐방 등산길이 되었으면 한다. 좀 더 많은 곳에 안내간판, 방향 표시판, 역사 안내 간판 등을 설치하면 탐방객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다. 좋은 예로 남한산성, 백운대 수준의 안전대책을 마련하여 주시면 좋겠다.
특히 위험구간(비봉 정상, 사모바위 등)은 시급히 안전사고 방지를 위하여 계단, 철재 난간, 로프를 추가로 설치하여 주시면 안전한 등산이 되겠다. 헬리콥터가 몇 차례 상공을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아찔하다. 목숨을 내어 놓고 올라가는 열혈 등산객들도 문제지만, 어쨌든 다들 소중한 가족이 있다. 물론 ‘추락위험’ 표지판은 입구에 설치되어 있지만, 피가 끓는 등산 마니아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관계 당국은 등산객이 자기 가족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다.
3성(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의 연결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1) 한양도성(漢陽都城)
왜란(1592년~1598년, 선조)과 호란(1627년, 1636년, 인조) 속에서 한양이 함락되며 갖은 수난을 겪은 조선은 전쟁이 끝난 후 유사시 수도 방위를 위한 조치를 하였다. 효종(1649∼1659), 현종(1659∼1674) 거쳐 숙종 때에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하였다. 숙종은 1704년(숙종 30년) 3월 시작하여 1710년(숙종 36년) 도성 구축 공사를 완료했다.
2) 북한산성(北漢山城)
병자호란(1636년 12월~1637년 1월, 인조) 결과, 축성 금지 약조(7조)가 있었지만, 세월은 흘러 청나라 해안에도 해적들이 출몰했다. 청은 조선에도 해적 침입 대비할 것을 권장했다. 숙종은 평시 준비했던 계획을 즉각 실행에 들어갔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축성 시작 6개월(1711년 4월부터 10월, 숙종 37년)만에 기존의 성곽을 포함 총길이 11.6km(약 5.2 km2, 여의도 2배)의 20만 명이 함께 성을 지키고 생활할 수 있는 공간, 석성을 완성했다.
숙종은 왕이 난리를 맞았다고 백성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 백성들과 함께 북한산성에 들어가 지킬 것(與民入守, 與民共守)이라고 했다. 일종의 청야 전술이다. 요즘 나는 그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의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과 실행력, 애민사상이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건축물로는 대서문(大西門)·동북문·북문 등 14개의 성문, 동장대·남장대·북장대 등의 장대(將臺), 124칸의 행궁, 140칸의 군창,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한 12개의 사찰, 26개소의 저수지, 99개소의 우물이 있었다. 백운대~만경대~용암봉~문수봉~원효봉~영취봉 등 깎아지른 봉우리들을 굽이굽이 연결, 평지와 산지, 봉우리에 따라 낮은 계곡부는 온축으로, 그 외 지역은 반축, 반반 축 등으로 쌓았다. 험준한 지점에서는 성벽 없이 여장(女墻)만 조성한 곳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임금의 거처인 행궁(1711년 8월~1712년 5월, 124칸)도 건설했다. 수도방위를 담당하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등의 지휘부 3곳이 들어섰다. 정규군은 성곽의 주요 진출입로와 창고를 방어하고, 승병들은 성곽의 암문 등 허점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산성 밑 평지에 비상시에 대비하여 7만 석 규모의 군량창고인 평창(平倉)을 설치했다.
3) 탕춘대성(蕩春臺城)
탕춘대성은 도성인 한양도성과 산성인 북한산성을 잇는 성곽으로 1718년(숙종 44년)~1753년(영조 29년) 축조됐다. 전란 시 왕실은 물론 한양 도성 사람들이 북한산성으로 피난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연결통로 역할을 한다. 평상시에는 도성 내부 평창동 일대의 식량과 물자를 보관하는 군수창고를 보호하는 방어시설로서 기능을 했다.
한양도성의 홍지문(弘智門)을 통해 탕춘대성과 북한산성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로써 비상사태 시 경복궁을 빠져나오는 국왕과 20만 백성들의 피란길과 장기 항전의 군사도시가 완성되었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 기차바위를 따라 내려가다가 홍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 동쪽 약 100여 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 현 세검정 초등학교)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다.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도 하였다.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다.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탐방 코스는 아래와 같다.
***홍지문-> 인왕산 둘레길(약 100m 이동)->홍지문-> 탕춘대성벽 진입로(상명대학교 정문, 제1공학관/학생회관 사이, 부속중학교 정문 좌측 샛길)->탕춘대성곽 진입-> 탕춘대성 암문-> 탕춘대성 지킴터-> 향로봉 방향(우회함)->비봉(능선)->사모바위-> 승가봉-> 청수 동암문-> 남장대-> 남장대지-> 북한산성 행궁지-> 중흥사지->산영루-> 중성문-> 대서문->북한산성입구->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북한산성입구 교차로/버스정류장
홍지문과 오간대수문(홍제천) 1) 홍지문과 오간대수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으로 1715년(숙종 41년)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 연결하기 위해 세웠다. 홍제천 위에 수문이 다섯 개 있는 오간대수문을 세웠다. 남측으로는 인왕산 기차바위 쪽, 북측으로는 상명대 방향 향로봉 탕춘대성과 연결되어 있다.
인왕산 둘레길 초입 탕춘대성곽(홍지문에서 기차바위 방향으로 약 100m 구간) 2) 인왕산 둘레길
탕춘대성 축성 시작 부분 확인하기 위하여 홍지문쪽 인왕산 둘레길 초입에서 기차바위 방향 약 100m까지 계단을 올라 상부로 이동하였다. 축성을 확인했다.
탕춘대성 진입로 3) 탕춘대성벽 진입로
이정표가 안 보여 진입로 찾기에 애를 먹었다. 택배 기사님께 물어보았으나 실패했다. 다음 지도 앱을 켰다. 탐방 내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상명대학교 제1공학관과 학생회관 사이를 통과하고, 부속중학교 정문 좌측 샛길로 접어들어 약 50m 더 올라가 진입로를 찾았다.
탕춘대성 암문 4) 탕춘대성 암문
성벽을 따라 향로봉 방향으로 계속 올라갔다. 일부 구간은 무너진 성벽을 푸른색 천막으로 덮어 두었다.
축성장면(출처 : 한양도성 박물관 영상 촬영)
축성 장면(출처: 한양도성 박물관)
암석 깨기 및 석축 쌓기 도구(출처 : 한양도성 박물관) 산비탈 경사진 곳에 성벽을 쌓기에 무척 힘든 노동력이 투입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상님들의 노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몇 군데 억새 군락지 보호용 대나무 울타리가 보였다. 탕춘대성의 유래 안내간판이 보였다.
족두리봉 5) 향로봉(535m) 방향(우회함)
좌측에 족두리를 쓴 모양의 족두리봉이 보였다. 인수봉을 닮았다. 통째로 한 덩어리 바위산이다. 탕춘대 지킴터앞의 탐방객수를 자동으로 센다는 계수기를 통과했다. 서울시내 멀리 남산, 경기도 고양시 일대가 잘 보인다. 멀리 족두리봉 방향에서 오는 등산객들이 향로봉을 거의 45도 각도로 오르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안전지지대 혹은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지 궁금했다. 향로봉을 우회하여 비봉능선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비봉 6) 비봉(碑峰, 560m)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비봉 정상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555년 혹은 568년경) 세워진 이래 1,200여 년 동안 잊혀오다가 조선 말기의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金正喜)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비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로 옮겨져 보호를 받고 있다. 탁월하신 분임에 틀림없다. 비의 측면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고, 탁본을 남겼기에 지금은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를 후세인들이 그 탁본을 근거로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추사는 북한산성과 인연이 깊다.
물론 순수비 정상 등정은 탕춘대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코스는 아니다. 그러나 순수비를 보기 위하여 가족 혹은 동호회 등산객들이 지지대 철재 난간 하나 없는 ‘추락위험’ 지역으로 줄을 지어 올라가서 인생 샷을 날리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어차피 못 말리는 열혈 등산객들이라면, 당국은 철재 난간, 와이어로프 등을 시설하고, 추가로 경고판을 설치해서 아까운 생명을 살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 올라가다가 도저히 다리가 후덜 거리고 고소공포증이 있는지라 포기하고 내려왔다.
*** ~*** 부분, 사진 및 글은 새로이 추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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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6, 국립중앙박물관 방문 시 신라관에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직접 보고 사진을 촬영했다. 참으로 반가웠다. 비의 측면에 '김정희'가 세겨져 있다.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설명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정면(1)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정면(2)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측면(1)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측면(2, 구멍은 총탄 자국)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측면(3, 구명은 총탄 자국)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판독문 <번역 내용>
진흥태왕(眞興太王) 및 중신(衆臣)들이 … 을 순수할 때의 기록이다.
… 언(言) … 령갑병지방(令甲兵之仿) … 패주설(覇主設) … 상(賞) …
지소용고사서(之所用高祀西) … 서로 싸울 때 신라(新羅)의 태왕이 …
… 덕불병고(德不兵故) … 건문(建文) 크게 인민을 얻어 …
이리하여 관경을 순수하면서 민심을 … 하고 노고를 위로하고자 한다.
만일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고 …
상을 더하고 … 한성(漢城)을 지나는 길에 올라 …
도인(道人)이 석굴에 살고 있는 것을 보고 … 돌에 새겨 사(辭)를 기록한다.
척간(尺干), 내부지 일척간(內夫智一尺干), 사훼 모력지 잡간(沙喙另力智迊干)이다.
남천군주(南川軍主)는 사훼(沙喙) … 부지 급간(夫智及干), 부지 대나(夫智大奈) … 사훼 굴정차 나(沙喙屈丁次奈)이다.
… 곡(谷) … 지(指) … 비고 그윽한 즉수(則水) … 겁(劫) 처음에 세워 만든 바는 비(非) …
순수하여 견 … 세기정(歲記井) …
(번역 출처 :나무위키)
<전체 대략 내용>
진흥왕의 행차 사실과, 진흥왕을 보좌한 대신들의 이름과 직책을 열거했다. 주목할 만한 부분으로는 새로 신라로 편입한 지역의 백성들을 교화하는 '도인'에 대한 기록으로, 단순히 진흥왕이 영토를 확보하는 데만 주력한 것이 아니라 정복지의 백성(피정복민)에 대한 교화에도 신경 썼음을 보여준다. 그 외에 왕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지워져서 잘 알 수는 없지만 마운령비 같은 다른 순수비에 남아있는 수행인 명단을 참고하면 여기에도 승려, 약사, 점쟁이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동행시켜 현지인의 민심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출처 :나무위키)
***(끝)
7) 은신처
김신조 은신처가 등산로 약 30m 아래 큰 바위 밑 틈새에 있다. 밀랍 형상의 인형(2인)이 있다.
사모바위 8) 사모바위
사모관대 혹은 사각형과 비슷하다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직사각형 바위가 어떻게 저기에 올라가서 오랜 세월을 버티고 있는지 경이롭다. 여기도 열혈 등산객들은 45도 경사진 바위를 타고 올라간다. 단체 사진도 찍는다. 물론 사모바위 위는 탕춘대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코스는 아니다.
승가봉 9) 승가봉 / 역 세모 문
남쪽으로는 남산타워, 롯데타워가 보인다. 북쪽으로는 도봉구 우이동 쪽에서 보았던 만경대등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역 세모 문(정확한 이름 모름, 확인 중) 역삼각형의 돌문을 통과했다. 내가 지금까지 착하게 살아왔는지를 여부를 뒤돌아 보게 한다. 공포체험 현장이자 관문이다.
청수 동암문 청수 동암문 앞 설명판 10) 청수 동암문
두 갈래 안내표지판이 있다. 쉬운 길과 어려운 길. 문수봉 뒤로 돌아 올라가는 쉬운 길을 택했다. 힘이 빠져서 이다. 무엇보다 목표지점 북한산성 행궁지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고 헤매고 있는 중이다. 힘을 아껴 두어야 한다.
애추 지형(talus)이 나온다. 너덜 돌서렁이라고도 부른다. 암벽에서 떨어져 나온 암석들이 오랜 세월 겹겹이 쌓여 돌밭을 이루고 있다. 무거운 큰 암석은 산아래로, 작은 암석은 상부에 남는다고 한다. 나월봉과 문수봉 사이에 있다. 역할은 탕춘대성과 비봉에서 들어오는 길목을 통제한다. 북한산성 행궁지 내려가는 중요한 좌표다.
남장대지(설명판) 11) 남장대지
북한산성 3개 장대중 남쪽 장대이다. 전투 시 지휘소 역할을 하며 사방을 관측하기에 좋은 곳에 설치했다.
와이파이가 작동하지 않아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오후 4시 30분. 산중이라 날이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사토 같은 모래 알갱이가 깔려 있어 경사면이 미끄럽다. 계단 와이어로프 지지 난간대를 추가로 설치하였으면 좋겠다.
혹시 길을 잃을 경우를 대비해서 삶은 달걀 3개, 등산복 상의를 등산백 안에 준비했지만, 산길 옆에 떨어진 야생 복숭아가 건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비상식량이다. 인적이 드물다. 북한산성에도 멧돼지 등 산짐승이 산다. 한참 뒤에 오는 대학생인듯한 젊은 두 친구가 지도를 보며, 때로는 미끄러지는 소리를 내며 나처럼 헤매며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북한산성 행궁지 12) 북한산성 행궁지
드디어 어렴풋이 행궁지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가까이 내려가 보니 로프 줄이 쳐져있다. 행궁지 곳곳에 푸른 천막으로 뭔가를 덮어 놓았다. 문화재 발굴조사구역이므로 ‘관계자 외 출입금지‘다. 아무튼 오늘 목표는 성공적으로 달성한 셈이다. 주위에 경리청상창지 남장대지 금위영 이건기비 금위영 유영지 어영청 유영지(대성암)가 있다.
행궁권역 표지에는 경리청 상창 관성소 호조창등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즉, 산성을 관리하고 식량 창고 역할을 했다고 한다. 중창지는 전시대비 식량과 무기를 보관했다고 한다.
중흥사(설명판과 추사 김정희 시) 13) 중흥사지
북한산성 축성 당시 전국 승군을 통솔하던 팔도 도총섭이 머물던 사찰이다. 추사 김정희가 방문할 때 시를 남겼다고 한다.
산영루(설명판과 추사 김정희 시) 산영루 14) 산영루
북한산성 내 대표적 누각이다. 추사 김정희가 방문할 때 시를 남겼다고 한다.
중성문(수문) 15) 중성문(수문)
북한산성에 설치한 2개 수문중 한 개다. 1711년 북한산성을 완성하고 1712년 숙종이 행차했는데, 북서쪽이 평탄해서 함락 소지가 있으니, 다른 성을 더 쌓아라고 하여 북한산 내성에 해당하는 중성을 축성했다. 좌측에 북한산 계곡의 수문과 함께 축조했다. 수문 쌓는 책임자가 별도로 있었다고 한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서문(설명판) 16) 대서문
중성문 아래에 있다.
17) 북한산성입구
북한산 둘레길 종합안내판이 있다. 대형 소방차를 끌고 올라온 119 구급대원 5명이 표지판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북한산국립공원' 간판이 북한산성처럼 우뚝 서 있다. 북한산성 계곡 물소리를 듣고, 음이온과 많이 접촉하며 내려와서 인지, 다리는 아프지만 기분이 상쾌하다.
숙종이 기획 실행한 한양도성 탕춘대성 북한산성의 유기적 연결고리를 확인하게 되어 보람찬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