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근처에서 친구들과 오래간만에 모임(2022.11.19)이 있었다. 두어 시간 일찍 도착해서 덕수궁을 둘러볼 계획을 세웠다. 아름다운 수목과 노란 단풍잎을 보기 위해서였다. 덕수궁은 내게 낯선 곳은 아니다. 수십 년 전 덕수궁 근처 세종문화회관 뒤편 건물에서 신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출퇴근길에 덕수궁 앞을 지나갔고 궁내부도 몇 번 관람했다. 아름다운 포근한 정원 같은 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무심히 지나쳤지만, 대한제국 역사관 특별전을 보고 내가 참으로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는 자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궁궐은 수차례 화재로 불타서 재건축하고, 더욱이 일제의 만행으로 훼손되고 망가져서 마음이 아팠다. 결국은 국권도 잃었다.
덕수궁내 돌담(좌)과 중화문(중앙)
관람료(1,000원)를 내고 노란 단풍잎이 깔린 경내를 둘러보고 돌로 만든 석조전 근처에 왔을 때 앞에 긴 줄이 보였다. 그 줄은 계단을 몇 개 올라가는 약간 높은 위치의 1층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60대의 어떤 신사가 일행에게 석조전 뒤편 덕수궁 담 밖의 어떤 건물을 가리키며 저 건물(중명전)에서 한일 을사 늑약의 치욕스러운 조약이 체결된 곳이라고 설명하며 지나갔다. 석조전 입구에는 ’ 2022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 특별전‘이라는 입식 광고물이 서 있었다. 고종 사진 앞에 이토 히로부미가 먼 곳을 응시하는 장면을 덧붙여 놓았다. 우리 민족에게는 크나큰 고통을 안겨 주었고,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생을 마감한 자가 아닌가?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 긴 줄의 끝자락에 서게 되었다. 60대의 행사 안내원분이 관람 전에 몇 가지 지켜야 할 사항을 설명하고 있었다. 무료함을 달래주려는 듯 퀴즈를 냈다. 성씨 중 오얏 李의 오얏이 뭐냐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자두'요 하고 소리쳤다. 안내원분이 정답이라며 줄 선물이 다 떨어져 아쉽다고 했다. 담 밖 ‘고종의 길’은 고종이 러시아의 힘에 의지하기 위해 한밤중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길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외세 침략의 현장 한가운데에 와 있는 셈이었다.
석조전
더구나 석조전은 광복 후 강대국들이 한반도의 운명을 논하던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장소가 아닌가? 덕수궁 돌담길 이별의 전설은 우리 한반도의 슬픈 역사를 에둘러 표현한 슬픔을 삭인 전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종의 슬픈 애사 그리고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담겼다. 힘이 없으면 이별(분단)한다는 경고의 전설이 아닐까?
1927년 돌담길 옆에 경성재판소 법원(현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이 개관됐다. 이혼 소송을 하기 위해, 혹은 마친 후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 대로로 나오기 위해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가는 부부가 많았다고 한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전설의 가장 그럴듯한 근거다.
2) 이화학당과 배재학당 학생들의 통학로
덕수궁 돌담길 주변에는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이 있었다. 사춘기 풋풋한 첫사랑 시절의 통학로는 정동교회 앞에서 헤어져야 했다. 각자의 학교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화여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현재 배재 중고등학교는 한강 이남의 동쪽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해서 멀리 떨어져 있다.
3) 슬픈 역사의 길
덕수궁이 위치해 있는 정동 명칭의 유래를 잠시 살펴본다. 정동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 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태조는 자신도 이곳에 함께 묻히려 했다. 하지만 이복동생이자 강 씨의 아들인 방번과 세자 방석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9년, 태조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정릉을 도성 밖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했다. 또 태조의 능(건원능 健元陵)은 양주로 옮겼는데 지금의 구리시다. 태조와 계비 강 씨의 능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았다.
계비 강 씨의 무덤을 이전한 후에 세월이 흘러 이 일대에 세조의 손자인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와중에 한양 도성의 궁궐이 모두 불탔다. 1593년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거쳐할 곳이 없어 월산대군 후손들의 집 및 민가를 근거로 궁궐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경운궁(덕수궁)의 효시다. 그 후 경복궁 창덕궁 등이 재건되자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은 후속 왕들의 주요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뒤늦게 개방하였다. 문호 개방의 실기로 일제의 침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에도 막부 이래 쇄국 정책을 고수하다가 미국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로 반강제 미·일 화친 조약(1854)을 맺고, 뒤이어 미·일 수호 통상 조약(1858)을 맺으면서 문을 완전히 열고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약 20년 늦은 문호 개방으로 일제의 침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미국과의 불평등 조약 맺을 때 당한 기법을 조선과 협약 맺을 때 써먹었다.
1895년 경복궁에서 천인공노할 왜의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 본격적인 덕수궁 활용은 1896년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 후, 결기를 다지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1897년 2월에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한 때부터이다.
본래 이름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세배로 170동 이상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궁궐이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고종이 1907년 물러나면서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러나 덕이나 쌓고 세월을 보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의 덕수궁 이름을 경운궁으로 변경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1919년 고종 승하 후 덕수궁 권역은 빠르게 해체 축소 훼손되었다. 일제는 2/3를 분할 매각해서 궁을 축소하고 중간에 길을 내고 담을 쌓았다. 그 길이 오늘날의 덕수궁 돌담길이다. 덕수궁 돌담길 자리는 원래 경운궁 안에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은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2. 대한문(大漢門)
1906년 대안문을 수리하고 대한문으로 개칭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제가 훼손 해체 축소하기 전에는 시청역 서울광장 일대도 경운궁 영역이었다.
중화문과 중화전
3. 중화문 (中和門)/ 중화전(中和殿)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덕수궁을 정비하였다. 정전인 중화전 기단에는 용 문양을 새기고, 창호를 황금색으로 칠했다. 중화문을 둘러싸고 사방에 행각을 둘렀다. 그 후 일제는 행각과 전각을 헐고 정원을 만들어 훼손했다.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관
4. 석조전 서관 (石造殿 西館)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936년 8월 기공하여 1938년 6월에 준공하였으며 이왕가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석조전 좌측면 1층 돌계단
5. 석조전(石造殿)/대한제국 역사관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건립을 계획하고 1900년 착공, 1910년 완공하였다. 엄격한 비례와 좌우대칭의 신고전주의 양식이라고 한다. 내부는 접견실 대식당 침실 서재 등을 갖추었다. 일제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면서 훼손하였다.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다. 2014년 복원하여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정권이 바뀔지라도 어떤 역사물도 절대로 훼손하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조하여 조롱의 대상물로 삼는 것이 좋은 예이다.
‘황제 고종’의 '2022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 특별전‘이 개최되고 있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1층에 5개의 전시실이 연결되어 있다. 각종 문서와 실물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고종은 오랜 역사를 가진 중앙집권 국가의 군주로서 근대 시대 전환과 외세 침략이라는 가혹한 역사의 시험대 앞에 섰다. 동아시아의 전통을 무시하고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을 표방했다.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전래의 가치를 지키려고 했다. 독립 자강을 위하여 외세를 활용했다. 고종은 국권침탈 후에도 외세 저항을 계속했다. 전시실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석조전
제1 전시실 : 쇄국을 넘은 개화 군주
1863년 조선 26대 왕으로 즉위, 국제무대에서 자주독립국으로 등장할 준비를 했다. 열강들의 간섭과 을미사변으로 위기에 처했다.
고종황제 황룡포
제2 전시실 : 조선의 왕에서 대한제국의 황제로
1897년 대한제국 선포하고, 조선의 국왕이 아닌, 동아시아의 황제국인 대한제국 황제를 선포했다. 중화질서에서 벗어나 국가적 상징 장치를 마련하고 각종 의장과 제도를 정비하였다.
고종 황제
제3 전시실 : 자주독립의 근대국가를 꿈꾼 황제
대한제국 선포 후 근대 제도와 신 문물을 적극 도입하면서 황제권 기반 국가 운영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구본 신참의 이념으로 1902년 즉위 40주년 칭경 예식을 통해 대내외에 중립국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을사늑약 사본
제4 전시실 : 국권의 침탈과 저항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세계열강으로부터 대한제국 지배권을 인정받아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하여 강압 속에서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고종은 각국에 친서를 보내고 , 네덜란드 당시 수도 헤이그에서 개최되었던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위하여전력투구하였다.
고종의 독립 자금을 서류를 위조하여 몰래 인출한 일제의 조작 문서
고종 칙령(의병들에게 밀명)
제5 전시실 : 퇴위와 저항, 기억 속의 황제로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했다는 근거로 을사늑약 위반으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전국 각지의 의병들에게 밀명을 내려 항일운동을 독려하고 독립단체를 조직하였다.
6. 준명당 (浚明堂)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서 경운궁(慶雲宮, 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지은 건물이다. 내전(內殿)의 하나로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이다. 즉조당과는 복도로 이어져있다.
준명당과 즉조당
7. 즉조당(卽阼堂)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곳이다. 또한 1623년 인조가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
8. 석어당(昔御堂)
1608년 선조가 승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618년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유폐한 곳이다.
9. 덕홍전(德弘殿)
명성황후의 신주를 모신 경효전이 1904년 화재로 불탔다. 그 자리에 덕홍전을 세웠다. 외국 사신을 접견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외관은 전통식이지만, 내부는 서양식이다.
정관헌
10. 정관헌(靜觀軒)
한국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절충된 외관을 가졌다.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로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어당(좌)과 덕홍전(우)
11. 함녕전(咸寧殿)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되었고, 고종이 승하한 장소다.
12. 광명문(光明門)
덕수궁 함녕전의 정문이다
연지와 함녕전(상단)
13. 연지
궁궐의 연못은 화재 발생 시 불을 끄는 용수의 공급원이다. 단풍과 연못의 풍경이 아름답다.
중명전(출처 : 문화재로 배우는 근대 이야기, 복원전으로 추정)
중명전(복원후 현재 모습, 2023.02.04)
14. 중명전 重眀殿 (덕수궁 밖 북쪽)
1897년 황실의 도서와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의 황실 도서관으로 1899년 준공되었다. 미국인 다이(J. H. Dye)의 설계로 1층 서양식 건물로 지어졌다. 우측에 아관파천 당시의 ’ 고종의 길‘이 있다. 1901년 11월 화재로 전소되어 이듬해 회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1904년 4월 고종이 덕수궁으로 옮겨오면서 편전 겸 폐현 장소로 사용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이곳에서 강압적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장지연(張志淵) 주필의 황성신문(皇城新聞)은 11월 20일 자 논설에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이 날에 목놓아 크게 우노라)을 싣고 정간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을사늑약을 끝까지 승인하지 않았다. 1907년 7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의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밀사를 특파하였다. 외교권이 없어 참석을 못했다. 7월 14일 저녁 이준 열사는 순국했다. 일제는 고종이 을사늑약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강제 퇴위시켰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