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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과 중명전, 고종의 길

덕수궁 돌담길 이야기(2)

by 애바다

오늘(2023.02.04. 토) 꿈에 그리던 남산을 처음으로 올라가 보았다. 소나무와 한양도성의 성곽을 본 것이 제일 큰 수확이었다. 한강진역에서 하차, 도보로 남산 타워, 안중근의사 기념관, 백범 광장을 탐방했다. 숭례문을 거쳐 마침내 덕수궁의 대한문 앞에 도착했다.


덕수궁 외곽 돌담길을 시계방향으로 돌아 중명전과 고종의 길을 탐방했다. 덕수궁 내부는 이미 몇 달 전에 관람했다. 그 후 덕수궁 외부에 있는 중명전과 고종의 길이 몹시도 궁금하였다. 우리 민족의 존망 사활이 걸린 역사적인 장소였기 때문이다. 오늘 그 궁금증 일부라도 풀어 보기로 작심했다. 즉, 이동로는 다음과 같다.

덕수궁과 둘레길 안내도 (제2 코스 : 고종의 길)

덕수궁 대한문->돌담길/정동길->정동제일교회->국립정동극장->이화여고->예원학교->중명전->정동공원(구 러시아공사관)->고종의 길->구세군 서울제일교회->덕수궁 후문/덕수궁 내부통행로->시청역


당시 고종의 대한제국이 처한 역경과 시대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잠깐 역사적 사건을 살펴본다.

강화도조약(1876),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혁명(1894), 청일전쟁(1894, 청의 패전), 시모노세키조약 체결(1895.04.17, 청이 조선에서 물러남, 랴오뚱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 3국 간섭(1895.04.23 간섭이 일어남. 청국 패전 후 일본에 할양되었던 랴오둥 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 3국이 공동으로 일본에게 반환할 것 요구함. 1895.05.10. 일본이 굴복, 랴오뚱반도를 청에 다시 반환함), 을미사변(1895.08.20 민비시해), 아관파천(1896.02.11), 경운궁(덕수궁) 환궁(1897.02.20), 고종 황제즉위식(1897.10.12), 러일전쟁(1904, 러시아 패전), 가스라-테프트 밀약(1905.07.29, 미국이 필리핀을, 일본이 대한제국을 영향 하에 두는 밀약. 미일이 상호 교차 승인), 을사늑약(1905.11.17. 외교권 상실), 헤이그 특사 파견(1907.04.20), 고종황제 강제 퇴위(1907.07.19),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살(1909.10.26, 만주 하얼빈 역), 국권 상실(1910.08.29, 한일병합), 고종 승하(1919.01.21, 덕수궁 함녕전), 3.1 운동(1919.03.01)

대한문 현판과 문 앞 덕수궁 표지석

1) 덕수궁 대한문

대한문(大漢門)은 현재 덕수궁의 정문이다. 1896년 경운궁을 개수할 때 착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 1904년까지 경운궁(현 덕수궁)의 정문은 원래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1904년 덕수궁 화재 이후 1906년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동년 4월 25일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다. 대한(大漢)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이다.

덕수궁 돌담길

2) 덕수궁 돌담길/정동길

정동길은 조선 태조의 왕비인 신덕왕후 강 씨의 능인 정릉이 있어 정릉동이라고 하였다. 그 후 줄여서 정동이라고 이름 붙였다. 정동길은 정동교회 앞에서 예원학교와 이화여고를 거쳐 새문안길에 이르는 길로 폭 18m의 2차선 도로이다. 이 길 근처에서 아관파천 ・을사조약 체결 등 격동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정동제일교회

3) 정동제일교회

1885년 10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 H.G.)에 의하여 정동 사저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창설자 아펜젤러는 1885년 4월에 입국하여 그 해 8월에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 한국의 근대교육을 창시하고, 또한 이를 보급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아펜젤러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종교행사를 하였다. 1887년 9월 전적으로 예배만을 볼 수 있는 교회용 건물을 구입해 이를 수리하고 교회이름을 베델예배당(Bethel Chapel)이라 하였다.

정동제일교회는 초창기부터 그 옆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梨花學堂)이 있어 학생들이 그 교회의 중요 축이 되어 개화운동의 한 중심지를 형성했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가 배재학당장까지 겸하고 있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이승만박사가 이곳 장로를 지냈고, 유관순 열사도 정동제일교회 신도여서 유관순 열사 장례식을 이곳에서 치렀다. 또한 근래 정동제일교회는 모 그룹의 자녀들의 예식장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국립정동극장

4) 국립정동극장

시민들의 이웃과 같은 생활 속의 열린 문화공간이다. 1995년 6월 개관 이래 상설공연 <전통예술무대>를 비롯해 <명인전>, <아트 프런티어>등의 예술성 높은 기획공연과 <정오의 예술무대>등 일반 시민을 위한 프로그램 등을 선보여 왔다. 2010년 전통뮤지컬 <춘향연가>를 창작·초연하며 상설공연브랜드'미소(MISO)'를 성공적으로 론칭하였다.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이화여고

5) 이화여고

1886년 5월 북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튼(M. F. Scranton)이 설립하였다. 스크랜턴은 한국 여성으로 하여금 기독교 교육을 통하여 보다 나은 한국 여성이 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설립 당시 여성교육을 기피하는 전통적 관념과 서양인에 대한 배타적 성격 때문에 학생 수용에 큰 곤란을 받았다. 단 한 명의 여학생만으로 개교하여 영어를 가르쳤다. 1887년 고종으로부터 교명인 이화학당(梨花學堂)을 하사 받음으로써 최초의 근대 여자교육기관으로 정식 승인받게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오후 3시가 되면 일제히 수업을 중단하고 국권회복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가졌다. 이러한 정신은 그 뒤에도 3ㆍ1 운동과 각종 항일운동으로 이어져 유관순(柳寬順) 열사 등 선각자들을 배출하였다.

예원학교

6) 예원학교

예원학교(Yewonschool)는 1967년 3월 개교하였으며, 중학교 과정의 예술계 각종 학교이다. 무용(발레, 한국무용), 미술, 음악(성악, 피아노, 작곡,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하프, 기타, 플루트, 클라리넷, 오보에, 바순, 호른, 트럼펫, 트롬본, 튜바, 타악기 등)을 가르친다. (출처 위키백과)

중명전

7) 중명전(重明殿)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이라 짓고, 주로 황실 도서관(King's Library) 용도로 사용되었다.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하였다.

중명전 입구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중요한 역사적 현장이다. 특히,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대화재 이후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 강압적으로 체결되었다. 그 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곳이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중명전 뒷 모습
중명전 건물 뒤 모습/고종의 침전이 있던 만희당(잔디 광장 부분)을 일제가 허물고 수영장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중명전은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소실된 뒤 다시 재건하여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럽등으로 사용했다. 자유당 정부 때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다. 1963년 박정희 정부는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다.

을사늑약 체결을 목적으로 대신들을 협박 중인 이토 히로부미(중명전 1층)

중명전 내부 1층 입구 좌측에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았다. 회의실 안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대신들의 얼굴을 잘 묘사한 인형들이 있다. 살벌한 압적 조약체결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당시 고종은 불평등 조약에 끝까지 서명하지 않으며 거부했다. 그러자 실무 책임자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8명의 대신을 겁박했다. 그중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 등의 대신들은 조약 체결에 동의했고 훗날 ‘을사오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제는 근대화 개국 시기에 서구 열강의 강압적 수법에 당했던 치욕적인 수모와 경험을 대한제국에 되풀이 앙갚음한 것이다.

(일본 이즈 반도 문학 기행 : https://brunch.co.kr/@jylee2020/27, "도오진 오키치(唐人お吉)" 일본 개국시 기생 참조)

안중근 의사의 저격 장면(출처 : 안중근 의사 기념관)
이토 히로부미 부검도(3발, 화살표 탄착점) / 벨기에 권총 번호 262336 (출처 : 안중근 의사 기념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민족의 통분이었다.

고종의 위임장(헤이그 특사/헐버트)

고종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네덜란드에서 열린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비밀특사를 파견했다. 조약의 부당성을 국제 사회에 알렸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정동공원(좌측 가림막 안에서 구 러시아 공관 전망탑 복구공사 중. 우측 휀스옆 소로 우측에 '고종의 길' 출구문)

8) 정동공원(구 러시아공사관 위치)

1895년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위협을 느낀 고종이 1896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극비리 새벽에 거처를 옮겼다. 이미 한차례 실패한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 고종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 9일간 생활하였다. 고종은 개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3층 전망탑 등 일부분만 남아 있다. 현재 가림막을 쳐 놓고 복구공사 중이다. 1884년 조선과 러시아의 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1890년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3층 전망탑을 세웠다. 탑에서 내려다보면 덕수궁내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덕수궁과 인접한 미국과 영국의 공사관 내부 높은 건물도 이러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래의 안내판이 그 당시 역사적 사실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을씨년스럽다'의 유래가 을사년(1905) 상황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을사년스럽다"가 어원이다.

대한제국 사수를 위한 고종의 마지막 저항
고종의 길 문(정동공원 쪽, 종점)

***고종의 길에대한 문화재청 자료(2018.11.30)

러시아공사관에서 바라본 ‘고종의 길'(1900년대 초)


고종의 길 복원 구간 기존 및 신설 담장 관계도
알렌의 정동 조계도 (붉은 점선내가 고종의 길이다)

9) 고종의 길 /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길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 후, 러시아 측은 1896년 2월 10일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군함 수군 120여 명을 무장시켜 서울에 진군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2월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는 극비리에 궁녀의 교자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이다. 일제 군대는 경복궁 출입문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덕수궁 선원전(璿源殿)과 미국대사관 관저 사이에 난 좁은 길이 '고종의 길'이다. 즉, 길이가 120m에 이르는 고종의 길은 덕수궁 서북쪽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건너편과 옛 러시아공사관이 있는 정동공원을 잇는 길이다.


고종의 길을 좀 더 추정하여 보기로 했다.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쪽에서 영국대사관 진입 골목으로 접근, 덕수궁 내부 순환로를 걸어가 보았다. 각종 사료에 따르면 고종은 덕수궁 북쪽에 있는 회극문(會極門)을 나와서 영국대사관 후문쯤에 있었던 이름을 알 수 없는 문을 통해 선원전 영역에 들어가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명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 근거는 오직 미국공사관 도면에 길쭉하게 그려진 곳에 'king's ~(판독 어려움)'라는 알파벳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더구나, 고종실록에는 이동경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전국의 유생들이 계속된 상소와 장안의 시전(市廛)들이 철시를 단행할 조짐을 보였다.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 환궁 후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진언을 받아들여 그해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원구단에서 갖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고종의 길 내부(정동공원에서 덕수궁 방향으로 촬영)
고종의 길 내부(수로 시작 부분 끝에 저수탑이 있었다고 한다)
선생님의 현장 강의를 열심히 진지하게 듣고 있는 학생들(좌측)/ 복구공사 중인 선원전 터(우측 상단 휀스 밖 흙이 드러난 부분. 보이는 조선저축은행 임원 관사는 철거 예정)

조선저축은행 임원 관사를 광복 후 미국대사관사로 재활용했다고 한다. 덕수궁 선원전대에 세워진 조선저축은행 사택 등 건물 9동과 시설물을 철거하고 발굴조사를 거쳐 연차적으로 건물을 복원 중이다.

휀스 밖 복구 중인 선원전 터
휀스 밖 선원전 터


고종의 길(덕수궁 쪽 출발점, 안쪽)
고종의 길 출발 문(덕수궁 쪽)

고종은 겨우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지만, 187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종의 친정 체제가 시작되었다. 당시 세계정세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고종은 침몰하는 왕조의 난파선 뱃머리에 서서 탈출구를 찾기 위해 진력을 다했다.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냈던 미국인 오웬 데니는 고종이 매우 용감하고 현명하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데니는 청나라 실세였던 이홍장이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보낸 인물이었다. 덕수궁은 갖은 풍파를 겪은 고종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좌측 철제 출입문이 영국대사관 부지(통로가 막혀 있다. 반환 요구된다) / 우측 출입문이 덕수궁 내부 통행로 진입문

10) 덕수궁 내부 통행로(2분 거리) /덕수궁 북쪽문

영국대사관과 일부 덕수궁 돌담을 공유하고 있다. 즉, 덕수궁 외곽 통행로가 끊겨 있다. 영국과 반환 협상 중이라고 한다. 덕수궁 내부 순환길 통행할 때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내부 보행로(좌측 속이 빈 고목나무가 고종의 마음을 잘 대변해 준다)

짧은 내부 보행로를 통해 덕수궁내의 일부를 볼 수 있다.

내부 보행로에서 본 석조전(우측)

내부통행로 끝에서 덕수궁 돌담 밖 대로로 나오면 시청이 보인다.

시청(정면 )

대한제국은 경술국치(1910년)로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했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독살설이 꼬리를 물었다. 그간 눌려 있던 백성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3.1 운동으로 이어졌고,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들었다. 대한제국의 국호를 상해 임시정부가 계승했다. 고종의 노력이 결국은 빛을 보았다. 오늘을 살고 있는 남북은 민족의 통일과 미래를 위하여 립성과 진정성을 가지고, 좀 더 현명한 판단을 하기를 기대하여 본다.


오늘은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일제에 투쟁한 3.1절 날이라 덕수궁 돌담길 역사가 더욱더 가슴에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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